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난 길
어미 소와 송아지
귤밭1
2004. 11. 1. 09:35
전에 신경숙의 <풍금이 있던 자리>에 대해서 논의한 적이 있다. 그런데 그 작품에는 다음과 같은 부분이 나온다.
좀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고 말았는데, 얘기를 꺼낸 것은 어미 소와 송아지의 관계가 제삼자가 어떻게 개입할 수 없는 '특별한' 것이라는 점을 보여 주는 그럴듯한 예를 만나서 그것을 소개하기 위해서다. 좀 길지만 해당 부분을 다 인용하기로 하겠다.
참고로, 위에 소개한 책의 지은이는 세계 최대의 아이스크림 회사 '배스킨 로빈스'의 유일한 상속자이나 그 부를 뿌리치고 채식주의자로서 축산물에 감춰진 진실을 알리는 환경 운동가이다. 이와 비슷한 책으로 축산업을 하다가 환경 운동가, 채식주의자로 탈바꿈한 하워드 리먼의 <<성난 카우보이>>(김이숙 옮김, 문예출판사, 2001)가 있다.
훈이네 집으로 가는 길
우사의 어미 소는 제 새끼가 눈먼 것을 아직은 모르는 모양입니다. 젖을 놓친 송아지가 다시 젖을 못 물고 배를 더듬거리면, 뒷발을 들어 송아지의 엉덩이를 때립니다. 어리광 그만 부리라는 뜻이겠지요. 하긴 송아지 자신도 자기가 눈먼 걸 모를 테지요. 태를 끊었을 때부터 칠흑이었을 테니 세상이 그런 줄, 그런 줄로만 알겠지요. 대신에 제 어미의 기척에 예민합니다. 옆에 있던 어미가 부시럭거리면 저도 부시럭거리고, 제 어미가 일어서면 저도 이엉차, 일어섭니다.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눈은 너무나 맑습니다. 그 눈에 제 눈을 헹궤내고 싶을 정도로요. 헹궤낸 후엔 곧 제 눈앞도 칠흑이 되어서 당신이 다시 와도 알아보지 못했으면……(신경숙, <풍금이 있던 자리>, <<풍금이 있던 자리>>, 문학과지성사, 1993, 28쪽)나는 이 대목을 다음과 같이 읽었다.
한마디로 어미 소와 송아지의, 제삼자가 어떻게 개입할 수 없는 근원적인 관계를 표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눈이 먼 것으로 나왔을까? 안 보이는데도 유지되는 관계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이 개입할 수 없는 세계인 것이다. 따라서 ‘나’는 아내와 딸이 있는 남자를 사랑함으로써 그 딸 은선이와 그 엄마 사이의 끊을 수 없는 자연스러운 관계에 훼방을 놓은 사람이 되고 말았다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내’게 불륜의 사랑을 포기하도록 작용한 것은 어미와 그 새끼의 근원적인 관계이다.(전체 글)나는 지금도 이 부분의 해석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내가 읽은 바로는 이 작품을 다루면서 이런 측면을 지적한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혼자만 읽었다고 함으로써 내 스스로가 보편성을 결여한 주관적인 독법이라는 점을 드러낸다고 할지 모르나 그렇지는 않다. 이 부분을 제대로 읽지 못하면 작중화자가 불륜에서 벗어나게 된 근원적인 이유를 통속의 차원을 벗어나서 설득력있게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좀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고 말았는데, 얘기를 꺼낸 것은 어미 소와 송아지의 관계가 제삼자가 어떻게 개입할 수 없는 '특별한' 것이라는 점을 보여 주는 그럴듯한 예를 만나서 그것을 소개하기 위해서다. 좀 길지만 해당 부분을 다 인용하기로 하겠다.
<월드 파밍 뉴스레터 World Farming Newsletter>는 몇 년 전 소와 송아지의 특별한 관계를 알려주는 짧은 글을 실은 적이 있다.여기까지 이르면 내 논의를 입증할 수 있는 예로서 옮긴다는 애초의 목적에서 한참 벗어나, 아무 생각 없이 맛있다고 하면서 쇠고기를 먹는 나야말로 바로 소설의 작중화자의 어머니를 빼앗은 바로 그 여자와 마찬가지 일을 저지르는 사람이 아닌가 하는 슬픔에 젖어 들고 만다.
두 살 난 암소 블래키는 팔려간 농장을 빠져나와 낯선 길을 7마일이나 걸어 자기가 낳은 송아지가 살고 있는 새 농장을 찾아갔다. 이 얘기는 블래키와 송아지가 데번에 있는 하더리 우시장에서 각각 다른 사람에게 팔리면서 시작된다. 오키햄프턴에 있는 보브 울라콧의 농장으로 팔려간 블래키는 여물과 물을 먹고 잠자리에 들었다. 하지만 본능적인 모성애가 불래키에게 그 우사를 빠져나와 담을 뛰어넘게 하고, 낯선 길을 걷게 했다. 다음날 아침, 블래키는 7마일이나 떨어진 샘퍼드 코트니에 있는 아서 슬리먼의 농장에서 송아지에게 젖을 물리고 있었다. 슬리먼 씨는 블래키의 엉덩이에 붙어 있는 경매 딱지를 보고 송아지의 어미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나는 소가 그토록 영리한 행동을 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저명한 자연과학자 루퍼트 셸드레이크 박사는 육류업계 사람들과 인터뷰한 뒤 그 이야기가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소비에트 위클리 Soviet Weekly>도 비슷한 이야기를 게재했다.
코카서스 지방의 농부 마고메드 라마자노프는 소 한 마리가 집을 벗어나 이웃 마을로 팔려간 송아지를 찾아간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 순하디순한 소가 야생동물에게 잡아먹혔을 거라고 짐작한 마고메드는 집에서 30마일이나 떨어진 곳에서 송아지와 같이 있는 것을 보았다.우리는 젖먹이 동물에세것 어미와 새끼의 깊은 관계를 발견하곤 한다.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포유동물이 그렇다.
많은 사람이 어미 소와 아기 소의 끊을 수 없는 유대감에서 깊은 감동을 받는다. 하지만 그런 아름다움은 슬픔의 그림자에 묻히고 마는 것이 보통이다. 현대식 농장에서 그 유대감이 매일 붕괴되고 있는 사실을 생각하면 머리가 아파온다. 태어나자마자 새끼 소를 어미 소에게서 떼어내면 두 소 모두 치유할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받는다. 어미 소가 송아지에게 젖을 물릴 수 있게 해 주어도 우리는 어미 소에게서 우유를 넉넉히 얻을 수 있다.
역사적으로 인간은 그렇게 하고도 소들에게서 우유를 얻어 마셔왔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그보다 더 경제적인 방법을 택하고 있다. 전부 챙기자는 것이다. 아기 소에게 돌아갈 몫까지 몽땅 빼앗고, 송아지에게는 단 한방울도 나눠주지 않으려 한다. 이른바 '쓸모없는' 수송아지를 고기용으로 팔아 돈까지 챙긴다. 그들은 그렇게라도 하니까 우리가 값싸게 우유를 마실 수 있다고 떠든다. (존 로빈스, 안의정 옮김, <<음식혁명>>, 시공사, 2002, 264-5쪽. 밑줄은 인용자가 쳤음)
참고로, 위에 소개한 책의 지은이는 세계 최대의 아이스크림 회사 '배스킨 로빈스'의 유일한 상속자이나 그 부를 뿌리치고 채식주의자로서 축산물에 감춰진 진실을 알리는 환경 운동가이다. 이와 비슷한 책으로 축산업을 하다가 환경 운동가, 채식주의자로 탈바꿈한 하워드 리먼의 <<성난 카우보이>>(김이숙 옮김, 문예출판사, 2001)가 있다.
훈이네 집으로 가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