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난 길

정해진 길

귤밭1 2009. 5. 9. 08:49

‘안여돼’를 아십니까. 안경+여드름+돼지. 오타쿠 이미지를 비꼴 때 종종 등장하는 용어지요. ‘안여돼’로 오해받을 위험을 불사하고 ‘덕후왕 선발대회’에 응모한 독자 여러분의 헌신과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심사하면서 배꼽 잡았습니다. 좋아하는 공연을 보기 위해 밤새우고 줄을 서다 발작 일으킨 사연, 항공 잡지 과월호를 사기 위해 영등포, 청량리, 용산 같은 ‘야리꾸리한’ 동네를 뒤지다가 친구들한테 변태로 찍히고 집에서 몽둥이찜질 당한 사연, 영어 단어 시험을 치는데 중세 아일랜드 글꼴로 답을 써냈다가 0점을 받은 사연, ‘뮤덕후’(뮤지컬 덕후)로 살며 돈 아끼고 시간 아끼느라 건강 버린 사연 등. 웃다가, 그만, 감동 먹었습니다.

100호 특집 대면 상담에서 임경선씨가 말한 대로(여기 보세요) 21세기 한국 사회는 “매뉴얼”의 사회입니다. 어떤 학교를 가야 하고, 어떤 직업을 가져야 하고, 어떤 배우자를 만나야 하고, 어떻게 노는 게 멋있는지까지 단답형 정답이 나와 있습니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해야 할까요?’ 쏟아지는 고민 메일들은 매뉴얼 사회의 한 풍경입니다.

오타쿠는 사회가 던져놓은 매뉴얼을 뒤적거리지 않는 사람들이죠. 자기가 좋아하는 거 챙기느라 유행하는 거, 남들이 좋다는 거, 찾아다닐 시간도 돈도 없습니다. 어느 편이 더 행복할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10년 뒤 인기 직업을 지금 알 수 없듯이 매뉴얼은 수시로 바뀝니다. 따라가느라 꽁지 빠지게 허덕이다 보면 ‘그 산이 아니라 저 산이야’ 메아리가 돌아오기도 하죠.

결국 이기는 건 매뉴얼에 말리지 않는 삶입니다. 유행이 바뀌고, 기준이 바뀌어도 즐거울 수 있다면 그게 남는 장사니까요. 딱딱하고 진지한 신문 매뉴얼에 딴죽 걸고 킥킥거렸던 〈esc〉가 100번이나 나왔습니다. 100호는 더 즐겁자고, 재미있자고 만들었습니다. 재미없다, 싱겁다 느끼시는 분, 버럭 화내주십시오. 점점 더 견적 안 나오게 우울해지는 세상, 보란 듯이 즐거워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김은형 〈esc〉 팀장 dmsgud@hani.co.kr (기사 원문)

1등 수상작은 여기를 보라. 나는 기차에서 이 기사를 읽었는데 하도 킥킥거려서 주위 분들에게 좀 미안했더랬다. 아무쪼록 하고 싶은 일에 몰두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제주 올레 길을 걸으면서 생각한 게 있다. 두 길이 엇갈리는 곳에서는 올레 길을 잃지 않도록 화살표가 잘 표시되어 있어서 따라가는 데 큰 문제가 없다. 그런데 거꾸로 되짚어 갈 때는 다른 길로 샐 수도 있다. 머릿속에 삼거리를 그려보자. 원래 순서대로 걸으면 그냥 화살표만 따라가면 되지만 거꾸로 걷는 사람은 두 길 가운데 어느 것을 골라야 할지 모를 때도 생긴다. 두 곳 가운데 가야 할 길 쪽에 바로 화살표-물론 걸어가는 방향과 반대로 표시된-가 있으면 어느 길인지 얼른 알 수 있지만 화살표가 멀리에 있으면 그곳을 지나야만 잘 들어섰는지 알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올레 길이 아닌 길을 한참이나 걷다가 되돌아오게 되는 경우도 생긴다. 그래서 길을 잘못 들고 나면 좀 제대로 길을 안내하지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일이 여러 번 일어나면 여유가 생겨서 원래의 길이 아닌 길도 즐기자는 쪽으로 생각이 바뀐다. 다 걸을 수 있는 길인데 굳이 올레 길만 걸을 필요는 없는 거 아닌가. 그러면 마음이 가벼워지면서 정해진 길을 벗어나는 자유의 기쁨까지도 덤으로 얻을 수 있다. 그런 마음으로 걷다 보면 어느새 올레 길을 다시 만나게 된다.

우리 사회는 삶에 대해 고정된 답을 갖고 있다. 아이가 공부 잘하면 어디 가야 된다는 정답이 있고 당사자도 주위 사람들도 그 답을 별로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사람마다 다른데 이럴 때는 사람이 기계가 되어 버린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 아이들은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정해진 시간표에 따라 기계처럼 돌아가고 있다. 이렇게 평소에 충분히 연습해 놓았으니 정해진 대로 사는 게 이상할 리가 없다.

정답의 종류가 아주 많거나 아예 없는 그런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열등감 같은 것 느끼지 않고 저마다 다른 길을 즐겁게 걸을 수 있을 것이다.

 

 

훈이네 집으로 가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