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난 길

화창한 봄날에 읽는 정현종의 시 세 편

귤밭1 2009. 4. 28. 19:10

우리 한국의 시인들 가운데 언어의 마술사 하면 나는 가장 먼저 정현종 시인을 떠올린다. 말을 부리는 재미를 싱싱하게 몸으로 느끼게 해 주는 시인이다. 화창해서 어디로 나가지 않으면 못 견디게 만드는 이 아름다운 봄날에, 사정이 있어서 나들이 못하는 이들을 위하여 세 편의 시를 읽어 드리겠다. 여기에서도 말장난 또는 말놀이 실력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어떤 데서 그런지 생각해 보자.

 

봄에

진달래꽃 불길에

나도

탄다.

그 불길에 나는 아주

재가

된다.

트는 싹에서는

간질 기운이 밀려오고

벚꽃 아래서는 가령

탈진해도 좋다.

숨막히게 피는 꽃들아 새싹들아

너희 폭력 아래서는 가령

무슨 일을 해도 괜찮다! (<<정현종 시전집 2>>, 문학과지성사, 1999, 41쪽)

쉽다. 자연의 아름다운 기운에 마음의 문을 완전히 열고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태도-오히려 '전적인 수동성'이라고 해야 사태의 진상에 더 어울릴지 모르겠다-가 잘 드러나고 있다.

 

잘 나가다 '간질'과 '폭력'에 이르면 멈칫거리게 된다. 조금만 생각하면 첫 번째의 '간질'이 그리 이상할 것은 없다. 새싹이 '날' '간질'여서-'간질'에서 '간질이다'를 연상하는 것을 엉뚱하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새싹, 또는 범위를 넓혀서 모든 어린 새끼들의 귀엽게 꿈틀거리는 생명력이 내 살갗을 간지럽힐 것만 같다고 하면 수긍이 안 가는 것도 아니다- 간질, 즉 경련을 일으키고 발작하는 증상을 드러내게 하는 것이다. 지나치게 호들갑을 떠는 반응이라는 느낌이 없지는 않지만 진달래꽃 불길에 타고 벚꽃 아래서 탈진하며 꽃이 숨막히게 하는 것과 연결하면 그렇게 유난스러운 것은 아니다.

 

여기서 나는 성적인 이미지도 즐기고 싶다. '싹'은 진달래꽃 불길-이 말 자체가 성적인 내포를 강하게 지니고 있다!-에 '내'가 탄 재에서 '트는' 것으로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싹은 주체인 '나'와 식물의 결합체인 셈이다. 이렇게 되면 간질 기운의 의미는 좀 달라진다. 이 부분만 아니라 사실은 시 전체가 물아일체의 관능적 즐거움을 노래하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제 '폭력'을 볼 차례이다. 이 말은 사전에 "남을 거칠고 사납게 제압할 때에 쓰는, 주먹이나 발 또는 몽둥이 따위의 수단이나 힘. 넓은 뜻으로는 무기로 억누르는 힘을 이르기도 한다."고 정의되어 있다. 제대로 된 이라면 이 폭력을 무서워하고 싫어할 것이다. 그런데 이 시에서 '나'는 꽃과 새싹들의 폭력이라면 무슨 일을 해도 좋다거나 괜찮다고 하고 있다. 앞에서 전적인 수동성이라는 말을 했는데 '내'가 아무런 저항 없이 진달래꽃 불길에 타고 벚꽃 아래서 탈진한다고 했으니 사실 꽃과 새싹들이 폭력을 쓴 셈이다. 폭력이란 말을 낯설게 하여 자연이 인간에게 선사하는 기쁨과 행복을 새롭게 보도록 하고 있다.

 

즐거운 자연 찬가다. 나도 나무와 풀의 폭력에 내 몸을 다 맡기고 싶다. 나무야, 네 향기와 색깔에 취하여 쓰러지게 날 때려 주렴.

 

여행을 기리는 노래

벌써 오르지 않어?

이 다람쥐 쳇바퀴

이 죽어가는 되풀이를

끊으면서,

다른 시간이 열리면서,

무지개가 걸리면서,

거기가 낡은 시간의 새 데이트 아냐?

장차 갈 길들에서 피어날

고달픈 신명들의 원천 아니야?

메인 데 없어,

오 바람이 일어, 오

가슴은 지평선 부풀어.....

말하자면 우리를 뛰쳐나온

망아지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지평선을 풀 뜯다가

결국 날개가 돋아 날아가는

그런 오르가즘...... (위의 책, 174쪽)

어젯밤에 이 시에 대해서 내 생각을 썼는데 뭐가 잘못됐는지 다 날아가 버렸다. 시가 좋아서 다시 써 시 읽기의 지극한 즐거움을 우리 집 식구와 나누려고 한다. 그런데 어제 내 글의 마지막 부분에서 나는 다음과 같이 썼다. 중간고사에서 이 시를 분석하라는 문제를 냈는데 우리 학생들이 어떤 말을 할지 몹시 궁금하다면서 특히 첫 행과 마지막 행의 연관성을 읽어 내는지 알고 싶다고 했다. 이 시의 핵심과 묘미는 바로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감격스러워라! 내가 생각한 것을 베껴놓은 듯한 답안지가 한 장 나왔다. 참고로, 시험 보기 전에 이 시를 문제로 낸다고 알려 주지 않았다. 시험 전에 '훈이네 집'에 이 시를 소개하기는 했는데 그것을 이 학생이 읽었는지는 모르겠다. 내 독후감은 다음에 적기로 하고 자랑스러운 우리 학생(국어국문학과 장명숙)의 답안지를 옮기겠다. 짧은 시간에 쓴 것이라 비문이 많이 섞이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억지 주장도 보이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아주 훌륭한 분석이라고 생각한다.

<여행을 기리는 노래>라는 제목으로 한 연에 모든 내용을 담은 이 시는 여행이 주는 이미지와 맞물려 자유를 추구하는 화자의 태도가 나타난다. 이 화자는 자유가 주는 쾌락이 마치 성적으로 느껴지는 쾌락과 같은 것으로 나타내고 있다. 첫 행의 '벌써 오르지 않어?'와 이 행에 대한 답이라 할 수 있는 마지막 행의 '그런 오르가즘'은 단어 자체에 성과 관련된 이미지를 담아낸다. 연과 연을 구분짓지 않는 모습에서 틀에 박히지 않음을 나타내고, 쉼표로 이어지는 짧은 행들의 연속은 독자로 하여금 빠른 긴장감과 기대를 선사한다. 마치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인생을 사는 독자는, 내 길이 틀린 거구나 하고 후회하게 할 만큼 화자는 강한 확신으로 자유에 대한 열망을 독자에게 피력한다. 특히나 개인의 생각이 아니라, 독자와 공유라도 하려는 듯이 계속해서 해대는 질문으로, 독자의 마음은 벌써 자유를 갈망케 한다. 그러면서 화자는 역설을 사용한다. '낡은 시간의 새 데이트' '고달픈 신명들' 등으로 표현된 시구는 고달프면서도 신명을 원하고, 낡은 시간 속에서 새로운 것을 갈망하는 독자의 정곡을 찌른다. 또한 우리 안에 있는 것은 아직 성숙되지 않은 '망아지'라고 표현한다. 답답한 굴레에서 성숙되지 못한 우리 자신을 망아지에 빗대어 세상 현실에 이리저리 부딪히다가 결국, 자유로이 날개 달린 백마가 되는 걸 상상한다. 이러한 오르가즘은 마침내는 성적인 쾌락이 주는 오르가즘을 뛰어넘는 더 짜릿한 순간이 될 것임을 화자는 보여주고 있다.

 

우리 삶이 힘들어도 끊임없는 자유와 희망의 갈구가 있다면 결국 그 꿈은 이루리라는 긍정적 결말을 내려주는 시이다. 또한 15행과, 마지막 행에 드러나는 말줄임표의 사용은 독자의 상상력과 그러한 자유 추구가 얼마나 아름답고 기쁜 것인지 스스로 생각하게 해 주고 그 상황을 상상할 수 있게 해준다. 바쁜 생활속에서 일말의 여유를 가져 보라고 권유해 주는 시이다.

 

목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장명숙

어떤가? 참 즐거운 봄날 아침이다! 이럴 때 선생은 가르치는 보람을 느낀다.

 

**************************

 

이제 내 독후감을 얘기하자. 앞서 말한 대로 이 시의 핵심은 첫 행과 마지막 행의 연관을 읽으면 거의 다 풀린다. 첫 행을 산문적으로 풀이하면 '여행을 생각만 해도 몸과 몸이 달아오르지 않어?" 정도가 되겠다. 여행은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몸이 뜨거워지고 그 결과로 가벼워져서 높은 데로 올라갈 것만 같은 것이다. 예상하건대, 여기에다 바람이 불고 하면 날개가 돋아 하늘을 나는 것은 시간 문제이다. 아닌 게 아니라 마지막 바로 앞 줄과 마지막 줄에 이르러서는 "날개가 돋아 날아가는/ 그런 오르가즘'을 맛보며 하늘로 비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는 위로 오르기 시작하여 꼭대기나 또는 하늘에 이르는 과정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또 하나 놓쳐서는 안 될 것은 동음이의어를 이용한 말장난(펀, pun)의 묘미다. 첫 행의 '오르'다와 마지막 행의 '오르가즘'에서 '오르'라는 동음을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언어의 마술사라고 하여 지나치지 않다. 정말이지 시(詩)는 언어(言)의 절(寺院)이고 따라서 시인은 말을 하느님이나 부처님으로 모시는 사제이다.

 

이 시에서 두 번째로 주목할 것은 동사나 이 품사 비슷한 역할을 하는 말들의 뜻이다. 이 뜻을 유형화하는 것 자체가 여행의 오르가즘에 이르는 과정이 된다. 먼저 이 말들을 직접 다 들어 보자. 오르다, 끊다, 열리다, (하늘에 무지개가) 걸리다, 피어나다, 매인 데 없다, 일다, 부풀다, 뛰쳐나오다, 뛰다, 날아가다 . 주로 동사니까 움직임을 나타내는 것은 당연한데 이런 것이야말로 여기저기로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여행의 이미지와 딱 들어맞는다. 언어의 배열, 다시 말하면 형식 자체가 내용을 멋지게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 움직임에는 어떤 지향성이 있다. 현재나 이곳의 경계를 넘어선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우리를 죽이는 일상의 우리(구속)를 벗어나면('끊으면'이거나 "뛰쳐나오면') 새로운 세계가 '열리고' 낡은 시간도 '새롭게'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초월의 의미망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 초월은 구체적으로 비상의 이미지와 바로 이어진다. 이미 얘기한 대로 위로 '오르고' ''날개가 돋아 날아가는' '오르가즘'에 이르는 것이다.

 

이제 시를 다 음미한 셈이다. 세세한 내용은 내가 제시한 뼈대에 맞추어 읽으면 되므로 생략하기로 하고 두 가지만 간단히 언급하고 마치기로 하자. 첫째는 '우리를 뛰쳐나온 망아지가/ 이리 뛰고 저리 뛰며/'에 대해서다. 망아지나 송아지는 물론이고 어린 새끼들은 위와 다 비슷할 것이다. 얼마 전에 기르게 된 우리 집의 토끼-이름이 끼토인데 왜 이렇게 지었을까요? 철학 책을 읽은 어떤 수준이 높은 사람은 데카르트의 '코기토 에르고 숨'(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에서 '끼토'란 말을 가져온 거 아니냐고 아는 척해서 비웃은 적이 있다-도 그렇다. 방바닥에 부드러운 이불 같은 것이 있으면 동요 그대로 깡총깡총 어디로 튈지 예측하지 못하게 신나서 뛰어다닌다. 그러면 보는 사람은 자지러지지 않고는 못 배긴다. 여행의 정수가 이런 것 아닌가! 일상의 쳇바퀴를 벗어나서 멋대로 돌아다녀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망아지를 끌어온 것은 참으로 그럴듯하다.

 

그 다음은 '고달픈 신명'이다. 왜 신명을 고달프다고 했을까? 참고로, 시인은 '고통의 축제'라는 모순어법의 제목을 단 시집을 내기도 했을 정도로 이런 어법을 즐긴다. 얼른 보기에 말이 안 되는 구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내 경험을 얘기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하루 종일 걸으면 너무 지쳐서 어디에 앉으면 일어나기가 싫다. 그래도 걷는 즐거움을 놓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고 실제로 다음날이 되면 다 잊고 다시 걷게 된다. 이런 걸 두고 고달픈 신명이라고 하지 않을까. 진짜 여행을 즐기려면 몸이 지치게 많이 돌아다녀야 한다!

 

***********************

 

수요일(2009. 4. 29)부터 금요일까지 우리 학과 학생들과 제주도를 답사한다. 나는 거기 그대로 남아서 다음 주 수요일까지 제주 올레를 걸으려고 한다. 나도 저 오르가즘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물방울-말

나무에서 물방울이

내 얼굴에 떨어졌다

나무가 말을 거는 것이다

나는 미소로 대답하며 지나간다

 

말을 거는 것들을

수없이 지나쳤지만

물방울-말은 처음이다

내 미소-물방울도 처음이다 (위의 책, 196쪽)

나는 이 시를 음미하고서야 '방울'이나 '망울'이 둥글다는 것을 깨달았다. 둥글므로 이리저리 잘 굴러다닌다. 따라서 물방울을 소통의 수단인 말이라고 한 것은 참 멋진 착상이다.

 

'물방울-말'은 물론 물방울로 된 말일 테지만 내 눈에는 이 말이 자꾸 '물방울'이란 마차를 끄는 말로 보인다. 잘 굴러가는 ㄹ음을 앞뒤로 거느리고 있어서 가운데의 ㅇ이 마치 바퀴처럼 보이는 것이다. 내게만 이러지 말았으면 좋겠다. 아무튼 나는 말(言)장난인지 말(馬)장난인지 구분이 안 되는 즐거운 혼돈상태에 빠져 든다.

 

'미소-물방울'은 초등학교 산수이므로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겠지. 물방울이 말이고 그 말에 미소로 대답했으므로 미소도 물방울이다.

 

****************

 

시를 읽는 데는 정답이 없다는 것을 얘기하고 싶었다. 그리고 말을 갖고 노는 재미를 느끼게 해 주고 싶었다. 내 생각대로 됐는지는 여러분의 판단에 맡기겠다. 나는 이 시들을 읽으면서 모처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독후감을 쓰면서도 그랬다. 행복하다.

 

훈이네 집으로 가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