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난 길

상처 입을 수 있는 권리(2002. 9. 19)

귤밭1 2004. 10. 14. 08:46
아니, 상처를 입는 게 권리라니! 이상하기도 하여라. 그렇지만 시인이 한 말이라면 달리 생각해야 할지도 모른다. 들어 보기로 하자.

젊은 날의 좌절과 방황은 사실 지나고 보면 찬란한 것이다. 아픔 없는 성숙은 성숙이 아니며, 그들이 살아 있는 생명인 한 아프지 않을 수 없다. 살아 있다는 것은 상처 입을 수 있다는 것이며 상처는 살아 있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일종의 생명 현상이다. 더구나 어른들보다 훨씬 순수하고 활기 있는 감수성을 갖고 있는 젊은이들이 그들의 독립적인 생의 기간 동안, 그들의 열렬한 호기심과 욕망을 이러저러한 체험을 통해 충족시키지 말라는 법은 없다.(정현종, <젊은 날의 사랑 연습>, <<날자, 우울한 영혼이여>>, 민음사, 1975, 134쪽)
벌써 가을이다. 지난 여름의 막바지는 정말이지 너무 가혹한 시간이었다. 거듭 닥친 태풍은 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그 피해의 정도를 생각하면 도대체 상대가 되지 않아 같이 말하기가 어색하기는 하지만 아폴로 눈병 때문에도 고생을 많이 했던 것이다. 병이 널리 퍼져서 학교가 쉬는 일도 생겼으니 말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눈병에 걸린 학생이 일부러 옮기기도 하고, 심지어 스스로 그 병에 걸리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던 학생도 있었다는 점이다. 눈병 걸린 사람을 멀리서 보는 일도 피하고만 싶었던 소심한 어른과는 달리 우리 어린 학생들은 장난삼아 즐거이(?) 병을 앓기도 한 것이다.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는 이들의 가벼운 행동에 놀라면서도 한편으로는 상처를 입겠다는 적극적인 태도가 그지없이 통쾌하기도 했다. 그렇다. 젊은이는 뭔가 어른과는 달라야 하는 것이다!

매일 학교에 가는 일이 지겨워서 일부러 앓기도 했을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그들을 가볍다고만 볼 것은 아니다. 상처를 통하여 학교가 달라져야 한다는 점을 알리고자 했던 것이라고 받아들이기도 해야 한다. 얼마나 못 견뎠으면 그랬을 것인가! 아울러 상처를 입을 수 있는 것은 젊은이에게만 주어진 특권이라고 너그럽게 이해해야 마땅하다.

살아 있는 것치고 아픔이 없이 잘 자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태풍의 피해가 말할 수 없이 크기는 했지만 그것을 견딘 나무는 이제 웬만한 바람에는 꺾이거나 쓰러지지 않을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상처가 두려워질 뿐만 아니라 어쩌다가 한번 상처가 나면 잘 낫지도 않는다. 몸의 상처도 마음의 아픔도 다 그렇다. 좀 좋게 말하면 안정된 삶을 영위해서, 부정적으로 보면 자신의 건강만을 생각하는 폭 좁은 사람이 됐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때는 그런 모습이 몹시 서글프다. 이것저것 재지 않고 맹목적인 열정에 뛰어들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어른이 그러면 대부분의 경우 다른 사람―이를테면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에게 큰 피해를 입히고 그 자신도 웃음을 사기 쉽다.

그런 점에서 다시 강조하건대 상처를 받는 것은 젊은이가 누릴 수 있는 복된 권리다. 그러니 우리 젊은이들은 모험이 가져올지도 모르는 실패를 미리 두려워하지 말자. 무모하다 싶게 달려들어 보자. 이런 시도가 결코 괜한 낭비만은 아니고 앞으로 할 일을 탐색하는 과정이라고 여기자. 상처를 입어 아프면 어떤가. 젊음의 힘으로 곧 나을 텐데, 그리고 더 굳세게 만들어 줄 텐데! 젊은이에겐 실수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그래서 시인은 젊음을 찬란하다고 한 것일 게다.

젊은이들에게 하는 말이지만 마음이 젊은, 특히 여기(아래에 나와 있는 '훈이네집')에 글을 올려 상처를 이미 입었거나 앞으로 그럴지도 모를 분들에게 꼭 들려 주고 싶은 얘기이기도 하다.

훈이네 집으로 가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