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난 길
멋진 판사님
귤밭1
2009. 7. 22. 10:44
오늘(2009. 7. 8.) <<한겨레>>에 난 기사다.
이 기사를 읽으면서 '벌'에 대해서 생각해 봤다. 왜 벌을 줄까? 나는 학생이 결석하면 꼭 왜 그런지를 물어 본다. 성적을 매기면서도 결석을 많이 한 학생은 그 벌로 점수를 많이 깎는다. 시험을 못 보거나 숙제를 못하거나 한 학생보다 훨씬 엄격하게 군다. 열심히 했는데도 시험을 잘 보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지만 출석은 오직 성의만 있으면 다 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성의만 갖추면 사회에 나가서 자기 앞가림 정도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출석을 중히 여긴다. 그런데 내 벌이 효과가 있는지는 자신할 수 없다. 아니, 그리 큰 효험을 보지 못할 것이다. 벌을 주는 것만으로는 안 되고 같이 밥을 먹으면서 얘기도 나누고 격려도 하는 노력이 곁들여져야 조금이나마 마음이 돌아설지 모르겠다.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왜 감옥에 가둘까? 여러 이유를 들 수 있다. 저지른 죄의 대가를 치른다거나 그냥 두면 사회에 해롭기 때문에 격리시킨다거나 하는 뜻이 있을 것이다. 잠재적인 범죄자에게 경고하고 범죄를 예방하는 의미도 있을 테고. 좀 거창하게 말하면, 폭력으로 체제에 순종하는 인간을 만들려고 하는 의도가 작용한다는 주장도 나올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감옥은 학교나 종교와 같은 측면을 지니고 있다. 다른 것은 체제를 잘 돌아가게 만드는 데 구성원을 동원하는 방식이 강제냐 자발적인 동의냐 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우리가 말하는 주체(subject)라는 것은 실상 체제에 종속된(subjected)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말을 잘 듣는 온순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허망하지만 이게 우리 삶의 진정한 모습인지 모른다.
그렇다면 죄인을 감옥에 가두는 것은 죄의 대가를 치르게 하면서 아울러 사회에 쓸모있는 존재로 바꾸기 위해서이기도 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런데 앞에서 말했듯이 사람을 바꾸기는 쉽지 않다. 감옥에 가둔다고 되는 일도 아니다. 저 피고인이 잘 보여 주듯이 여러 차례 감옥을 제 집 드나들 듯이 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오히려 우리 사회는 감옥에 가서 더 나빠지고 복수심을 키울 가능성이 높다고 해야 현실적인 진단일지도 모른다. 유전무죄라는 말도 이런 분위기에서 나온 말일 테다. 수사기관이 정당성을 지니는 일도 따라서 무척 중요하다. 죄인이 감옥에 갇히는 것을 수긍하는 데서 개심이 시작될 수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 반성해야 변할 수 있다.
저 판사에게서 그런 희망의 싹을 보는 것 같아서 흐뭇하다. 남의 물건을 훔치게 되는 사정을 보지 않은 채 법전에 나온 대로 벌을 주고 감옥에 가둔다고 해서 문제가 풀리는 것은 아니다. 저 판사의 멋진 판결처럼 심리적인 처방도 필요하고 해를 끼쳤으니 거꾸로 봉사를 해 보라고 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더 나아가서 다른 부서와 힘을 합쳐 생계를 꾸리는 데 도움을 주는 방법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이렇게 사회 전체적으로 접근해야 벌의 의미를 제대로 구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노력이 제도적인 차원에서 이뤄져야 한다.
멋진 판사가 또 한 분 있다. 소개한다.
상처받은 영혼, 시로 달랜 법정먼저, 고정희의 시 전문은 다음과 같다.
대전지법 판사, ‘12만원 생계형 절도’ 30대 여성 위로해줘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뿌리 깊으면야/밑둥 잘리어도 새순은 돋거니/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중략)/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듯/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고정희, <상한 영혼을 위하여>)
준엄한 심판의 자리인 형사법정에서 부드러운 시어가 흘러나왔다. 법대 위의 판사가 건네는 위로의 시구에 피고인은 고개를 떨어뜨렸다.
김지영(가명·30)씨는 대전의 한 주택에 들어가 안방에서 500원짜리 동전 2개, 부엌에서 3000원 상당의 상품권 1장, 현금 12만4000원을 훔친 혐의로 법정에 섰다. 김씨는 이미 절도죄로 여러 차례 처벌을 받았다. 이 사건 이전에 저지른 절도로 1년 실형을 살고 출소하던 날, 가족조차 찾아오지 않았다. 그는 아예 연고가 없는 마을로 거처를 옮겼다. 사글셋방을 구하고 식당에서 잡일을 했다. 우연히 만난 남자와 살며 아이를 낳았지만 형편이 안 돼 곧 보육원에 보냈다. 병이 났다. 병원으로 가는 버스를 탔던 김씨는 또다시 무언가에 홀린 듯 낯선 집으로 들어갔다. 동전과 지폐를 훔쳤고, 다시 구속됐다.
지난 5월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하는 자리에서, 판사는 김씨의 영혼을 어루만지는 시 한 편을 먼저 읽어줬다. 판사는 김씨에게 40시간의 심리치료강의 수강과 40시간의 보육원 사회봉사를 덧붙였다. 판사와 피고인이기 전에 같은 사람으로서 느낀 연민의 정을 시로 표현한 이 법정의 풍경은, 당사자인 판사가 최근 법원 내부통신망에 그 재판의 소회를 밝히며 외부에 알려졌다.
김씨 사건을 다룬 대전지법 형사6단독 김진선 판사는 “김씨의 인생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 중 하나로서, 그가 재판을 받으면서 자신을 돌아보고 상처 받은 영혼이 조금이라도 치유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시를 읊어줬다”고 말했다.
송경화 기자 freehwa@hani.co.kr (기사 원문)
신문 기사의 제목처럼 이 시가 상처받은 영혼을 달랠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 재판정에 선 사람의 처지에서 보면 그만큼 절박하고 따라서 조그만 것에라도 의지하고 싶을 테니까 시 한편이 큰 위안이 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아무리 나쁜 것도 영원히 가지는 않는 것이니 멀리 보잔다든지 더 나아가서 적극적으로 고통과 대면하자는 격려와 결의가 힘이 되었을지 모른다. 그런데 피고인의 심금을 울린 것은 저 시보다는 판사의 인간적인 태도였을지 모른다. 상처를 입은 사람에게 가까이 가고자 하는 판사의 마음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상한 영혼을 위하여 (고정희)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 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시집 『이 시대의 아벨』(1983)
이 기사를 읽으면서 '벌'에 대해서 생각해 봤다. 왜 벌을 줄까? 나는 학생이 결석하면 꼭 왜 그런지를 물어 본다. 성적을 매기면서도 결석을 많이 한 학생은 그 벌로 점수를 많이 깎는다. 시험을 못 보거나 숙제를 못하거나 한 학생보다 훨씬 엄격하게 군다. 열심히 했는데도 시험을 잘 보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지만 출석은 오직 성의만 있으면 다 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성의만 갖추면 사회에 나가서 자기 앞가림 정도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출석을 중히 여긴다. 그런데 내 벌이 효과가 있는지는 자신할 수 없다. 아니, 그리 큰 효험을 보지 못할 것이다. 벌을 주는 것만으로는 안 되고 같이 밥을 먹으면서 얘기도 나누고 격려도 하는 노력이 곁들여져야 조금이나마 마음이 돌아설지 모르겠다.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왜 감옥에 가둘까? 여러 이유를 들 수 있다. 저지른 죄의 대가를 치른다거나 그냥 두면 사회에 해롭기 때문에 격리시킨다거나 하는 뜻이 있을 것이다. 잠재적인 범죄자에게 경고하고 범죄를 예방하는 의미도 있을 테고. 좀 거창하게 말하면, 폭력으로 체제에 순종하는 인간을 만들려고 하는 의도가 작용한다는 주장도 나올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감옥은 학교나 종교와 같은 측면을 지니고 있다. 다른 것은 체제를 잘 돌아가게 만드는 데 구성원을 동원하는 방식이 강제냐 자발적인 동의냐 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우리가 말하는 주체(subject)라는 것은 실상 체제에 종속된(subjected)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말을 잘 듣는 온순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허망하지만 이게 우리 삶의 진정한 모습인지 모른다.
그렇다면 죄인을 감옥에 가두는 것은 죄의 대가를 치르게 하면서 아울러 사회에 쓸모있는 존재로 바꾸기 위해서이기도 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런데 앞에서 말했듯이 사람을 바꾸기는 쉽지 않다. 감옥에 가둔다고 되는 일도 아니다. 저 피고인이 잘 보여 주듯이 여러 차례 감옥을 제 집 드나들 듯이 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오히려 우리 사회는 감옥에 가서 더 나빠지고 복수심을 키울 가능성이 높다고 해야 현실적인 진단일지도 모른다. 유전무죄라는 말도 이런 분위기에서 나온 말일 테다. 수사기관이 정당성을 지니는 일도 따라서 무척 중요하다. 죄인이 감옥에 갇히는 것을 수긍하는 데서 개심이 시작될 수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 반성해야 변할 수 있다.
저 판사에게서 그런 희망의 싹을 보는 것 같아서 흐뭇하다. 남의 물건을 훔치게 되는 사정을 보지 않은 채 법전에 나온 대로 벌을 주고 감옥에 가둔다고 해서 문제가 풀리는 것은 아니다. 저 판사의 멋진 판결처럼 심리적인 처방도 필요하고 해를 끼쳤으니 거꾸로 봉사를 해 보라고 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더 나아가서 다른 부서와 힘을 합쳐 생계를 꾸리는 데 도움을 주는 방법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이렇게 사회 전체적으로 접근해야 벌의 의미를 제대로 구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노력이 제도적인 차원에서 이뤄져야 한다.
멋진 판사가 또 한 분 있다. 소개한다.
민주적인 판사(베르톨트 브레히트)이런 사람을 보면 판사가 되는 데는 똑똑한 머리보다는 다른 사람의 고통을 연민의 태도로 바라보는 상상력과 뜨거운 피가 훨씬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 사람이 되자면 법전만 봐서는 절대로 안 되고 무엇보다도 인문학적인 교양을 갖춰야 한다. 아마 저 판사는 시를 좋아할 것이다. 따라서 위의 시는 그에게 드리는 찬사이기도 하다.
미합중국의 시민이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을 심사하는 로스엔젤레스의 판사 앞에
이탈리아 식당주인도 왔다. 진지하게 준비해 왔지만
유감스럽게도 새 언어를 모르는 장애 때문에 시험에서
수정헌법 제8조의 의미를 묻는 질문을 받고
머뭇거리다가 1492년이라고 대답했다.
시민권신청자에게는 국어에 대한 지식이 법으로 규정되어 있으므로
그의 신청은 기각되었다. 3개월 뒤에
더 공부를 해가지고 다시 왔으나
물론 새 언어를 모르는 장애는 여전했다.
이번에는 남북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은 누구였는가 하는
질문이 주어졌는데, (큰 소리로 상냥하게 나온) 그의 대답은
1492년이었다. 다시 각하되어
세번째로 다시 왔을 때, 대통령은 몇 년마다 뽑느냐는
세번째 질문에 대하여 그는
또 1492년이라고 대답했다. 이번에는
판사도 그가 마음에 들었고 그가 새 언어를
배울 수 없음을 알아차렸다. 그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조회해 본 결과
노동을 하면서 어렵게 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가 네번째로 나타났을 때 판사는 그에게
언제
아메리카가 발견되었느냐고 물었다. 그리하여. 1492년이라는 그의 정확한 대답을 근거로 하여
그는 마침내 시민권을 획득하였다.
베르톨트 브레히트, 김광규 옮김, <<살아남은 자의 슬픔>>, 한마당, 1985, 119-2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