백일장을 마치고
지난 수요일(2007. 5. 23)에는 우리 학교에서 올해로 25회째 맞는 '전국 고교생 백일장'이 열렸다. 이름에 걸맞게 전국에서 고교생들이 모여 들었다. 어떤 지방에서 온 인솔 교사는 자기 지역의 대학에서도 우리와 같은 날 백일장이 있는데 거기에는 세 명이 가고 우리 학교에는 10명이 왔다고 했다. 그만큼 우리 학교 백일장이 역사와 전통이 있다는 뜻이다. 시부와 산문부로 나누어 각각 1, 2, 3등에게 교육인적자원부가 인정하는 문학 특기생 특례 입학 제도에 따라 전국의 어느 대학이든 국어국문학과와 국어교육과, 문예창작과의 문학 특기생으로 지원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는 점도 이런 인기(?)에 물론 작용했을 터이다.
올해의 글감은 여행, 미국, 색깔 이렇게 셋이었다. 여러분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듯이 대부분의 학생이 '여행'을 골랐다. 따지고 보면 우리 삶에 어디 여행 아닌 것이 있겠는가! 공간뿐만 아니라 시간을 넘나들어도 여행이니까. 따라서 이 글감에 많은 학생들이 매달린 것은 당연하다. 그래도, 고등학생들의 사회 문제라든지 시사에 대한 감각을 알아보고 싶어 낸 '미국'에 대해 쓴 학생은 거의 없는 것은 좀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백일장을 마치고 나서 나는 허탈감에 젖어 '이 아이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하는 질문을 되풀이했다.
'여행'의 대중성 때문에 저런 결과가 나왔다고 해석할 수 없는 것은 아니겠다. 그래서 내 허탈감에 과장이 섞였다고 지적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 사실이 이랬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학생들이 낸 글의 내용을 보면 아니라고 할 수밖에 없다. 거의 하나같이 가정사, 그것도 어머니나 할머니 얘기였다. 그러니 우리 학생의 시선이 가족 밖으로 나갈 여지가 아예 없는 것이다. 자기 영역밖에 모르는 가족주의의 못난 속성을 키우는 온상이 우리 고등학생이라는 생각에 이르면 정말이지 우리의 미래가 암담하다.
경험의 폭이 좁아서일 거라고 따뜻하게 못 봐 줄 것은 없다. 그렇지만 어디 직접 경헙뿐이냐고 누가 반박하면 대꾸할 말이 궁해진다. 도대체 책이나 신문은 어디 간 것인가? 북핵을 둘러싼 갈등, 한미자유무역협정, 이라크 침공과 같은 우리의 삶을 완전히 바꿔 버릴 수도 있는 굵직굵질한 사건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는데 어떻게 우리 학생들은 이런 사안에 무심할 수 있을까? 하다못해 날마다 의무적으로 혹은 억지로 학교로 모자라서 학원에서까지 공부해야 하는 영어도 미국과 연관된 문제 아닌가.
그리고 꼭 직접 경험에 한정해서 글을 쓸 필요는 없다는 점도 강조해 두고 싶다. 특히 산문은 논리와 비판 정신이 작동하지 않으면 성립하지 않는다. 아무래도 우리 학생들은 산문을 자기가 겪은 것을 문학적인 수사를 곁들여 쓰는 것으로만 오해하고 있는 것만 같다. 자기의 심정을 진솔하게 토로하는 가벼운 수필 정도로 여기고 있다는 뜻이다. 대학에서 요구하는 논술도 산문에 들어간다는 점을 확실히 해 두자. 이런 종류의 글에서 직접 경험은 그리 필요한 요소가 아니다. 회의의 정신, 상식을 삐딱하게 보는 태도라든지 교양이 훨씬 더 중요하다.
여기까지 오면 '아니, 이게 어디 학생 책임이냐'는 질문을 비껴갈 수 없다. 이런 문제가 나오기만 하면 늘 거론되는 교육의 책임도 물론 있지만 나는 오히려 우리 어른들의 삶의 태도에 더 큰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구체적으로, 위에서 얘기한 가족주의의 편협성, 정신을 배척하는 지경에 이른 물질주의가 그 주범이 아닌가 한다. 오지랖 넓게도 부모가 아이의 미래까지 책임을 져 주려고 하니 아이는 늘 응석을 부리고 주체가 되려고 하지 않는다. 자기 생각이 있을 수 없다. 혹시 있다고 해도 시험을 잘 치르기 위한 기술일 뿐이다. 아이니까 자기 영역을 뛰어넘어 밖의 세계에 관심을 쏟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물질주의에 대해서도 몇 마디 말이 없을 수 없다. 지금 당장 선거를 치르면 대통령으로 뽑힐 게 확실한 이명박 후보의 인기의 밑바탕에는 우리의 천박한 물질주의가 도사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노골적으로 말하면, 저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경제적으로 풍족하게 되리라고 예상하고 있는 것이다. 자연을 파괴할 것이 틀림이 없는 운하 건설(운하 건설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여기를 보세요)을 말하는 것으로 미뤄 보면 저런 예상에 나는 돈을 걸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지만, 백번 양보하여 그의 경제적 능력을 믿는다고 하여도 그가 우리 삶의 질을 높이는 측면에 대해서 내놓은 것이 거의 없다는 점에 이르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행복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돈에 대한 지나친 숭상과 함께, 시각 매체의 압도적인 영향에 말미암은 외면 중시도 물질주의와 연결되어 있다. 이런 것을 중시하는 사람들이 모인 사회에서 교양 서적을 읽고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는 것은 쓸데없는 낭비가 된다. 나 혼자 물질적으로 풍족하게 잘살면 되기 때문이다.
백일장을 놓고서 너무 큰 얘기로 나가고 말았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우리가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라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