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난 길

웃음과 눈물에 대하여(2003. 2. 19)

귤밭1 2004. 10. 21. 08:06
어제(2003년 2월 18일) 밤에 KBS1 TV에서 연속으로 내보내는 <생로병사>를 보았습니다. 어제는 웃음이 암을 치료할 수 있을 정도로 몸에 좋다는 얘기를 과학적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안 보신 분들을 위하여 생각나는 대로 웃음이 어떻게 우리 몸에 좋은지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우리 몸에는 자연 살상(NK: Natural Killer) 세포가 있답니다. 이 세포는 암 세포를 파괴하는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웃으면 이 세포의 활동이 활발해질 뿐만 아니라 그 수가 알아 보게 늘어납니다. 그러니 웃음이 암을 치료한다는 게 말짱 헛말일 수는 없지요. 또 웃음은 스트레스 호르몬을 현격하게 줄여 준답니다. 웃고 나면 가슴이 시원해지는 게 바로 이런 작용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효과는 꼭 웃겨서 웃을 때만이 아니라 일부러 또는 억지로 웃어도 나타난다니 신기합니다. 웃음은 또 얼굴뿐만 아니라 몸의 근육을 활발하게 움직이게 하여 운동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결과를 가져다 줍니다. 달리기와 비교하여 어떻다는 얘기도 했는데 기억할 수 없어서 여기에 옮기지 못하겠습니다.

그런데 얼굴에서 웃음을 결정짓는 것은 입이랍니다. 입꼬리가 위로 올라가면 웃는 모습이 되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 한국 사람들은 서양인들에 비해 입꼬리가 조금 밑으로 내려가 있어 평소에 무겁게 보인답니다. 어제도 대구 지하철역에서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나 사람들이 많이 죽은 데서 보이듯 웃을 일이 적은 대신에 신경을 쓰고 마음을 졸여야 할 일이 상대적으로 너무 많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인지 모릅니다. 20세기의 역사만 보아도 식민지 경험, 분단, 전쟁 등 결코 웃을 수 없는 굵직굵직한 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근래 들어서 전체적으로 많이 나아지기는 했지만 집에서는 아이들 교육 문제, 집을 나서면 교통 문제, 환경 문제, 나라의 차원에서는 대북 관련 문제 등 모두 심각하게 생각해야 될 것 투성이지요. 이 가운데서 어떤 것들은 더 나빠졌다고 해야 맞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여도 늘 무겁게 살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어렵다고 해도 웃음의 시간은 있는 법입니다. 의식적으로 가벼워지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자면 우리가 마주치는 대상에 대하여 방심한 듯한 태도를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좀 어려운 말로 거리를 두어야 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희극 배우가 자기 가족이면 아마도 마냥 웃기는 어려울 거예요. 어느 순간에 문득 가족의 생계를 위하여 저렇게 웃기자고 하는 것이 눈물겹게 보일 수 있으니 말입니다. 한마디로 거리가 가까워서 내 문제로 느껴지게 되면 심각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여유와 유연한 태도를 가져야 웃음이 나옵니다. 또 입꼬리를 위로 올리는 연습도 해 볼 만합니다. 자꾸 연습하면 저절로 웃는 얼굴이 된다니 무슨 일에서든 연습이 완벽하게 만든다는 말이 통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 함께 거울을 보며 '김치'라고 소리내 봅시다. 웃는 모습이 보이지요.

이렇게 웃음은 우리 마음과 몸을 건강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런데 이런 기능은 웃음을 유발하는 대표적인 문학의 갈래인 희극에서도 발휘됩니다. 희극에서 조롱거리가 되는 인물은 기계적인 인물이거나 편집광입니다. 이들은 과거의 것들을 고집스럽게 유지하려고 하면서 새로운 것이 나타나는 것을 방해합니다. 이런 고집은 낡은 것을 유지하려는 것이어서 당연히 새로운 세대에게는 엉뚱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엉뚱함이 웃음을 유발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 방에 있는 <비틀기-웃음에 대하여>에서 이미 얘기한 바가 있습니다.
편집성이 갖는 극적 기능은 의식적 속박(ritual bondage)이라고 일컬어질 만한 상태를 표현해 주는 것이다. 방해꾼은 자신의 편집증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극 중에서 그의 역할이란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의 망집(妄執)을 되풀이하는 일이다. (중략) 수전노는 황금을 숨기는 일 또는 돈을 저축하는 일과 관계되지 않는 일은 일체 행할 수도 없거니와 일체 말할 수도 없다. (중략)

편집성의 원리는 쓸모없는 행동을 반복하는 것, 즉 의식적인 속박을 문학적으로 모방하는 것이 우스꽝스러운 것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비극에 있어서-<<오이디푸스 왕>>이 정해진 실례이지만-반복은 논리적으로 파국에로 이르게 된다. 너무 지나치게 많이 반복한다거나, 그렇기 때문에 어느 곳으로 갈지 모를 정도로 방향이 없는 반복은 희극의 영역에 속한다. 왜냐하면 웃음은 얼마간의 반사운동이며, 다른 반사운동처럼 단순히 반복되는 패턴에 의해서 조장될 수 있기 때문이다.(N. 프라이, 임철규역, <<비평의 해부>>, 한길사, 1982, 235-6쪽)
그런데 희극은 웃음거리가 된 인물이 마음을 바꾸는 것으로 끝납니다. 결말 부분의 잔치는 이런 것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웃음의 대상이 되는 인물이 새로운 사회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지요.

희극은 그 결말에서 얻게 되는 새로운 사회에 가능한 한 많은 수의 사람들을 참여시키려는 경향을 갖고 있다. 방해꾼들도 단순히 추방당하기보다 화해하기도 하고, 개심하기도 하는 경우가 더 많다.(N. 프라이, <<비평의 해부>>, 231쪽)
결국 웃음은 현실에 맞지 않는 것들을 현실에 맞게 치료하는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설명한 것을 희극에 적용하면 자연살상 세포가 암세포인 완고한 태도를 파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희극에 있어서 편집성에 빠져 있는 사람은 보통 상당한 사회적인 특권과 권력을 가진 사람이므로, 자신의 망집에 따라서 극 중의 사회를 무리하게 한 쪽 방향으로 나아가게 할 수 있다. 이리하여 편집성은 우스꽝스러운 법이나 불합리한 법률의 주제와 밀접한 관련을 갖게 되지만, 희극의 극적 전개는 이런 것을 파괴시켜 버리는 방향으로 나아간다.(N. 프라이, <<비평의 해부>>, 236쪽)
그런데 눈물도 웃음과 마찬가지로 우리 몸에 좋답니다. 웃음이 그렇다는 말에 대해서는 얼른 동의할 수 있지만 눈물에 대해서는 좀 뜻밖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조금만 더 생각하면 그럴듯한 바가 있다고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실컷 울고 나면 가슴이 시원해지는 경험을 한 일이 있을 테니 말입니다. 비극의 기능으로 드는 카타르시스를 생각해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카타르시스는 원래 속에 들어 있는 거북한 것을 깨끗하게 하는 설사제를 뜻한답니다. 비극을 보고 나면 이런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인데 한마디로 마음이 정화된다는 말입니다. 왜 그러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복잡한 설명이 있습니다만 여기서는 비극적인 일과 정면으로 마주서는 데서 오는 결과라고 간단히 설명해 두겠습니다. 이런 경우에 흘리는 눈물은 마음의 때(진실을 가렸던 편견, 헛된 욕망)를 씻어내는 정화제인 셈입니다.

사실 눈물을 흘리는 경우를 가만히 생각하여 보면 눈물이 우리 마음을 깨끗이 해주는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불쌍한 사람들에 대한 동정의 마음, 자신의 부끄러움에 대한 솔직한 인정,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깊은 공감은 대개 눈물을 불러오게 됩니다. 물론 속이 상해서 흘리는 눈물은 처음에는 앞의 것과는 다르게 시작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탐욕을 비우는 쪽으로 흘러간다는 점에서 눈물의 일반적인 성질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요컨대 잘 웃거나 울자면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무엇에 집착해 있어서 다른 데를 보지 못하면 마음과 몸이 늘 무겁기만 합니다. 앞에서 본 대로 어떤 일이나 대상에 기계적으로 매여 있는 편집증적인 인간이 늘 웃음의 대상이 되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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