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난 길
나(2003. 5)
귤밭1
2004. 10. 17. 06:35
홍세화에 의하면 프랑스와 한국의 문화에서 근본적으로 차이나는 것은 참다운 개성의 존재 여부에 있다. 프랑스 사람들은 각자가 개인으로 존재하지만 한국 사람들은 획일화되어 있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권위주의와 지역주의가 판을 친다.
성숙한 개인주의와는 동떨어진 우리 모습은 너무 흔한 것이어서 아무 데서나 찾아볼 수 있다. 떠오르는 대로 얘기해 보자. 먼저, 외국을 여행하면서 느낀 것이다. 어딜 가든지 좀 과장하면 한국 사람의 떼로 넘쳐 난다. 그런데 거기에는 꼭 안내자가 있고 여행객들은 그를 졸졸 따라다닌다. 아주 멀리서라도 줄을 지어 다니고 있는 사람들이 보이면 한국인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없다. 우리는 여행하면서도 지도자에게 순종하는 온순한 시민이 되는 훈련을 받고 있는 것이다. 여행이 뭔가? 쉬거나 마음대로 뭘 하거나 하지 않기 위해서 떠나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는 여행의 정신에 정면으로 어긋나는 짓을 하고 있는 셈이다. 군사 문화가 군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일상 생활에 의식하지 못하도록 촘촘히 스며들어 있는 것을 생각하면 섬뜩해지지 않을 수 없다. 이른바 우리 안의 파시즘이 깃드는 통로가 우리 한국 사람의 여행인 것이다. 대학생들이 과 단위로 어디로 가 자유와 비판을 근간으로 하는 대학의 정신과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군사 훈련 비슷한 것을 한다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보면 그렇게 이상한 것이 아닐지 모른다.
이제 곧 유월이다. 작년의 월드컵 열풍과 '붉은 악마'의 응원이 떠오른다. '붉은 악마'의 일방적인 응원은 나를 아주 불편하게 했다. 축구 경기에 지나지 않는 것을 가지고 지나치게 우리나라 선수들을 일방적으로 응원했기 때문이다. 다양성을 무시하는 획일주의의 벌거벗은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혹시 초대형 태극기가 젊은이들의 개성적인 얼굴과 생각을 가려 버린 것은 아닐까? 이런 것과 연관되는 것으로 획일주의가 우리 사회가 풀어야 하는 중요한 문제라는 점도 지적해 두자. 악성의 지역주의야말로 이런 현상의 전형적인 예이다.
이러한, 자유로운 개인이 없는 집단주의는 내가 아니라 가족이나 나라를 위하여 산다-따지고 보면 나 아닌 다른 사람이나 사회를 위하여 제대로 산다고 할 수도 없지만-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예를 들어, 일본 선수와 무슨 경기를 하면 우리가 꼭 이기지 않으면 안 된다고 대놓고 얘기하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한국 사람이 일본에 가서 선수 활동도 하고 따라서 경기 그 자체를 즐겨야 하는 쪽으로 현실이 변하고 있는데 우리는 아직도 국가주의에 얽매여 있다. 흥미를 가진 사람만 즐겨야 할 축구 경기가 어째서 이른바 국민적 관심사가 되어야 하는지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경기를 볼 때도 선수들의 국적에 관계 없이 기량이 훌륭하면 찬탄의 박수를 보내면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 선수들이 지면 어떤가? 기분 상할 일이 그런 것이어서는 쑥스럽지 않은가! 본론에서 좀 벗어나지만, 경기 그 자체를 즐기는 것이 최고의 경지라는 점도 덧붙이고 싶다.
이제는 축구경기도 '우리 모두'가 되어 "대한민국"이라는 함성의 매력에 이끌려 볼 것이 아니라, 축구를 즐기는 애호가답게 경기 그 자체를 즐기며 볼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축구 선수들을 태극전사가 아니라 히딩크처럼 이 나라 저 나라를 돌아다니며 자신들의 기술을 연마하는 고급 전문가로 볼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이다.(박노자, <<나를 배반한 역사>>, 인물과사상사, 2003, 199쪽)이 세계화 시대에 우리를 내세우면서 남과 우리를 배타적으로 구분하는 일은 한마디로 우스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서로 다른 개성을 가진 사람들이 한 울타리 안에서 평화롭게 살아가는 일이야말로 우리가 꿈꾸는 이상 세계의 모습일 것이다. 다른 집단에 대해 배타적일수록 그 내부에서는 온갖 억압과 불의가 판을 친다.
앞으로 돌아가서, 홍세화는 프랑스 사람들이 우리와 아주 다르게 개성적인 인간이 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어릴 때부터 토론을 일상적인 삶의 방식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새겨 들을 만한 말이 아닐 수 없다.
'왜?'는 이치를 따짐이다. 곧 합리성의 추구이다. 힘의 논리를 궁극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것은 합리성이다. '왜?'의 발생은 토론 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한 첫걸음이기도 하다.지난번에 방송에서 대통령과의 토론이 있었다. 재미가 없었다. 말만 토론이었지 대통령의 설명과 주장을 듣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토론자들이 서로 동등한 자격으로 자기 주장을 펼치는 것이 아니라 이른바 토론자가 질문하면 대통령이 대답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토론이 아니다.
내가 들은 풍월에 의하면, 프랑스의 어린이들이 '엄마 다음으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가 '왜?'로서 '아빠'보다 더 자주 사용한다고 한다. 실제 어린이들은 세상과 만나면서 끊임없는 물음과 만나게 된다. 손가락은 왜 다섯 개이며 입은 하나인데 귀는 왜 두 개인가? 호기심에 가득 찬 순진무구한 어린이들이 말을 배우면서부터 끊임없이 '왜?'라는 물음을 던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 점에는 한국의 어린이들과 프랑스의 어린이들 사이에 차이가 없다. 차이는 엄마에게서 비롯된다. 프랑스의 엄마들―아빠도 마찬가지인데―은 때로는 순진하고 때로는 엉뚱하기 짝이 없는 아이의 물음에 성실하게 답해준다. 순진한 물음에는 순진하게 엉뚱한 물음에는 엉뚱하게, 끊임없이 이어지는 물음에 참을성있게 끝까지 답해 준다. 나는 단 한 번도 "그런 건 몰라도 돼"라든가 "귀찮게 왜 자꾸 그러니"나 "크면 다 알아"와 같은 대꾸를 들어본 적이 없다. 왜? 시간여유가 충분해서? 그런 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는 아이를 가족의 한 성원으로 보고 대화의 상대로 인정해 준다는 점이 더 크다고 본다. 습속이 그런 것이다.
이와 같은 프랑스 엄마들에 비해 한국의 엄마들은 어떤가? 또 아빠들은 어떤가? 아이를 끔찍이 생각한다는 점에서는 한국의 부모들이 더 열성이다. 아이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사줄 용의도 있다. 그러나 끝없이 이어지는 '왜?'에 성의있게 대답하는 엄마와 아빠는 아주 드물다. 왜? 시간 여유가 없어서? 그렇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아이를 대화의 상대로 보기보다는 '내 것' 즉, 소유물로 보는 타성과 그 자신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습속 등 사회습속이 더 많이 작용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넌 그런 거 몰라도 돼"나 "귀찮게 왜 그러니"나 "크면 다 알아"를 몇 차례 들은 아이는 '왜?'라는 물음을 스스로 접게 된다. 그러나 가장 가까운 엄마에게서 거부된 '왜?'라는 질문을 던질 곳은 더 이상 없다. '왜?'라는 질문이 일찍부터 실종되는 것이다.
한국과 프랑스의 이 습속의 차이는 대단한 중요한 사회적 결과를 가져온다. 아이들의 사회에서부터 대화가 통하지 않고 '힘의 논리'가 관철되는 것이다. (중략) 나는 이 글을 읽는 부모에게, 또 장래의 부모에게 아이들의 '왜?'라는 물음에 성실하게 대답해 주라고 간곡하게 당부하고자 한다. 간단히 대답할 수 있는 질문에는 간단하게, 황당한 질문에는 더욱 황당하게 답변하시라. 아이는 꿈과 상상의 날개를 마냥 펼쳐 나갈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졸라대는' 아이를 보기 어렵다. 간혹 졸라대는 아이가 있긴 하지만 엄마가 설득하면 금방 그친다. 그동안 대화를 해왔기 때문에 대화로 해결되는 것이다. 이에 반해, 한국의 아이가 조르는 행위는 자신을 금쪽같이 아껴주는 부모에 대한 반사적 행위로서 '힘의 시위'로 나타난다. 대화로 풀리지 않고 목적이 달성되거나 아니면 엄마의 '힘에 의한' 묵살로 끝나게 된다.
이와 같은 '힘의 논리'의 관철은 그 아이가 사회에 진출할 때까지, 아니 죽을 때까지 계속된다. 과연 그 아이는 아주 어렸을 때 포기했던 '왜?'라는 물음을 언제, 어디서, 어떤 계기로 되찾을 수 있는가? 학교에서? 군대에서? 직장에서?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엄마에게서 거부되었는데? 사회 곳곳에서 힘의 논리, 서열의 논리가 관철되고 있는데? 그 아이가 커서 힘을 논리, 서열의 논리가 관철되고 있는데? 그 아이가 커서 힘을 무조건 따르고 권위에 경배하는 것을 어떻게 피할 수 있는가? 대중은 이미 '힘의 논리'에 무감각하기까지 하다.
그 위에 오늘도 각종 정보를 쏟아내는 대중 매체의 작용이 보태진다. 현대인들은 앎과 정보를 혼동하여 받아들이고 있다. 따라서 모든 사람 '알고' 있다고 스스로 믿고 있다. 알고 있다고 믿고 있으므로 자신의 생각을 바꾸지 않는다. '왜?'라는 물음을 되찾지 못한 채 스스로 '알고 있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 힘의 논리는 계속 관철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우리는 여기서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속담을 되뇌어야 할 것이다. 어렴풋이 아는 것이 아예 모르니만 못하기 때문이다.(홍세화,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 한겨레신문사, 2002, 48-51쪽)
나는 서양의 법정 영화(이런 말이 있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재판 과정을 주로 보여 주는 영화를 뜻하는 말로 쓴 것이다)를 아주 즐겨 본다. 살아 있는 토론 문화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거기서는 피고인이라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과 동등한 자격으로 자기 주장을 편다. 나이나 권위 같은 것은 헤아릴 만한 요소가 전혀 되지 못한다. 오로지 논리와 증거를 가지고 동등한 권리를 가진 상대방의 주장에 맞설 뿐이다. 그러니 재미가 없으면 이상하다. 물론 이렇게만 얘기하면 사태를 왜곡할 위험이 있다. 돈이라든가 권력이라는 배경이 재판을 좌지우지하는 경우가 없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우리와 비교하면 하늘과 땅만큼의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은 다 인정할 것이다.
결국 토론이 제대로 이루어지려면 서로가 동등한 자격을 가진 존재라는 점을 흔쾌히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논리나 증거 이외에는 어떤 것으로도 상대방을 누를 수 없다고 전제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지난번의 토론회를 보면, 흔히 마주치는, 싸움의 끝에 이르러 나이와 조상을 따지는 싸움의 전형적인 모습이 투영된 측면이 아주 없지는 않다고 할 수 있겠다.
결국 중요한 것은 개인의 자유와 자율성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갖는 일이다. 내가 속한 집단이나 권위를 지닌 존재가 강요해서가 아니라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자발적으로 우러나오는 것을 따르고야 만다는 개인의 의지와 그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존중하련다는 사회의 태도가 필요하다. 그럴 때만 우리는 저마다 독자적인 삶을 누리는 '나'가 된다.
방송에서 토론 프로그램이 늘어나는 것은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처음부터 잘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에 위에서 말한, 좀 어설픈 모습이 나타난다고 하여도 고쳐 나가면 될 일이라고 여유를 가지고 보는 것이 좋겠다. 이렇게 생각하다가도 최근의 대통령의 몹시 경직된 행보를 보면 그리 낙관적일 수만은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쩐 일인가?
훈이네 집으로 가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