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난 길
오래된 사진에 대하여
귤밭1
2004. 10. 28. 08:05
오래된 흑백 사진에는 벤야민(W. Benjamin)이 말하는바 원본만이 지니는 신비한 기운 즉 아우라(Aura)가 서려 있다. 빛이 바래면서
흑백이 아주 원만하게 변하여 조화를 이루는 것 같다는 느낌이 이런 분위기를 더 강화한다. 그런데 옛날에 찍은 흑백 사진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이제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을 상기시키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노라면 그리스 예술의 우수성에 대한 마르크스의 유명한 발언이
떠오른다. 그는 "그리스 예술이나 서사시가 우리들에게 여전히 예술의 즐거움을 주고 있으며 어떤 면에서는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모범이요 전범으로
남아 있다"고 하면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들고 있다.
그런데, 예를 들어 산은 늘 아름답다. 그러므로 아름다움은 주체의 마음의 작용이라고만 해서는 안 되고 대상과 주체의 일치(correspondence)에서 오는 행복한 결과라고 해야 실상과 가까울지 모르겠다. 창조적인 노동을 그 예로 들 수 있는데, 이 때의 아름다움은 주체와 대상이 완벽에 가깝게 호응하는 데서 나온다. 상상하건대, 이런 경우에는 주체만 능동적인 것이 아니라 대상도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주체에게 뭘 호소하고 요구할 것만 같다. 그러니 이를테면 산과 대화한다는 게 말짱 헛말은 아닌 셈이다.
오래된 사진의 아름다움과 매력은 이제는 되돌리기가 불가능해져 버린 과거를 상기하게 해 줌으로써 잠시나마 과거의 순수한 나로 돌아가게 하는 데서 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바로 그때 우리는 사진과 일치된 상태가 된다.
훈이네 집으로 가는 길
어른은 유치해지지 않는다면 다시 어린이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사람은 어린이의 꾸밈없는 방식에서 기쁨을 누리지 않는가? 그리고 더 높은 단계에서 어린이의 진실성을 재생시키려고 노력해서는 안 되는가? 모든 시대의 성격은 어린이의 성격 속에 완벽하게 재생되는 것이 아닌가? 왜 가장 아름답게 발육한 인류의 사회적 유년기가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시대로서 영원한 매력을 발휘해서는 안 되는가? (중략) 그리이스 예술의 매력은 오히려 미발전된 사회 단계에서 나온 결과이며, 그리스 예술이 발생했고 나타날 수 있도록 한 미숙한 사회적 조건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는 사실에서 나오는 것이다. (Marx, A Contribution to the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Marx and Engels, Literature and Art, International Publishers, 1947, pp. 19-20)이런 주장이 맞는지는 모르겠으나 오래된 흑백 사진이 주는 매력을 설명하는 데는 크게 도움이 된다. 옛날 사진에는 우리의 과거가 살아 있다. 그것을 보는 우리는 혹은 안타까움으로 혹은 자족적인 기분이 되어 얼굴을 붉히기도 하고 웃기도 하면서 그 시절로 돌아간다. 그러니까 이때의 아름다움은 사진 자체가 객관적으로 지니고 있다기보다는 우리가 아름다움을 부여한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아니면 순수한 시절로 되돌아가는 우리 마음이야말로 아름다움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다시 돌아갈 수 없으니까 더 절실해지는 그런 것이 아름다움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결국 아름다움은 마음의 작용인 셈이다.
그런데, 예를 들어 산은 늘 아름답다. 그러므로 아름다움은 주체의 마음의 작용이라고만 해서는 안 되고 대상과 주체의 일치(correspondence)에서 오는 행복한 결과라고 해야 실상과 가까울지 모르겠다. 창조적인 노동을 그 예로 들 수 있는데, 이 때의 아름다움은 주체와 대상이 완벽에 가깝게 호응하는 데서 나온다. 상상하건대, 이런 경우에는 주체만 능동적인 것이 아니라 대상도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주체에게 뭘 호소하고 요구할 것만 같다. 그러니 이를테면 산과 대화한다는 게 말짱 헛말은 아닌 셈이다.
오래된 사진의 아름다움과 매력은 이제는 되돌리기가 불가능해져 버린 과거를 상기하게 해 줌으로써 잠시나마 과거의 순수한 나로 돌아가게 하는 데서 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바로 그때 우리는 사진과 일치된 상태가 된다.
훈이네 집으로 가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