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 보면 참 이상한 일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아주 이상한 일인데 당연한 것처럼 여기는 일이 많습니다. 우리 목숨과 관계되는 것으로 사람이
차를 피하는 것을 그 예로 들 수 있습니다. 파란 신호가 엄연하게 켜 있을 때도 혹시 차가 안 오나 살피면서 길을 건너야 할 정도니 신호등이
없는 골목길 같은 데서는 말할 필요도 없이 차가 먼저인 것이 우리 현실입니다. 오기가 나서 차가 뒤에 있는 것을 알면서도 옆으로 가지 않고 짐짓
천천히 걷기도 해 보는데 그런 일이 목숨을 거는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꼭꼭 실천하기가 어렵습니다. 운전자는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에서는
여유를 가지고 보행자가 다 건너간 다음에야 지나가겠다는 생각을 해야 마땅합니다. 그리고 걸어가는 사람이 옆으로 비키지 않으면 가만히 기다려야
합니다. 사람보다 기계가 우선일 수는 없지요.
차 얘기를 하니까 고속도로에서 교통 사고를 겪은 일도 생각납니다. 대학교에 임용되어
학교에서 쓸 짐을 큰 트럭에 싣고 운전사와 함께 앞에 앉아서 고속도로를 달리던 때였습니다. 큰 트럭이라 앞이 멀리까지 잘 보였습니다. 그런데
앞에 가던 차의 트렁크 같은 것이 열리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바로 앞의 차가 아니라 몇 차 건넌 앞 차에서 일어난 것이라 그 당시에는 뭔가
갑자기 위로 솟아나온다는 느낌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운전사는 경험이 많은지 차를 멈추려고 했는데 빨리 달리던 참이라 바로 앞차에 부딪치며 그
차의 뒷 부분을 부수고서야 설 수 있었습니다. 조금의 과장도 없이 사고는 그야말로 눈 깜짝 할 사이에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내려서 봤더니 몇
중의 추돌 사고였습니다. 다행히도 다친 사람이 없어서 방송 같은 데서 나오지는 않았지만 큰일을 치를 뻔했습니다.
내가 하고자 하는
얘기는 차 사이의 거리를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주 당연한 일이라 말할 필요도 없어야 할 것 같은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
거리를 두지 않고 조금 빨리 가려다가 그야말로 일생을 단축시킬 수 있다는 점을 왜 모르는지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그런데 잘 아시다시피 차가
많이 다니는 길에서 혼자만 그 거리를 지키는 것이 도무지 불가능합니다. 중간에 끼어들기는 예사고 뒤에서는 빨리 가라고 바싹 좇아오니까요. 느리게
산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자동차를 탈 때만큼 심각하게 느낄 때도 드물 것 같습니다.
다음은 우리 정신에 관계되는 것이어서 위에서
얘기한 것만큼 중요할 수 있는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우리말 쓰기와 관련된 문제입니다. 과제를 내면 학생들이 겉장에 리포트라고 하고서 이름 등을
적고 나한테 가져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리포트'도 아니고 'REPORT'입니다. 나는 틈이 날 때마다 이 영어 글자를 가리키면서 무슨
말이냐고 묻습니다. 한국문학을 전공하거나 듣는 학생이 이렇게 무의식적으로 몸에 익은 것처럼 외국 말을 쓰는 게 내게는 아주 이상하게 보입니다.
외국어를 써야 될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말로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까지 그래서는 안 됩니다. 이와 비슷한 예로 쪽을 나타내는 'p'가
있습니다. 이것도 당연하게 초등학교에서부터 배운 대로 '쪽'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선생님들마저 'p'라고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도대체 어떤 생각으로 이렇게 우리말을 학대하는지 나로서는 놀라울 뿐입니다.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대로 쓰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요?
그런데 이렇게 몸에 밴 일은 고치기가 어렵습니다. 생각해서 하는 일들은 내 마음을 바꾸면 바로 고칠 수 있는데 깊이
따지지 않고 자연스럽게 하는 일은 마치 내 몸의 일부와 같아서 그렇습니다. 쉽게, 담배를 습관적으로 피우는 사람을 생각해 보면 됩니다. 처음
피울 때야 담배의 해독을 떠올리면서 그냥 참아 버리면 쉽게 끊을 수 있는데 인이 박히면 담배가 몸에 나쁜 줄 알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담배불을
붙이게 됩니다. 겪어 본 사람은 누구나 공감하는 평범한 얘기입니다.
위에서 예로 든 말을 쓰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은 지경에 와
있다고 생각합니다. 혹시 그 무의식을 파헤쳐 보면 우리 것을 낮추고 외국의 것을 우러러보는 그런 태도가 깃들어 있는 것은 아닐까요?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일을 뭘 그렇게 심각하게 해석하냐고 할지 모르지만 내게는 그렇게 보입니다. 내가 이상한 것일까요? 영어 단어의 철자를 잘못하면 큰
실수나 저지른 것같이 굽니다. 우리말 맞춤법이나 띄어쓰기를 그렇게 했을 때와 견주어 보기 바랍니다. 실제로 선생끼리 공부하면서 그런 것을
지적하면 이상하게 여기는 경우를 겪기도 했습니다. 다른 나라 말을 제대로 못하는 것은 당연할 뿐더러 그렇게 부끄러워 할 것도 없습니다. 좀
틀리면 어떻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거꾸로 생각합니다. 생각해 보면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말을 하는 김에 방송 같은 데 나와
외국어를 쓰는 사람에 대해서도 몇 마디 해야겠습니다. 방송은 대중 매체입니다. 누구나 다 본다는 뜻이지요. 그렇다면 당연히 방송에서는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말로 해야 합니다. 어떤 방면에 대한 전문가들끼리의 대담이라고 해도 그렇습니다. 그것을 보고 듣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어야 되니까요.
당연한 것이지만, 이런 말을 한다고 해서 외국어를 배우지 말자거나 전문적인 일일 경우에도 우리말만 써야 된다는
뜻이 아니라는 점을 밝혀 두겠습니다. 필요하면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말을 늘 의식적으로 대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아
두어야겠습니다.
보고서의 겉장에 대한 얘기에 하나 덧붙일 것이 있습니다. 앞에서 말한 대로 큼직한 글자로 'REPORT'라고 쓴
뒤에 보고서의 제목, 제출자의 이름 들을 적고 나면 하얀 종이 그대로입니다. 시퍼렇게 살아 있는 나무로 만든 종이를 이렇게 함부로 낭비하는 것은
벌받을 짓입니다. 그리고 큰 글자를 출력하느라 들어간 천연색 잉크도 여간 아까운 게 아닙니다. 쪽을 넘기는 데 힘도 들어가고 하니 여러 모로
겉장은 불필요합니다. 제목 아래 학번과 이름을 쓰고 바로 본문을 시작하면 되지요. 혹시 형식이 내용에 영향을 미치니 형식을 무시하기만 할 일도
아니라고 할지도 모르고 맞는 얘기기도 하지만 이 경우에는 아닙니다. 내용과는 조금도 관계가 없는, 좀 어려운 말로 하면 기계적인 형식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겉장을 보기 좋게 하는 것하고 본문의 내용을 잘 갖추는 일은 같이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이 이런
것뿐이겠습니까! 좀 냉소적으로 보면 인간이 하는 일 대부분이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일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아마
동물이라면 당연한 일만 할 거에요. 물론 몹쓸 인간의 개입이 없을 때의 일이지요.
이상한 일을 얘기하는 김에 톨스토이의 소설도 인용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들이 채찍질이나 그리스도교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나도 잘 이해할 수 있었으나, 다음과 같은 말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그때 나로서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기의 망아지라든가, 그의 망아지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중략)
예를 들어서 나를 자기의 말이라고 부르고 있던 많은 사람들은 내 위에 올라탄 적이 없으며, 전혀 다른 사람들이 내 등에 올라탔다. 나를 길러준 것도 역시 그들이 아니라 전혀 다른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나를 정답게 보살펴 준 것도 나를 자기의 말이라고 부른 사람들이 아니라 마부나 수의사들과 같은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후 점차 관찰의 범위가 넓어짐에 따라 우리 말들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나의 것이라는 개념이 사유의 감정 또는 소유권이라고 불리는 저열한 동물적인 본능 이외의 다른 어떤 근거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나는 확신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나의 집이라고 말하면서도 결코 거기에는 살지 않고 그저 가옥의 건축이나 유지에만 마음을 쓰고 있을 뿐이다. 예를 들어서 상인은 나의 가게니 나의 양복점이니 말하고 있지만 그 가게에 있는 고급 양복지로 만든 양복을 가져 본 적이 없는 것이다.
토지를 자기 것이라고 부르면서도 그것을 본 적도 없거니와 그것을 지나간 적도 없는 사람들이 있고, 남을 자기 것이라고 부르면서도 그 사람을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 사람들의 관계는 전자가 후자를 학대하는 데 있을 뿐이다.
여자들을 자기의 여자 또는 자기의 아내라고 부르면서도 그 여자들을 다른 사내들과 살게 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인간들이 인생에서
바라는 것은 그들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실행하는 것이 아니라 될수록 많은 것을 자기 것이라고 부르기 위해서다.
바로 이 점에 인간과 우리가 구별되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고 나는 지금 확신하고 있다. 따라서 그밖에도 존재하는 인간에 대한 우리의 우월성에 대한 것은 지금 말하지 않겠지만, 이 한 가지만 보아도 생물의 서열에서 우리 쪽이 인간보다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고 우리는 감히 말할 수가 있다. 적어도 내가 관계를 맺은 인간들의 활동은 말에 따라 움직여지고, 우리의 활동은 행위에 의해 움직여지는 것이다.](톨스토이, <홀스또메르>. 쉬클로프스키, <기법으로서의 예술>, 야콥슨 외, 조주관 옮김, <<러시아 현대비평이론>>, 민음사, 1993, 26-8쪽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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