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난 길

어느 인디언의 죽음

귤밭1 2004. 11. 13. 19:30

 

문학 이론 가운데 러시아 형식주의라는 것이 있다. 이 이론은 어떤 언어의 덩어리를 문학이게끔 하는 성질을 '낯설기 하기'라고 주장한다. 이 낯설게 하기는 말 그대로 친숙한(낯익은) 것을 처음 본 것처럼 만든다는 뜻인데 내용도 내용이지만 표현 기법을 알아 보는 데 걸리는 시간을 오래 가도록 해야 한다는 데 강조점이 놓인다. 이 낯설게 하기의 구체적인 예들 가운데 하나로 나는 다음과 같은 인디언 추장의 연설을 든다.

워싱톤의 대추장이 우리 땅을 사고 싶다는 전갈을 보내왔다. (중략)

그대들은 어떻게 저 하늘이나 대지의 온기를 사고 팔 수 있는가? 우리로서는 이상한 생각이다. 대기의 신선함과 반짝이는 물을 우리가 소유하고 있지도 않은데 어떻게 그것들을 팔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에게는 이 대지의 모든 부분이 신성한 것이다. 빛나는 솔잎, 모래 기슭, 어두운 숲속 안개, 맑게 노래하는 온갖 벌레들, 이 모두가 우리의 기억과 경험 속에서는 신성한 것들이다. 나무 속에 흐르는 수액은 우리 홍인(紅人)의 기억을 실어 나른다. 백인은 죽어서 별들 사이를 거닐 적에 그들의 태어난 곳을 망각해 버리지만, 우리가 죽어서도 이 아름다운 대지를 결코 잊지 못하는 것은 여기가 바로 홍인의 어머니의 품속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지의 한 부분이고 대지는 우리의 한 부분이다. 향기로운 꽃은 우리의 자매이다. 사슴, 말, 큰 독수리, 이들은 우리의 형제들이다. 바위산 꼭대기, 풀의 수액, 조랑말과 인간의 체온 모두가 한 가족이다.(시애틀 추장 연설, <우리는 한 형제들이다>, <<녹색평론>>, 1991년 11·12월, 60-1쪽)
땅을 사고 팔고 소유할 수 있는 것을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알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참으로 낯선 관점이다. 자연은 인간의 편의를 위하여 마음대로 이용하고 파헤치고 자르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물론 불교 같은 데서는 미물도 함부로 죽이지 말라고 하지만 보통 사람들에게는 그저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 실상 스님이라고 하는 사람들마저 패거리를 지어서 재산 때문에 싸우고 상처를 입히고 한다. 사실 어떻게 보면 저 불교의 영적인 성격은 물질적인 측면에서 여유가 있어서 그런 데 초연할 수 있는 조건 때문에 가능한 것일지 모른다. 예를 들어, 특히 서구인들이 진리의 낙토로 여기는 "티베트도 어느 지역 못지않게 모순으로 가득 찬 계급 사회이며 불평등한 위계 질서적 관계나 종교 집단, 집권 파벌 사이의 갈등 등의 문제를 안고 있다"(박노자, <티베트, 악마에서 천사로-서구인들이 '진리의 낙토'로 찬양하는 땅.... 왜 그들의 감화를 마냥 기뻐할 수 없는가>, <<한겨레 21>> 516호, 2004. 7. 8, 81쪽, 전문, 글쓴이가 참고문헌으로 제시한 것 가운데 하나인 <친절한 봉건 제도: 티베트 신화>도 보세요)는 지적에서 정신적인 초월이 그냥 마음의 작용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아무튼 일상 생활에서 경험하는 물질적 조건의 중요성을 무시한 채 정신의 자유로움을 강조하는 것은 빈부 격차라든가 계급 갈등이라는 현실의 문제에 눈을 감는 것과 같다는 점을 늘 명심할 필요가 있다. 참고로. 헬렌 니어링은 영적인 지도자로 추앙받는 크리슈나무르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얘기하면서 환멸감을 드러내고 있다.

크리슈나는 분명 사회개혁가는 아니며, 이념으로나 현실에서나 대중들과 멀리 떨어져 있었다. 세상에 대한 그 사람의 메시지는 저마다 자기 안에서 변화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고, 위에서 내려오거나 바깥에서 주어지는 정치적인 행위와 경제 개혁으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저마다 자기 안에서 변화할 때에만 세계는 영구히 영향을 받고 바뀔 수 있다. 크리슈나는 간디가 정치 문제, 인종 분리 문제와 경제 수탈에 열중한 것은 잘못 짚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간디가 계급 투쟁으로 세계를 변화시키려고 한다면서 간디는 길을 잘못 든 '매우 폭력적인 사람'이라고 비난했다.

크리슈나는 변화가 이루어져야 할 부분은 인간의 정신이라고 갈파했다. 그리고 누구든지 언제, 어떤 상황에서든 삶의 정점을 체험하고 존재의 정상에 도달할 수 있으며, 주변 상태와 환경의 영향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크리슈나의 의견은 외부 조건이나 극심한 빈곤, 기회와 교육의 결핍 문제는 마음의 힘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것이었다. (헬렌 니어링, 이석태 옮김,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 보리, 1997, 71-2쪽)
이런 말을 들으면, 정신적인 영역에서의 초월을 늘 입에 달고 다니는 많은 종교나 명상가들이 정치적으로는 극히 보수적이거나 심지어 반동적이라는 점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환경과 의무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자유로운, '조건지워지지 않은' 삶을 살라고 외쳤"던 크리슈나무르티는 "가장 특별한 집과 값비싼 호텔에서 묵었다."(79쪽) 먹어야 살 수 있다는 평범한 조건을 무시하고서는 대체로 허황한 얘기밖에 나오지 않는다. 니어링의 말이 사실이라면 크리슈나무르티야말로 그의 주장과는 정반대로 가장 기본적인 조건에 얽매인 사람이라고 해야 맞다.

사정이 이런 만큼 앞에서 들은 바 있는 인디언 추장의 연설이 충분히 낯설기는 하되 다른 세상의 일처럼 생각되어 실감으로 오지는 않았다. 어느 행복한 순간에 마치 애인이기나 하듯이 바람이 피부를 간질여서 내 주위와 내가 일체가 되는 듯한 기분을 느끼는 때가 없는 것은 아니나(<벚꽃은 어떻게 필까?>를 보세요) 그것은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잠깐 동안의 은총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어느 소설을 읽으면서 인디언의 삶의 방식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좀 길기는 하지만 인디언의, 자연이라든지 죽음에 대한 관점을 몸으로 느껴 보기 위해 옮기기로 한다. 윌로 존이라는, 그 행동이나 눈빛이 <<뻐꾸기 둥지 날아간 새>>에 나오는, 정신병원에서 식물 인간이 된 주인공 맥머피(잭 니콜슨)를 베개로 눌러 죽이고 탈출하는 '추장'을 연상시키는 인디언이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이다.

윌로 존이 몸을 뒤척였다. 할아버지와 내가 옆으로 다가서자 윌로 존이 눈을 떴다. 윌로 존은 한쪽 손을 들어 문 쪽을 가리켰다.
"나를 밖에 데려다주게."
"밖은 춥다네."
할아버지가 이렇게 말하자, 윌로 존이 힘없이 중얼거렸다.
"알고 있네."
할아버지는 윌로 존을 안아 올리느라고 한참 낑낑대며 힘을 쓰셔야 했다. 윌로 존의 몸이 완전히 축 늘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나도 할아버지를 도왔다.
(중략)

윌로 존은 험한 산들과 깊은 골짜기들 저 너머, 아득히 서쪽을 보고 있었다. 마치 하늘 끝을 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는 인디언 연방을 바라보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오두막집으로 가서 윌로 존의 긴 칼을 가져오셨다. 할아버지는 그것을 윌로 존의 손에 쥐여주었다. 윌로 존이 칼을 들어올려 굽고 뒤틀린 늙은 소나무 하나를 가리켰다.
"내가 죽으면 저기 있는 소나무 옆에 묻어주게. 저 소나무는 많은 씨앗들을 퍼뜨려 나를 따뜻하게 해주고 나를 감싸주었어. 그렇게 하는 게 좋을 걸세. 내 몸이면 이년치 거름 정도는 될 거야."
"알겠네."
"그리고 보니 비에게 전해주게. 다음번에는 틀림없이 더 나을 거라고."
윌로 존의 목소리는 사그라들고 있었다.
"그러겠네."
할아버지는 윌로 존 옆에 주저앉아 그의 손을 잡았다. 나도 반대쪽에 앉아서 윌로 존의 다른 한손을 잡았다.
"당신들을 기다리고 있겠네."
"우리도 곧 가겠네."
(중략)
윌로 존은 웃으며 내 손을 꼭 쥐었다."
"작은 나무(작중 화자의 이름임)야, 너는 착한 마음을 가졌구나. 하지만 나는 더 이상 이곳에 있고 싶지 않단다. 이제 그만 가고 싶어. 언젠가 네가 오길 기다리마."
나는 울었다. (중략)
윌로 존은 할아버지와 내가 거기 있다는 사실도 잊은 듯, 산 너머 아득한 서쪽만을 바라보았다. 드디어 그는 정령들에게 자신이 가고 있다는 것을 알리는 마지막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죽음의 노래였다. 낮게 시작된 그 노랫소리는 점차 높아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기운없이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좀 지나자 그 노랫소리는 바람소리인지 윌로 존의 목소리인지 더 이상 구별이 되지 않았다. 몸 근육의 움직임이 점점 약해지는 데 따라 그의 눈빛도 희미해져갔다.

할아버지와 나는 그의 영혼이 눈속 깊숙이 빨려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의 영혼이 몸을 떠나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고 나자 한 줄기 세찬 바람이 우리 사이를 지나쳐가더니 늙은 소나무 가지를 흔들어댔다. 할아버지는 그 바람이 윌로 존이라고 하셨다. 그는 그만큼 강한 영혼을 갖고 계셨다. 우리는 그 바람이 산등성이에 서 있는 높은 나뭇가지를 휩쓸고 난 뒤 산허리로 달려내려가 까마귀떼를 공중으로 날아오르게 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까마귀들은 까악까악 울면서 윌로 존과 함께 산 아래로 내려갔다. 할아버지와 나는 윌로 존이 산등성이와 산봉우리들 저 너머로 사라져 가는 모습을 언제까지나 지켜보고 있었다. 우리는 오랫동안 그렇게 앉아 있었다.

할아버지는 윌로 존이 돌아올 거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바람 속에서 그를 느끼고, 나무들의 속삭임 속에서 그의 목소리를 들을 것이다."(포리스트 카터, 조경숙 옮김, <<내 영혼이 따뜻한 날들(원제: The Education of Little Tree)>>, 아름드리미디어, 1996, 321-3쪽)
두 가지만 사족을 달기로 하자. 첫째는 죽음에 대한 인디언의 관점에 대해서다. 여기서 확연하게 드러나듯이 죽음은 커다란 생명 순환 체계에서 자연스럽게 겪는 한 고리일 뿐이다. 몸은 자연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여전히 살아 남아 또 다른 자연이 된다. 그러므로 죽음은 살아 남은 자들에게 일시적으로 슬픔을 주기는 하지만 피해야 될 만큼 두려운 것은 아니다. 그저 자연의 일부일 뿐이다. 우리들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한편으로는 경멸에 가까운 느낌(이런 점에 대해서는 <화장터 이야기>를 보세요)을 생각하면 놀라운 데가 있다. 인디언들은 깨달음을 얻은 자다. 더 놀라운 것은 어려운 생활 조건 가운데서도 그런 경지에 자연스럽게 이른다는 데 있다.

둘째로 자연과의 교감에 대해서도 지적해 두고 싶다. 이 소설의 아무 데를 펼쳐도 인간은 자연의 일부로 살아간다. 개와 같은 동물은 물론이고 나무들과도 대화를 나누고 감정을 교류한다. 처음에는 동화 같아(실제로 동화다) 이상하지만(그야말로 낯이 설었지만) 자꾸 읽다 보니 과연 그럴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연과 인간을 하나로 보는 관점이 소설 전체에 일관되게 스며든 결과일 것이다. 물론 이런 결과는 인디언의 생활 자체가 그러하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 대해 추상적으로 설명하는 것보다도 인상적인 장면을 하나 소개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겠다. 부모가 일찍 돌아가는 바람에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함께 사는 주인공 '작은 나무'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늙은 데다가 교육도 받지 못했으며, 할머니는 인디언이고 할아버지도 반은 인디언"(267쪽)이어서 양육할 자격이 없다는 이유로 강제로 잠시 동안 고아원에 들어갔다가 나와 할머니를 만나는 부분이다.

할머니는 날씨가 쌀쌀한데도 사슴 가죽 옷만 입으신 채, 아침해를 받아 머리카락을 빛내며 서 있었다. 그곳은 산허리의, 벌거벗은 흰참나무 가지들 밑이었다. 할머니는 나를 바라보고 계셨다. 할아버지의 모습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 듯, 오직 나만을 바라보고 싶은 듯한 모습으로 이쪽을 보고 계셨다.
"할머니!"
나는 이렇게 외치다가 발을 헛딛는 바람에 시냇물에 떨어지고 말았다. 다치지는 않았지만 사방으로 물이 튀었다. 아침 공기의 쌀쌀함에 비해 물은 오히려 따뜻했다.

할아버지가 공중으로 뛰어오르시더니 다리를 쩍 벌린 채 "우이이이이이이이!" 하고 고함을 지르시며 풍덩 물 속으로 뛰어드셨다. 산비탈을 뛰어내려오신 할머니도 그대로 첨벙첨벙 물 속으로 뛰어들어와 나를 껴안으셨다 우리는 뒹굴고 물보라를 일으키고 고함을 지르고 좀 울기도 했다. 할아버지는 시냇물 한가운데 주질러앉아 양손으로 물을 떠서 공중에다 뿌렸다. 개들은 통나무다리 위에 늘어서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예기치 않은 소란에 어안이 벙벙한 것 같았다. 우리더러 정신이 돌았다고 생각할 거라고 할아버지가 말씀하셨다. 그렇지만 얼마 안 있어 개들도 서로 앞다투어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소나무 가지 제일 꼭대기에 앉은 까마귀 한 마리가 울기 시작하더니 푸드득거리며 우리 머리 바로 위로 미끄러지듯 내려왔다. 곧바로 다시 날아오른 까마귀는 까옥거리며 골짜기 쪽으로 날아갔다. 내가 돌아온 걸 모두에게 알리러 가는 것이라고 할머니가 말해주셨다.(311-2쪽)

훈이네 집으로 가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