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난 길

나희덕의 시 <빚은 빛이다> 읽기

귤밭1 2009. 6. 12. 16:45
'현대문학이론"이란 과목의 기말고사에 나희덕의 시를 분석해 보라는 문제를 냈다. 학생들이 쓴 답안지를 소개한다. 다른 학생들에 비해서 잘 썼다고 생각해서 고른 것이다. 먼저 시를 읽고 나서 학생들의 얘기를 들어 보기로 하자. 마지막에 학생들의 글을 읽은 내 소감도 간단히 이야기하고자 한다.

빚은 빛이다(나희덕)
아무도 따가지 않은
꽃사과야,
너도 나처럼 빚 갚으며 살고 있구나.
햇살과 바람에 붉은 살 도로 내주며
겨우내 매달려 시들어가는구나.

월급 타서 빚 갚고
퇴직금 타서 빚 갚고
그러고도 빚이 남아 있다는 게
오늘은 웬일인지 마음 놓인다

빚도 오래 두고 갚다보면
빛이 된다는 걸
우리가 조금이라도 가벼워질 수 있는 건
빚이 남아 있기 때문이라는 걸
너는 알겠지.
사과가 되지 못한 꽃사과야.

그러고도 못다 갚으면
제 마른 육신을 남겨두고 가면 되지.
저기 좀 봐, 꽃사과야.
하늘에 빚진 새가 날아가고 있지.
언덕에 빚진 눈이
조금씩 조금씩 녹아가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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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연에서는 화자가 자신이 겪고 있는 상황이 마치 꽃사과도 겪고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 2연에서 '월급 타서 빚 갚고/ 퇴직금 타서 빚 갚고'에서 유추해 볼 때 빚을 갚기 위해 직자생활을 하다 결국 퇴직까지 하게 됨을 알 수 있다.

3연에서는 아이러니가 드러나 있다. '빚도 오래 두고 갚다보면/ 빛이 된다는 걸' '사과가 되지 못한 꽃사과야' 부분에서 알 수 있다. 보통 빚을 못 갚다는 상황은 힘듦, 좌절, 고통을 떠올리게 하는데 '빛이 된다' 함으로써 빛이 가진 성질, 희망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1연에서 언급되었던 '햇살과 바람에 붉은 살 도로 내주'어서 '사과가 되지 못한 꽃사과' 이야기를 하고 있다. 사과가 되지 못해서 가지치가 없어 보이지만 사과라는 단어 앞에 꽃이라는 말이 붙어서 오히려 아름답게 느껴진다.

4연에서는 빚에 대한 압박으로부터 벗어난 자유로움이 느껴진다. 빚을 못다 갚으면 육신을 남겨두고 가면 된다는 초월적인 마음, 또 하늘에 빚졌지만 하늘을 자유롭게 날 수 있는 새의 모습에서도 자유로움을 볼 수 있다. (국문학과 정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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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주인공은 꽃사과와 빛이다. 1연에서 화자는 사과가 되지 못한 채 누구의 손길도 닿은 적 없는 꽃사과에게 빚을 갚으며 산다고 말한다. 꽃사과가 되기까지 수많은 햇살과 바람을 맞으며 받은 빚을 도로 매달려 갚으면서 겨우내 시들어 가고 있다.

2연에서는 화자의 모습이 투영되어 일반 현대인들처럼 빚을 갚는다는 내용이 나와 있는데 말미에 빚이 남아 있다는 것이 마음이 놓인다는 역설적 발상을 통해 궁금증을 유발하고 있다. 그리고 놀라울 만한 반전을 보이는 것은 바로 3연이다. 빚고 빛이라는 동음어를 통해 인생의 진리를 말하고 있다. 빚도 오래 갚다 보면 빛이 된다. 왜냐하면 앞서 말한 꽃사과에서의 예처럼 받은 만큼 돌려주는 행동을 통해 내가 가벼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갚지 못한 것은 마른 육신이 디어 그대로 되돌려줌으로써 남겨든 둔다는 말을 하고 있다. 화자는 말미에 하늘에 빚진 새가 날아간다, 빚진 눈이 녹아간다고 말하면서 종결하고 있다. 앞서 빛이 된다는 사실을 언급했던바 '~고 있어'라는 현재형 어미를 통해 그 행위가 지속이 될 것임을 그렇기 때문에 오래 두고 갚다 보면 빛이 되는 것처럼 그 빚 또한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부정적 이미지와 연결하는 빚을 빛에 연관시키며 이토록 밝고 따뜻하게 풀어낸 시는 처음이다. 빚이 빛이 될 수도 있음을 넌지시 알려 주며 밝은 이미지로 종결하는 시인의 '대자연적 대모'의 면모가 가슴속 깊이 들어와 박힌다. 또한 '사과가 되지 못한'이라는 구절에서 보듯이 인생에서 그리 성공하지 못한 아니 실제적으로 실패한 꽃사과에게 빛이라는 희망적 이미지를 불어넣어줌으로써 왕성한 생명력을 불어넣어주는 행위가 인상적이다. (국문학과 이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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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세상을 세상을 살아가는 데 어느 한 부분도 독립적으로 살 수 없다는 것을 뜻하는 것 같다. 사람이 태어나는 것도 부모에게 빚져서 태어나는 것이고 세상을 살아가는 것조차도 숨을 쉬는 것 또한 자연에게 빚지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갈아가며 빚지고 죽어가며 다시 자연에 갚은 것처럼 빚지는 것이 바로 빛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나에게 빚이 있다는 것은 세상을 좀더 살아갈 수 있는 하나의 원동력(빛)이 되는 것 같다.

이 시에서는 아직은 사과가 되지 못한 꽃사과라는 소재를 드러내 표현하고 있다. 이 꽃사과 또한 자연의 도움을 받아 그 전성기를 다하여야만 사과라는 빛을 볼 수 있고, 이 빛이 다시 자연에게 되갚은 빚이 된다.

'그러고도 못 갚으면 제 마른 육신을 남겨 두고 가면 되지'라는 시구에서는 무거운 빚과 죽음의 무게를 가볍게 표현한 것 같다. (국문학과 정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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펀(pun)을 통한 재밌는 기법으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 있는 시이다.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빚'이라는 존재는 부정적인 것이다. 누가 빚져 있는 상태를 기분좋게 여길까? 그런데 화자는 빚을 부정적 개념으로 형상화하지 않고 그와는 정반대인 빛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그러면서 빚이 남아 있으므로 가벼워질 수 있다고 고백한다. 과연 빚이 남은 상태에서 가벼워질 수 있을까? 남아 있는 빚을 모두 청산해야 홀가분하고 기쁘지 않을까?

그런데 화자는 꽃사과라는 존재를 통하여 이러한 일반적인 시각을 뒤엎는다. 사과가 채 되지 못하고 가지에 달려 있으면서 자신을 만들어 준 햇살과 바람에 빚 갚고 있는 꽃사과를 통해 빚 갚는 것이 어쩌면 마음이 놓이는 일이라고도 표현한다. 그러면서 화자는 시선을 자연으로 돌려본다. 하늘에 빚진 새가 날고 언덕에 빚진 눈이 녹고 이렇듯 세상은 빚을 갚으면서 빛나고 있음을 감지한다. 그러면서 자신 스스로도 빚을 갚으면서 가벼워질 수 있는 존재가 된다고 이야기한다. 마른 육신까지 남겨 두고 가서 빚을 갚는다는 참신한 발상. 마른 육신이 어떻게 빚을 갚을 가치가 있겠느냐마는 이러한 생각 속에 빚이 무겁고 둔탁한 존재가 아니라 빛과 같이 맑고 긍정적인 존재가 될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참신한 발상과 기법으로 부정적 요소를 긍정적이게 생각해 볼 수 있게 하는 멋진 시였다. (국문학과 장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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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안지를 읽은 소감을 덧붙이는 것이 출제자의 의무일 것이다. 시에 대한 독후감은 따로 올리기로 하고 학생들의 답안지에 나타난 문제점을 간단히 지적하고자 한다.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다른 문제들도 있는데 짧은 시간에 이만큼 썼다는 것은 대단하다는 점을 이야기해 둬야겠다. 사실, 출제자인 내가 문학교육을 오도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오래 시간을 두고 낱말 하나하나에 주목해야 시를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텐데 이렇게 빨리 써 내라고 하는 것은 시나 시인에 대한 제대로 된 대접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험은 잠재적인 능력을 보는 것이고 시험을 마치고서도 시에 대한 감상이 이어지면 되는 것이 아니냐는 말로 내 궁색한 처지를 벗어나기로 하자. 여기에서 학생들의 답안지를 소개하고 이렇게 내가 뭐라고 하는 것도 문학교육의 차원에서 이뤄지는 것이라는 점도 변명으로 내세우고 싶다.

이제 문제점을 지적할 차례다. 먼저, 우리 학생들이 막연하게 생각을 이끌어간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다. 빚이 빛이 된다는 것을 알아듣게 설명한 글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시에 그렇게 나와 있으니까 그러려니 하고 따르고 있을 뿐이다. 반어가 드러난다든지 부정적인 이미지가 긍정적인 것으로 바뀌었다든지 하는 것을 말하는 것도 좋지만 어째서 그런지를 차분하게 설명해 주지 않으면 그냥 상식적인 발언이 되고 만다. 왜 이런 일이 생길까? 낱말 하나하나를 꼼꼼하게 들여다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말을 따지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기도 하다. 물론 위에서 말한 대로 시간이 충분하지 않은 것도 한몫했을 테다.

둘째로 좋은 시가 갖고 있는 유기적인 전체성을 무시하거나 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드러난다. 우리 학생들은 연을 순서대로 따라가면서 그 내용을 설명하든지 누구의 눈에도 보일 연관성을 지적하는 데 그치고 있을 뿐이다. 이런 데서 좀 벗어나서, 예를 들어, 1연의 '살 도로 내주며' 2연의 '빚 갚고' 3연의 '가벼워질' 4연의 '마른' '(눈이) 녹아가고' 등은 모두 자기의 무게-욕망이라고 해도 좋다-를 줄이는 뜻을 갖고 있는 계열체를 이룬다는 점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이런 것이 합하여진 결과가 가볍고 자유롭게 하늘을 나는 새-다 내 주고 정수라고 할 만한 것만 지닌, 비쩍 마른 채 가지에 매달려 있는 꽃사과라고 해도 좋다-라는 점도 읽을 수 있다. 이런 연관성에 착안하면 왜 빚이 빛이 되는지도 밝혀 낼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시의 주제를 보편화시키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그냥 빚이 빛이 된다고만 하지 말고 범위를 넓혀서 이런 깨달음이 우리 삶과 이 세상에 어떤 의미를 갖고 있을까를 생각해 보자는 뜻이다. 이 시는 궁극적으로 세상의 모든 존재는 서로 관계를 맺고 있으며 그럴 때만 빛이 난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있다. 세부적인 논의가 몹시 성긴 정우리의 답안지를 소개한 것은 이 시가 주는 깨달음을 확대하여 해석한 점을 높이 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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