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잘 바뀌지 않는다
체포 직전까지 인륜을 포기한 잔혹한 성범죄를 일삼다가 급작스러운 태세 전환이라고 할 만큼 순식간에 이뤄지는 ‘반성’에 어떤 진정성이 담겨 있는지 재판부는 꼼꼼히 살피고 신중하게 따져봐야 할 것이다.
http://www.hani.co.kr/arti/opinion/editorial/937098.html#csidxbb983ff53ed7dad9575f2bc70ef3dbc
이런 이야기를 다 들어 봤을 것이다. 옛날 어떤 스님이 한밤중에 목이 말라 물을 달게 마셨는데 아침에 해골에 담긴 거라는 걸 알고 모든 건 마음이 짓는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원효 이야긴데 검색해 보니 그런 사실을 기록한 문헌이 없다는 글도 보인다(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1912311046316027?did=ZU&dtype=&dtypecode=&prnewsid=). 여기서 내 관심사는 사실 여부를 가리는 역사 논쟁이 아니다. 갑작스러운 깨달음이 쉽지 않다는 말을 하려는 것뿐이다. 삶의 이치를 놓고 오랫동안 생각하다가 이런 충격적인 일이 계기가 되어 깨달음이 더 절실해졌다고 해야 맞다. 짐작건대, 사전이 “창조적인 일의 계기가 되는 기발한 착상이나 자극”이라고 풀이하는 ‘영감(靈感)’도 느닷없이 나타나지는 않을 것이다. 고민과 모색의 결과일 뿐이다. 연습하지 않고 완벽해지는 일은 세상에 없다.
사람은 잘 바뀌지 않는다. 지각하는 학생은 다음 수업에도 변함없이 늦는다. 과제도 몇 번 받아 보면 예측이 빗나가지 않는다. 그러므로 내 나쁜 습관을 고치려면 죽음을 불사하겠다는 독한 마음을 먹어야 한다. 변화는 재탄생이나 마찬가지다. 법륜 스님은 그 방법으로 전기 충격기를 쓰라고 한다. 그래야 저 도구를 몸에 대는 일이 끔찍해져서 나쁜 일을 되풀이하지 않게 된다. 내 식대로 해석하면 잠깐이라도 나를 죽여야 한다는 뜻이리라.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이런 일은 점점 더 불가능해진다. 시멘트처럼 굳어져서 내 몸의 일부가 되어 버렸는데 생살을 도려내는게 쉽겠는가! 실제로 죽는 일만 남는다. 그러므로 어려서부터 좋은 습관을 들여야 한다. 세 살 적 버릇이 아흔(요즘 수명을 고려해서 열 살 늘렸다)까지 간다.
흥부와 놀부가 있다. 잘 아는 대로. 이들 이야기에서는 놀부가 개과천선한다. 생각조차 하기 싫은 무서운 일을 겪어서다. 그런데 이 예는 사람이 여간해서 바뀌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 주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수긍할 수 있는 변화가 되려면 밖에서가 아니라 내부에서 스스로 그 동력을 만들어야 한다. 이런 자기 발견의 과정이 없는 채로 외부의 힘에 눌려 바뀌면 오래가지 못한다. 이야기에는 안 나오지만 놀부가 죽을 때까지 착하게 살았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흥부의 도움으로 잘살게 되면 원래대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선거가 끝나자 반성이 쏟아져 나온다. 얼마나 저 말을 믿어야 할까? 저런 마음이 있었다면 선거 전에 나왔어야 했다. 그래도 행동으로 변화를 증명했으면 한다. 내가 편안해지려고 하는 헛된 소망일 테지만 믿어 보기로 한다.(이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