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우석 '신화'의 이면을 살피는 글들
황우석 교수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배아 복제 줄기세포 연구로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인물이기 때문이다(관련 기사). 우리나라에서 그이의 업적은 이미 신화가 되어 버린 느낌이다. 다음 글은 그의 연구 결과로 하여 마치 축제가 열린 듯한 요즘의 우리 분위기를 잘 요약해 놓고 있다.
일부 운동선수를 제외하고 도대체 한 인물에 대해 이토록 온 국민이 열광적으로 찬사를 바치고, 기대하고, 흥분한 적이 있었던가 싶다. 온통 나라는 이 ‘국민과학자’를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도울 수 있을까에 몰두하고 있는 것 같다. 국가요인으로서 경호를 붙이고, 줄기세포 은행설립과 도메인을 장악하고, 특허를 맡을 전문가팀을 신설하고, 몇 십억원 되는 특허비도 국가가 대야 한다는 소리마저 들린다. 돈은 얼마든지 댈 테니 마음놓고 연구를 하라는 분위기다. ‘이제 권력이 자본의 힘으로 넘어갔다’고 서슴없이 술회하는 정부는 그의 연구를 적은 투자로 얻은 나라의 자산으로 간주하고 있는 듯하다. 어쨌거나 그의 연구로 대한민국은 명실상부한 생명공학의 선진국임이 증명되었고, 그로 인해 부수될 여러 이익들을 철저히 챙기려는 게 정부의 의지로 읽힌다. 언론은 연일 그를 특집으로 다루고, 그의 줄기세포 연구가 태생적으로 안고 있는 윤리적인 문제와 넘어야 할 난제들을 양념처럼 짚기는 하되, 그를 몹시 자랑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찬사도 다양해서 ‘산업혁명에 비견될 과학혁명이다’라는 극찬에서부터 뉴턴, 아인슈타인, 세종대왕, 나중에는 이순신에까지 비유된다."(최성각, <돌밭에서 줄기세포를 생각하다>, <<한겨레>> 2005. 6. 10. 원문)다른 생각이나 비판적으로 접근하는 의견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이런 유의 글들이 위의 글에서 얘기한 대로 전체주의적인 분위기를 돌려놓을 정도는 되지 못했다. 따라서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가 "황 교수의 연구는 인간 생명체인 배아의 복제와 파괴라는 반생명적 행위를 수반하고 있다"며 "비록 복제된 배아라 할지라도 분명 인간 생명이며, 따라서 인간배아에 대한 실험이나 조작은 인간의 존엄성을 거스르는 행위"라고 비판한 것은 신화를 차분히 돌아보게 하는 계기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관련 기사). 그러면 이 신화의 이면이랄까 어두운 측면을 지적하는 몇 가지 글을 읽어 보자.
첫째는 인간 생명의 자연성이라고 할 수 있는 현상에 과학 기술이 인위적으로 개입함으로써 생기는 문제를 우려하고 있는 생각이다. 앞에서 이미 인용한 바 있는 최성각의 글이 이런 점을 잘 지적해 놓고 있다.
대세의 흐름이 아무리 그렇다손쳐도 황교수의 연구연보에 드러나 있는 바, 왜 사람이 송아지를 ‘생산’하고, 젖소를 ‘생산’하는지 근본적인 의문을 도저히 떨치기 힘들다. 이 의문은 과연 생뚱맞은 의문일까. 송아지는 어미소가 낳고, 망아지는 말이 낳고, 사람은 사랑의 결과로 태어나야 옳지 않겠는가. 그게 바로 생명공학보다 훨씬 정교하고 월등한 ‘자연의 기술’이 아니겠는가. 난치병 극복이라는 어마어마한 공동선을 방패처럼 내걸고 있지만, 만약 이 복제기술이 당사자들도 감당할 수 없는 재앙으로 이어진다면 누가 책임을 질 것인가. 농업혁명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된 농업생명공학은 이미 실패라는 게 드러나지 않았는가.인간 생명의 불멸성을 저주로 여기는 다음 구절도 위와 비슷한 생각을 보이고 있다.
사람이 송아지를 만들고, 사람이 ‘사람을 만들 수 있는 기술’로 발전할 수 있는 일에 국가가 이토록 아무런 의혹 없이 열광한다면 이는 결코 마땅한 태도가 아니다. 산천의 파괴는 합법적으로 가속화되고 있고, 믿지 못할 먹을거리가 밥상에 오르고 있고, 원인 모를 피부병에 노출되어 있는 아이들은 날로 늘어나고 있다.(최성각, 위의 글)
한계를 모르는 인간의 오만함이 오히려 우리 삶을 공허하고 천박하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도 위와 같은 관점에서 나오는 것이다.인간에게 죽지 말고 불멸하라는 것은 저주다. 시몬드 보부아르의 소설 <모든 인간은 죽는다>엔 죽지 않는 인간이 나온다. 그의 소원은 죽는 것이다. 그러나 항상 젊은 얼굴로 다시 살아나는 그 불멸은 그에게 내려진 신의 저주다. 모든 인간은 최초의 인간이 가졌던 의문, 왜 태어나서 왜 죽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그대로 가진 채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태어난다. 인간이 존귀하고 생명이 존중돼야 하는 것은 모두에게 단 한번의 생이고 각자가 유일무이한 단 하나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똑같은 무게로 생과 맞서야 한다. 거기에서 도덕도 가치관도 철학도 생겨났다. 일회적이 아니라 영원히 계속되고 수십년 뒤에 부활 소생할 수 있다면 인류의 역사는 새로이 쓰여야 한다. 동서고금의 모든 현자와 철학자와 문학적 성과물은 삶과 죽음의 문제에서 비롯됐다. 여기까지다, 내가 아는 것은.
나의 상상력이나 내가 받은 교육,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치관은 바로 여기까지다. 단 한번의 선물인 생을 기쁘게 누리고 가는 것. 두 번째 김선주, 세 번째 김선주는 노 땡큐다. 고맙다, 생로병사여.<김선주, <<고맙다, 생로병사여>>, <<한겨레 21>> 63호, 2005. 6. 14. 원문)
생명조작에 의한 의료기술의 궁극적 지향은 무병장수의 세상이라고 한다. 무병장수의 꿈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인간욕망이겠지만, 그러나 정말 질병없는 세상이 현실이 된다면 그것은 얼마나 가공할 디스토피아일 것인가. 모든 전통문화는 인간 존엄성과 자유의 근본은 우리가 인간존재의 궁극적 한계를 받아들이는 데 있음을 가르쳐왔다. 삶의 기술은 본질적으로 고통을 견디고, 죽음에 순응하는 기술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질병도, 고통도, 시련도, 죽음도 모두 사라진다면 우리의 삶은 심히 공허하고 천박한 것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경제성장이라는 신(神)을 오랫동안 섬겨오는 동안에 어느새 이러한 삶의 근본이치도 망각해버릴 만큼 우리의 정신은 마비되고 빈곤해졌는지 모른다. ‘안락을 위한 전체주의’는 실로 무서운 억압체제이다.(김종철, <안락을 위한 전체주의>, <<한겨레>>. 원문)둘째로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가 정면으로 문제 삼은, 연구의 비윤리성을 지적하는 생각을 들 수 있다.
비엔나(빈) 출신의 미국 콜럼비아 대학 교수였던 생화학자 에르빈 샤르가프는 DNA의 구조를 밝히는 과정에 결정적인 공로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90살을 훨씬 넘긴 긴 생애 동안 서양 고전에 대한 끊임없는 독서와 풍부한 교양을 바탕으로 다양한 주제에 걸쳐 저술활동을 계속했는데, 그 중 핵심적인 것은 현대 과학문명과 과학연구의 현실에 대한 그의 집요하고 날카로운 비판적 에세이들이다. 그에 따르면 “현대의 자연과학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그리고 외경의 염을 불러일으키는 자연의 장엄함이라고 하는 관점에 대한 쉴새없는 공격이 되고 있다. 그러나 이 자연과학과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것은 상호 연관되어 있어서 한 쪽이 사라지면, 다른 쪽도 사라질 운명에 있다. 정신의학, 심리학, 정신분석에 의한 인간영혼의 고체화와 물질화에 이어서 이제 인간의 신체도 단순한 연구재료가 되어버렸다… 인간의 태아가 다른 인간을 위한 재료로서 생산되는 미래의 공장은 결코 더 이상 공상이 아니다.” 샤르가프는 상황이 이렇게 뒤틀려버리게 된 것은 “가능한 것이면 무엇이든 해야 한다”는 ‘악마의 교의(敎義)’가 현대과학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 전형적인 예가 핵분열과 생명조작 기술이라고 지적한다. (중략)참고로, 생명공학이 제기하는 윤리 문제에 대해서는 <<녹색평론>>을 보면 그 대강을 알 수 있는데 구체적으로 70호(2003년 5-6월)의 '생명공학의 질주, 위협받는 생명윤리'라는 특집으로 실은 레온 카스, 김명희, 권혁찬, 배태섭의 글과, 75호(2004년 3-4월)의 박병상과 이필렬의 글, 또 77호(2004년 3-4월) 김동광의 <과학과 윤리-황우석 교수팀의 인간배아복제 사건에 대하여>가 그것들이다. 이런 글을 읽으면, 생명에 대해 무감각한 우리의 태도를 야유하는 외신에 귀기울여야 한다는 점을 느끼게 된다.
이 연구에는 허다한 문제가 내포되어 있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실제로 이 연구가 쉽사리 인간복제로 이어질 위험성은 길게 말할 필요가 없지만, 그동안 제기되어온 연구방식 자체의 비윤리성도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 연구는 사람의 질병을 치유하기 위해서 맹아상태의 인간의 초기생명을 ‘재료로’ 이용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따져 보면 인간 공동체의 가장 기초적인 도덕적 기반을 훼손하는 행위일 수 있다. 이른바 문명국가들에서 생명윤리의 이름으로 이런 종류의 연구에 일정한 제약을 가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이번의 과학기술적 ‘쾌거’는 그러한 윤리의식 혹은 윤리적 규제의 부재의 소산이라는 비판도 가능하다. 그렇다면, 정말 민족적 긍지를 생각한다면, 이것은 찬양할 일이 아니라 부끄러워해야 할 일인지도 모른다.
(김종철, 위의 글)
한국은 왜 황교수를 배출하게 되었는가. 생명공학에 대한 반대여론이 약한 나라이기 때문이라고 외신은 전한다. 이것은 칭찬인가, 야유인가. 기술 선점에 대한 분통함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한국사회는 생명에 대한 감수성이 빈약하다는 야유로 들린다.(최성각, 앞의 글)마지막으로, 사회적인 차원에서의 비판도 들어야 할 것이다. 한마디로, 이러한 연구의 결과는 워낙 돈이 많이 들어가는 고급 기술이므로 자본의 논리가 필연적으로 끼어들게 되고 그 결과로 부자를 위한 것이 되고 말 것이라는 것이다.
과학은 역사적으로 항상 힘과 권력과 돈에 복속돼왔다. 에이즈 치료약이 개발됐지만 아프리카인들이 값싸게 이용할 수 없어서 해마다 수백만명씩 쓰러져간다. 제약회사들이 위약을 만들 권리조차 주지 않기 때문이다. 병든 육체는, 불치의 병은 본인과 가족에게는 크나큰 불행이다. 그러나 병든 정신에 건강한 육체, 불멸의 육체는 인류에게 재앙이다.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에 맞았지만 병원에 가서 줄기세포로 생명을 되찾는 것을 상상해보자. 저출산과 노령화로 노인 인구가 메인 스트림이 되는 21세기 중반 이후 150살의 노인들이 눈도 갈아끼고 간도 갈아끼고 돈도 움켜쥐고, 새로운 생명은 탄생하지 않고 최초의 아무개와 제2의 아무개가 오로지 장수에만 인생의 모든 것을 걸고 눈을 번득이는 광경이야말로 내가 생각하는 지옥도다. (김선주, 앞의 글)
문제는 과연 첨단과학의 산물인 줄기세포 치료라는 것이 지금 수많은 난치병 환자와 장애인들이 기대하는 것처럼 실제로 자신을 치료하고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줄 기적을 가져다 줄 수 있느냐에 있다. 언론 보도에 의하면 줄기세포 치료대상이 되는 전세계 환자의 수는 약 1억3천만 명이며 이들이 창출할 줄기세포 치료시장은 연간 3천억 달러나 된다고 한다. 우리 정부도 이처럼 황금알을 낳으리라는 전망 하에 줄기세포 치료법을 ‘10대 차세대 성장동력산업’의 하나로 선정해 집중 지원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줄기세포연구가 각광을 받는 것은 이러한 시장 선점의 의도와 연관되어 있으며, 이것이 실현되려면 궁극적으로 치료 지불비용이 환자의 호주머니에서 나와야 한다는 얘기다.최성각의 글을 다시 한 번 옮겨서, 끝까지 밀고나간다면 결국은 인간의 복제까지 가능하게 하는 놀라운 과학 기술에 기대는 것보다는 후천적인 난치병이 생기는 데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이고 자연적인 조건을 자연과 사람이 더불어 살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해 두자.
줄기세포는 장차 치료에 적용할 만큼 기술적 안전성이 설사 확보된다고 할지라도 엄청난 비용 때문에 모든 환자에게 골고루 혜택이 돌아갈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이미 일부 임상단계에 들어간 성체줄기세포의 경우에서 이를 알 수 있다. 최근 장애인소식지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제대혈을 이용한 줄기세포 이식은 네 번 정도 수술을 받아야 효과를 볼 수 있는데 한 번 수술에만 3천만원 정도의 비용이 소요된다는 것이다. 소수의 부유층을 제외하곤 대부분의 장애인과 난치병 환자가 저소득층이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이러한 엄청난 치료 비용을 그들이 감당할 능력은 없다고 판단된다. 그렇다고 정부가 이들에게 줄기세포 치료의 혜택이 돌아가도록 의료복지를 획기적으로 확충하거나 소득분배를 단기간에 개선할 가능성도 없기 때문이다.
줄기세포만이 아니라 유전자 치료 역시 부자의 과학이 될 전망이다. 최근 서구에서의 연구경향은 단지 질병 치료를 넘어서서 외모와 지능 등 자질함양을 위한 유전자조작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기존의 계급불평등이 유전자조작으로 고착화된 생물학적 불평등으로 전환될 수 있으며, 그러한 미래는 영화 <가타카>와 소설 <멋진 신세계>에서 이미 생생하게 묘사된 바 있다. 장애인과 치매 노인에게 줄기세포 치료라는 신기루는 약속하지만 정작 현재 그들의 이동권과 복지에는 무관심한 것이 우리 사회의 모습이다. 때문에 나는 생명과학이란 비싼 실로 짠 새 옷이 대부분의 장애인과 난치병 환자에게는 입어보지도 못할 부유층의 옷이 될까 걱정스럽다. 진정 빈자를 위한 과학은 현실에선 불가능한 꿈인가?(김환석, <부자의 과학과 빈자의 과학>, <<한겨레>>. 원문)
자꾸, 자연을 거슬러 고통을 줄이고 오래 사는 쪽으로 가는 이 세상이 나도 무섭다.나는 내가 낸 보잘 것 없는 세금이 예측 못할 생명공학의 발전에 쓰이기보다는 난치병 환자가 속출하지 않을 건강한 사회에 쓰여지기를 원한다. 고구마 모종을 심으면 고구마가 나고, 고추 모종을 심으면 고추가 자라는 세상이 건강한 세상이 아니겠는가.
무섭다. 세상의 이 걷잡을 수 없는 흥분이.(최성각, 앞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