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난 길
사라지는 언어(2002. 2. 23)
귤밭1
2004. 12. 6. 09:14
어제(2002. 2. 22) 한겨레에서 본 기사입니다. 유네스코가 보고한 바에 의하면 지구촌 언어의 절반이 사라질 위기에 놓여 있답니다. 기사의
앞 부분을 인용합니다.
왜 언어가 사라지는 것일까요? 한마디로 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의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전체 기사를 읽으면 그런 점이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우리의 경우 우리말을 쓰지 못하게 했던 일제의 식민지 시기를 생각하면 됩니다. 그러니 우리 사회에서 부는 영어 열풍은 영어를 쓰는 나라들 그 가운데서 특히 미국의 힘이 막강하다는 점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정말 이런 추세가 계속된다면 우리말의 장래도 장담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유네스코 보고서에서도 말했듯이 언어는 인간의 사고와 지식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언어가 사라진다는 것은 그만큼 지식과 사고의 다양성이 줄어든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 지구촌의 언어가 몇 개로 통일된다고 생각하기만 해도 끔찍한 기분에 휩싸이게 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언어를 쓰는 사람이 다양하기 때문에 사고의 다양성이 완전히 사라진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여러 개의 언어가 존재할 때와 비교하면 그 다양성의 양과 질 모두에서 절대적인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번에 실제로 경험한바 미국 대통령의 깡패스러움도 미국 중심으로 돌아가는 힘의 향방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언어가 사라진다는 사실에 안타까움과 위기를 느끼는 것은 미국 중심의 세계화에 반대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참다운 세계화란 지구 전체적인 차원에서 세계를 구성하는 요소들이 저마다의 개성을 주장하면서 동시에 다른 개성들과 조화로운 관계를 이루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의 세계화는 이와는 정반대로 세계가 미국 중심으로 움직인다고 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다 아시다시피 지금 미국은 우리가 어렸을 때 전쟁영화를 보면서 했듯이 세계를 선과 악의 이분법을 나누어 놓고 자기와 생각이 다르면 무조건 악의 편이라고 위협해 대고 있습니다. 이런 도식에서 다양성은 아예 존재조차 할 수 없습니다. 요컨대 언어가 사라진다는 것은 그만큼 다양성이 줄어든다는 것이고, 나쁜 세계화로 나가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심각한 것입니다.
문학의 경우에 언어의 소멸은 더 심각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문학의 언어는 함축의 언어입니다. 어떤 말이 불러일으키는 주관적인 의미가 굉장히 중요하다는 얘깁니다. 문학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심상이라든가 상징, 비유 같은 것은 모두 함축적인 의미를 구체적으로 이용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언어의 종류가 줄어든다면 각각의 언어가 담고 있는 다양한 의미들 가운데 어떤 것이 없어지게 됩니다. 시의 어떤 구절이 우리를 끌어들인다면 거기에 우리의 경험을 떠올리게 하는 어떤 요소가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머니란 말이 강력한 울림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겪은 어머니의 존재가 중요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같은 어머니라고 해도 영어로 하는 어머니는 우리말이 주는 울림을 절대로 갖지 못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배웠느냐 하는 것은 시의 언어에서 절대적인 중요성을 가집니다. 좋은 시를 고르는 방법 가운데서 추천할 만한 것은 쉬운 말을 얼마나 잘 쓰고 있느냐를 살피는 것입니다. 쉬운 말이란 어려서 배운 것이고 따라서 그 말 속에는 우리의 온갖 경험이 녹아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소설을 쓰는 사람이 영어를 공용화하자는 것은 도대체 당치도 않은 발상입니다.
구조주의 언어 이론이란 게 있습니다. 언어에 의해서 세계가 만들어진다는 것이 그 골자 가운데 하나입니다. 쉽게 설명하면 눈이 있어 눈이라는 말이 만들어진 게 아니고 눈이라는 말이 있어 눈으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런 면이 있습니다. 풀 이름을 모르면 풀이 보이지 않거든요. 그런데 이런 설명에 따르면 어떤 언어를 잃어 버린다는 것은 그 언어에 의해서 만들어진 세계를 잃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무시무시한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말을 아껴야 합니다. 우리말이어서가 아니라 세계의 다양성을 유지하고 참다운 세계화를 실현하기 위해서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말로 쓸 수 있는 것을 거의 무의식적으로 영어로 쓴다거나 하는 일은 지금까지의 얘기를 따른다면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외국어에 대해 배타적인 태도를 취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사실은 다양성을 경험하기 위해서도 외국어를 열심히 공부하고 외국어로 된 책을 읽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그럴 경우에도 우리말이 가장 소중한 것이라는 전제에서 행해져야 합니다.
지구촌 언어의 절반이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는 말을 듣고 너무 놀라서 황급히 쓴 글입니다. 우리말을 아끼고 가꾸는 일을 의식적으로 실천할 때라는 점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훈이네 집으로 가는 길
전세계 6천여 가지 언어 가운데 절반이 멸종될 위기에 놓였다고 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유네스코)가 21일 밝혔다. 유네스코는 이날 제3회 `세계 모국어의 날'을 맞아 발표한 90쪽 분량의 `세계 멸종위기 언어지도' 보고서에서 “각국의 강압적 언어정책과 유력언어 사용의 확산으로 사라질 위기에 놓인 언어가 적어도 3천개에 이른다”며 “언어가 사라지면 그것을 통해 표현가능한 인간의 사고와 지식을 잃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전체 기사)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직 우리에게는 먼 곳의 얘기처럼 들리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고 생각합니다. 여러 말 할 것 없이 영어 열풍을 떠올리면 됩니다. 영어를 공용화하자고 주장하고 나서는 사람도 있습니다. 소설가인데 우리말을 다루는 사람이 그래서 우리를 더욱 어리둥절하게 만듭니다. 그래도 그럴 만해서 영어도 열심히 공부하고 더 나아가서 영어를 우리말처럼 쓰자는 것이겠지요.
왜 언어가 사라지는 것일까요? 한마디로 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의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전체 기사를 읽으면 그런 점이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우리의 경우 우리말을 쓰지 못하게 했던 일제의 식민지 시기를 생각하면 됩니다. 그러니 우리 사회에서 부는 영어 열풍은 영어를 쓰는 나라들 그 가운데서 특히 미국의 힘이 막강하다는 점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정말 이런 추세가 계속된다면 우리말의 장래도 장담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유네스코 보고서에서도 말했듯이 언어는 인간의 사고와 지식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언어가 사라진다는 것은 그만큼 지식과 사고의 다양성이 줄어든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 지구촌의 언어가 몇 개로 통일된다고 생각하기만 해도 끔찍한 기분에 휩싸이게 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언어를 쓰는 사람이 다양하기 때문에 사고의 다양성이 완전히 사라진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여러 개의 언어가 존재할 때와 비교하면 그 다양성의 양과 질 모두에서 절대적인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번에 실제로 경험한바 미국 대통령의 깡패스러움도 미국 중심으로 돌아가는 힘의 향방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언어가 사라진다는 사실에 안타까움과 위기를 느끼는 것은 미국 중심의 세계화에 반대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참다운 세계화란 지구 전체적인 차원에서 세계를 구성하는 요소들이 저마다의 개성을 주장하면서 동시에 다른 개성들과 조화로운 관계를 이루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의 세계화는 이와는 정반대로 세계가 미국 중심으로 움직인다고 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다 아시다시피 지금 미국은 우리가 어렸을 때 전쟁영화를 보면서 했듯이 세계를 선과 악의 이분법을 나누어 놓고 자기와 생각이 다르면 무조건 악의 편이라고 위협해 대고 있습니다. 이런 도식에서 다양성은 아예 존재조차 할 수 없습니다. 요컨대 언어가 사라진다는 것은 그만큼 다양성이 줄어든다는 것이고, 나쁜 세계화로 나가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심각한 것입니다.
문학의 경우에 언어의 소멸은 더 심각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문학의 언어는 함축의 언어입니다. 어떤 말이 불러일으키는 주관적인 의미가 굉장히 중요하다는 얘깁니다. 문학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심상이라든가 상징, 비유 같은 것은 모두 함축적인 의미를 구체적으로 이용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언어의 종류가 줄어든다면 각각의 언어가 담고 있는 다양한 의미들 가운데 어떤 것이 없어지게 됩니다. 시의 어떤 구절이 우리를 끌어들인다면 거기에 우리의 경험을 떠올리게 하는 어떤 요소가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머니란 말이 강력한 울림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겪은 어머니의 존재가 중요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같은 어머니라고 해도 영어로 하는 어머니는 우리말이 주는 울림을 절대로 갖지 못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배웠느냐 하는 것은 시의 언어에서 절대적인 중요성을 가집니다. 좋은 시를 고르는 방법 가운데서 추천할 만한 것은 쉬운 말을 얼마나 잘 쓰고 있느냐를 살피는 것입니다. 쉬운 말이란 어려서 배운 것이고 따라서 그 말 속에는 우리의 온갖 경험이 녹아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소설을 쓰는 사람이 영어를 공용화하자는 것은 도대체 당치도 않은 발상입니다.
구조주의 언어 이론이란 게 있습니다. 언어에 의해서 세계가 만들어진다는 것이 그 골자 가운데 하나입니다. 쉽게 설명하면 눈이 있어 눈이라는 말이 만들어진 게 아니고 눈이라는 말이 있어 눈으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런 면이 있습니다. 풀 이름을 모르면 풀이 보이지 않거든요. 그런데 이런 설명에 따르면 어떤 언어를 잃어 버린다는 것은 그 언어에 의해서 만들어진 세계를 잃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무시무시한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말을 아껴야 합니다. 우리말이어서가 아니라 세계의 다양성을 유지하고 참다운 세계화를 실현하기 위해서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말로 쓸 수 있는 것을 거의 무의식적으로 영어로 쓴다거나 하는 일은 지금까지의 얘기를 따른다면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외국어에 대해 배타적인 태도를 취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사실은 다양성을 경험하기 위해서도 외국어를 열심히 공부하고 외국어로 된 책을 읽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그럴 경우에도 우리말이 가장 소중한 것이라는 전제에서 행해져야 합니다.
지구촌 언어의 절반이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는 말을 듣고 너무 놀라서 황급히 쓴 글입니다. 우리말을 아끼고 가꾸는 일을 의식적으로 실천할 때라는 점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훈이네 집으로 가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