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난 길

책도 못 읽고 글도 쓸 수 없다면

귤밭1 2018. 3. 25. 21:09

책도 못 읽고 글도 쓸 수 없다면/ 이훈

 

"마지막 남긴 글 중에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라는 문구가 있다. 나는 그게 노무현 대통령이 세상을 등진 중요한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퇴임 후 글을 쓰는 게 자신이 해야 할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셨다. 그 한줄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는데, 그동안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것 같다."(김대중, 노무현 태통령의 연설 비서관을 지내고 <대통령의 글쓰기>를 냈던 강원국이 영화 <노무현입니다>애 대해 얘기를 나누면서 한 말. http://www.cine21.com/news/view/?idx=2&mag_id=87335&dable=30.1.6)

 

기분이 몹시 안 좋으면 죽고 싶다고 한다. 그런 경우는 일일이 예를 들기가 어려울 정도로 많을 터이므로 질문을 긍정적인 쪽으로 바꾸어 해당하는 범위를 줄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죽으면 뭘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까? 이에 대한 답으로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그리고 저는 바흐의 음악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음악에는 문외한이면서 좋아한다는 말이 가능한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바흐를 들으면, 그의 음악이 단조로운 듯하고 반복되는 것처럼 들리면서도 한편으로는 "영원한 변화와 깊은 단순성"을 간직하고 있다는 정현종 시인의 말을 이해할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영원한 것이면서 변화하고, 깊으면서도 단순하니,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가 아니겠어요? 이런 높이에 비하면 저는 "놀라운 물고기를 낚기 위해 매달린 작은 벌레"보다도 못한 존재지요. 어떤 유명한 사람의 말을 빌려와 조금 고쳐 멋을 부리는 것이 허용된다면 "죽음은 바흐를 더 이상 듣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오래 전에 쓴 것인데 다시 보니 ""놀라운 물고기를 낚기 위해 매달린 작은 벌레"보다도 못한 존재"라는 대목은 지금이라면 지우고 싶다. 따옴표 안의 구절은 다들 이름은 들어 봤을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이 그에 못지않게 유명한,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프로이트에게 보낸 편지에 나오는데, (이훈)가 잘나서가 아니라 내 존재 가치를 벌레와 비교해서 평가하는 게 벌레에게 못되게 구는 짓이기 때문이다. 이런 인간 중심주의를 벗어나는 일을 요즘의 내 과제로 삼고 있다. 해충이라고 부르는 벌레는 그 자체로 해로운 것일까? 당연히 아니다. 우리 인간의 처지에서 그렇게 이름을 붙였을 뿐이다. 이 지구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면 인간이말로 해로운 동물이다. 많이 먹는 사람을 두고 돼지라고 놀리지만 정작 돼지는 사람처럼 무턱대고 먹지 않아서 위병에 걸리지 않는다는 말도 들은 적이 있다.

 

얘기를 하는 김에, 오해하지 않도록 또 한마디를 덧붙이는 것이 좋겠다. 나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모른 채로 바흐를 그냥 좋아할 뿐이다. 오래 같이한 셈이니 뭐 얻는 게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게 전혀 없다. 아마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듣기만 해서 그럴 것이다. 처음에는 내 둔한 감각을 슬퍼했지만 이제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간다. 좋아하면 됐지 더 뭐가 필요하냐는 식으로 뻔뻔해지기까지 했다. 여기에다 공자의, "아는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거워하는 사람만 못하다(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는 말씀까지 옮기기 일쑤니 '원래 저런 사람이므로 이해하자'는 마음으로 너그럽게 봐주기 바란다.

 

저 말을 듣고 생각해 보니, 죽고 나서 하지 못해 안타까운 일 가운데 으뜸가는 것이 저 글쓰기와 읽기일 거 같기도 하다. 다른 동물과 인간을 구별하는 결정적인 기준이 이 두 행위이기 때문이다(앞에서 얘기한 대로, 인간이 다른 동물보다 더 잘났다는 말은 아니다). 인간으로서 더 나아지기 위해서도 꼭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성스러운 의무이자 권리라는 뜻이다. 노무현이 바로 그런 일을 그것도 타의로 하지 못하게 되어 버렸으니 그 아픔과 분노와 절망이 얼마나 컸겠는가. 저 간절하고 비통한 마음을 이제야 겨우 알아들은 내 좁디좁은 가슴을 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