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난 길

다시 봄 시 하나

귤밭1 2005. 1. 21. 07:48
먼저 시 한 편을 읊어 보도록 합시다. 천양희 시인의 '배밭을 지나다'입니다.


배 밭을 지나다

나무들 옷은 나뭇잎이야? 꽃들은 나무의 눈망울이야?
다 늦은 봄 한때 언덕길 오르며 아이가 묻는다
산비탈 아래 배꽃이 환하다
하늘 한쪽에서 햇살이 내려오고
아이는 자꾸 까르르 웃는다
여자는 배나무에 대해 생각한다
저 나무는 꽃을 피울 수 있어서 좋겠다
그러나 세상의 매혹은 짧고 환멸은 길다
아이는 또 뭐라뭐라 하고
나무는 온몸으로 꽃이 된다
저게 나무의 마음이야
그 여자 언제 열릴지 모를
배밭을 지나며 중얼거린다
꽃이 져도 배나무는
배의 나무인 것이야

한번 보면 시가 말하려는 바를 대강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쉬운 시입니다. 사실 삶의 지혜가 담긴 말은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다만 그것을 실천하기가 어려운 것이지요. 지혜가 주는 감동은 대체로 그 실천의 과정에서 겪었을 고통에서 오는 것입니다.

이 시는 다른 시와 달리 특이한 점을 갖고 있는데 그것은 마치 소설에서처럼 작중화자가 있다는 점입니다. 보통의 시에서는 '내'가 자신의 심경을 드러내는 데 비해 이 시에서는 작중화자가 어떤 여자와 아이가 배밭을 지나며 나누는 말과 생각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독자들은 작중화자의 처지에서 등장인물을 보고 있는 기분을 갖게 됩니다.

때는 늦은 봄입니다. 배꽃이 피었습니다. 아이는 그 배꽃을 보면서 아이다운 상상력을 발휘하여 여자에게 질문을 퍼붓고 마냥 즐거워서 웃음이 터뜨립니다. 하늘도 화답하듯 맑은 햇살을 내려 보내고 있고요. '아이는 자꾸 까르르 웃는다'까지 시의 분위기는 너무 즐겁고 행복합니다. 하늘과 땅, 인간과 자연이 한치의 불화없이 그대로 어울리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여자는 그런 모습이 부러운 거지요. '저 나무는 꽃을 피울 수 있어서 좋겠다'에서는 나즈막한 한숨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이런 구절을 보면 여자는 아이의 엄마는 아니고 이미 꽃을 피울 수 없게 된 처지에 있는 것임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러나'로 시작하는 다음 행에 이르러서는 분위기가 확 바뀝니다. 아름다운 삶의 절정은 한때의 일이라는 것이지요. 사실 그렇습니다. 꽃피는 좋은 시절이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아니잖아요. 꽃을 달지 않은 시간이 더 기니까요. 마찬가지로 젊은 시절도 곧 지나가 버립니다. 사실 젊은 날은 한바탕의 꿈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그 환상이 깨지는 것(환멸)은 모든 생명있는 것의 필연적인 절차인 셈이지요.

그렇다고 하여 환멸에만 빠질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이 시의 핵심은 바로 이 환멸에서 빠져 나오는 방법을 얘기하는 데 있습니다. 어떻게? 나무 자체를 꽃으로 보면 되지요. 또 더 나아가서 나무라는 육신을 나무의 마음에 일치시키는 거예요. 그렇다면 배나무에 배가 열리든 안 열리든 배나무는 언제나 꽃을 달고 있는 셈입니다. 여자는 앞에서 말한 대로 자신의 마음과 몸이 모두 꽃을 피울 수 없는 처지에 있었지만, 이제는 자신이 스스로 꽃이 된 것입니다.

어떤 젊은 사람이 그것은 마음의 조작이 아닌가고 반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환상이 아니냐고 말입니다.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우리 삶이 우리 마음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진실입니다. 그러니 우리 삶이 꽃이라고 여기면서 살아갈 만한 일입니다. 꽃이 아니라면 꽃이 되겠다는 마음을 갖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제 배꽃이 피는 시절이 돌아옵니다. 나주를 지나면서 배꽃의 매혹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 기다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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