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난 길

겸손과 복잡성은 포기되기 쉽다 / 전희경

귤밭1 2020. 4. 16. 07:24

겸손과 복잡성은 포기되기 쉽다.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8308.html

 

 

문학을 이론적으로 공부하면서 꼭 배우는 개념 가운데 아이러니(반어)가 있다. 겉과 속이 다르거나 반대되는 걸 말한다. 과장이나 축서가 그 예다. 사랑스러운 아이를 개똥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 아이에게 이뻐 죽겠다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한용운의 「님의 침묵」에 나오는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는 구절은 널리 알려진 예다. 애인이 떠나갔는데 보내지 않았다는 것은 말이 안 되지만 마음에는 여전히 남아 있으니 영원한 사랑을 꿈꾸는 간절한 바람을 담고 있어서 독자는 그럴듯하다고 여긴다. 이렇게, 말이 안 되지만 진실이 되는 역설도 아이러니에 속한다.

 

이 개념은 우리가 보는 것과 그 실상이 다르다는 경험이 가르쳐 주는 지혜를 담고 있다. 세상이 보는 대로라면 얼마나 좋으랴. 아니, 그보다 내 마음이 단순하다면 내면의 갈등을 겪지 않고 살 수 있으니 얼마나 편하랴. 그런데 실상은 아침과 저녁 생각이 다르다. 천사의 마음도 온통 착한 요소로만 채워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한테 어쩔 수 없이 깃든 나쁜 요소를 조금씩 없애려고 노력하는 존재가 아닐까? 누구도 풀지 못한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맞춘 똑똑한 오이디푸스도 정작 자신이 누군지는 몰랐다. 지와 무지는 같이 간다. 모른다고 의심해야 알게 된다. 모르면 다 안다고 바꿔서 얘기해도 좋겠다. 모른다는 것을 모르니 저 비극의 주인공처럼 오만할 수밖에 없다.

 

삶과 세상의 복잡성을 받아들이면 겸손은 자연스럽게 내 동반자가 된다. 내 눈이 모든 것을 다 보지 못할뿐더러 본 것마저도 실상과는 아주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상은 이런 태도를 배척하는 쪽으로 흘러가는 것만 같다. 디지털 세계가 이 흐름을 더 빠르게 만든다. 유튜브를 한 편 보고 나면 인터넷이 알아서 내가 좋아함 직한 목록을 컴퓨터에 올려 준다. 이렇게 나와 다른 생각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배제되고 만다. 요즘 들어서 많이들 말하는 확증 편향, 진영 논리가 그 증거다. 여기에다 해마다 어김없이 쌓이는 나이도 한몫 거든다. ‘나 때는’이라든지 ‘내가 해 봐서 안다’ 등으로 달라진 세계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 노래방에서도 늘 같은 노래만 부른다(아아, 이건 내 얘기다). 모르는 노래가 나오면 아예 귀를 막고 더 나아가서 가수를 타박하는 최악의 행패까지 부린다. 젊은이의 눈을 존중하는 태도를 기르지 않으면 안 된다. 오늘 선거가 끝나면 김종인 할아버지는 더 안 봐도 되겠지. 이것도 내 편향일까?(이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