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난 길

좋은 글의 조건

귤밭1 2005. 9. 13. 09:11

어떤 글이 좋은 글일까요? 여러 가지로 대답이 가능하겠습니만 글쓴이의 의도가 제대로 실현되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누구나 공감하리라 생각합니다. 물론 그 의도가 뻔한 것이어서는 안 되고 깊이와 보편성을 갖춘 내용이어야 되겠지요. 그런데 우리 같은 보통 사람에게 이러한 내용의 질은 평생에 걸쳐서 끊임없이 배우고 읽고 쓰고 해야 겨우 그 그림자를 짐작해 볼 수 있는 것일 것입니다. 일종의 유토피아인 셈이지요. 완전히 접근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면서도 실현되지는 않는 상태 말입니다. 그러니 좋은 글 못 쓴다고 가만히 앉아서 한탄할 것이 아니라 부지런하게 읽고 생각하고 써 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경지에 이르게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문제는 성의입니다.

 

아무튼 내용의 깊이나 독창성, 보편성을 갖추는 일은 위에서 말한 대로 평생에 걸쳐서 해야 할 일이니까 여러분의 노력에 맡기기로 하고 여기서는 그 내용을 전달하는 방식에서 반드시 고려해야 할 점에 대해서 얘기하고자 합니다.

 

나는 좋은 글이 갖추어 할 가장 중요한 요건은 구체성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기 내 앞에 아름다운 꽃이 있다고 합시다. 내가 아무리 아름답다고 얘기해도 여러분은 무슨 말인지 모를 것입니다. 그 꽃이 눈앞에 보이지 않으니까 말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를 왜 입 아프게 하느냐고 역정낼지도 모르겠지만 나쁜 글의 경우 이런 방식으로 이루어진 글이 이외에도 많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렇게 반응할 일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독자의 공감을 얻는 글이 되려면 꽃의 모양이라든가 향기라든가를 마치 눈앞에서 그 꽃을 보고 냄새 맡듯이 보여 줄 수밖에 없습니다. 이게 구체성입니다. 좋은 글이 자연스럽게 갖게 되는 교훈적인 성격도 이 구체성에서 나온다고 해도 좋습니다. 예를 들어, 열심히 공부하자는 말 대신에 그렇게 하는 모습과 그렇게 하여 얻은 결과를 구체적으로 보여 주면 독자들은 '아! 이러니 열심히 해야겠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차원의 구체성을 직접성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다루는 대상을 우리 감각에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듯한 느낌을 주게끔 제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체성에는 또 다른 뜻도 들어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일은 다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도 너무나 당연한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무슨 얘기를 하면 그렇게 해야만 하는 숨은 맥락이 반드시 존재합니다. 이러한 연관성을 보이게 해야 좋은 글입니다. 그러니까 구체성이란 말은 전체를 이루는 요소들의 연관 관계를 드러낼 때 얻어지는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좀 어려운 말로 매개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구체성은 매개된 직접성이라고 규정할 수 있습니다. 이런 차원에 이르러서야 참다운 구체성을 이뤘다고 할 수 있는데 다른 말로는 전체와 부분의 변증법이라고도 부릅니다.

사람은 그의 현실의 부분과 전체를 보고 산다. 그러나 이 현실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나 이를 의식 속에 투영하여 파악함에 있어서 전체와 부분의 균형을 바르게 유지하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다. 이 균형을 유지하려면, 긴장과 갈등과 투쟁을 무릅쓸 각오를 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긴장이 커짐에 따라 많은 경우 우리는 현실의 한쪽을 선택해 버리고 만다. 그러나 한쪽만의 선택은 우리에게 현실의 전모를 돌려주지 않는다. 우리가 현실의 부분에 눈길을 모으고 그것을 틀림없이 포착하려고 하면, 이 부분은 그것을 포함하는 전체에 의하여 뒤틀리고 제약되었음이 드러나게 되고 따라서 우리가 보는 부분은 현실의 참된 모습이 아닌 것이 된다. 그러나 현실의 전체를 보는 눈은 사람의 세계와 생리적으로 감각적으로 교섭하며 살아가는 과정에서 유일하게 명백한 사실인 구체적인 사실을 잃어버리고 만다. 언제나 전체가 부분의 총화보다 크다고 하더라도 전체는 부분의 집합에 기초해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구체적인 생존에 의하여 매개되지 않은 어떠한 전체적인 현실도 참다운 의미의 전체일 수 없고 단지 퇴화된 전체의 겉껍질에 불과할 뿐이다.

 

사람의 현실을 의식의 대상으로 또는 의식적인 의도의 대상으로 삼고자 할 때, 우리는 언제나 이러한 부분과 전체의 변증법에 부딪치게 된다. (김우창, <<궁핍한 시대의 시인>>, 민음사, 1977, 12쪽)

나무는 보고 숲을 보지 못한다는 말은 바로 이 변증법의 구체적인 실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무를 아무리 자세하게 그리고 직접 보듯이 묘사했다고 해서 나무를 다 드러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숲과 연관해서 어디쯤 자리잡고,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등을 살펴야 어느 정도 나무에 대해서 얘기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변증법은 아주 중요하므로 1917년에 발표된 이광수의 <<무정>>과 우여곡절을 거쳐 1924년에 완성될 수 있었던 염상섭의 <<만세전>>을 예로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잘 알다시피 1917년이라면 우리가 일본에 합방된 지 7년이나 흘렀고 2년 뒤에 만세 운동이 일어납니다. 왜 거족적으로 그런 운동을 했을까요. 한마디로 살기가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전체적인 상황입니다. 그런데 <<무정>>의 작중화자는 마지막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교육으로 보든지, 경제로 보든지, 문학 언론으로 보든지, 모든 문명 사상의 보급으로 보든지 다 장족의 진보를 하였으며 더욱 하례할 것은 상공업의 발달이니, 경성을 머리로 하여 각 도회에 석탄 연기와 쇠망치 소리가 아니 나는 데가 없으며 연래에 극도로 쇠하였던 우리의 상업도 점차 진흥하게 됨이다.

 

아아, 우리 땅은 날로 아름다워 간다. 우리의 연약하던 팔뚝에는 날로 힘이 오르고 우리의 어둡던 정신에는 날로 빛이 난다. 우리는 마침내 남과 같이 번쩍하게 된 것이로다."(이광수, <<무정>>(<<이광수 전집 1권>>), 삼중당, 1962, 318쪽)

부분적으로, 그러니까 사실 자체만 놓고 보면 실상에 어긋나는 말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식민지라고 하여도 근대화가 진행되어서 철도도 놓이고 공장도 생기고 했으니까요. 그런데 이런 부분을 제대로 인식하자면 일제 식민지 상황이라는 전체와 연관시키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광수는 식민지에서 진행되는 근대화의 실상이 식민지 지배 체제의 경제적 착취라고 하는 전체적인 사실을 몰각한 채 부분인 근대화의 외양만 보고 그것에 대해 감탄하고 있습니다. "조선이 식민지 통치하에 있다는 사실을 완전히 망각하"(김우창, <한국현대소설의 형성>, <<궁핍한 시대의 시인>>, 민음사, 1977, 104쪽)여 소설을 낙관적으로 끝맺게 되는 것입니다. 춘원은 근대화의 화려한 겉모습에 취해 그것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하는 점을 심각하게 따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부분에만 주목하고 전체를 보지 못한 맹목이 이런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무정>>의 현실 인식에서 나타나는 문제점은 염상섭의 <<만세전>>(1924)과 비교하면 더 뚜렷해집니다. 염상섭의 주인공 이인화는 부산 시내를 돌아보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 고향엔 전등도 놓이고 전차도 개통되었네. 구경오게. 얌전한 요리집도 두서넛 생겼네. ……자네 왜 갈보 구경했나? 한번 보여줌세."

 

몇 천 년 몇 백 년 동안 가문에 없고 족보에 없던 일이 생기었다. 있는 대로 까불릴 시절이 돌아왔다. 편리해 좋아, 번화해 좋아, 놀기 좋아 편해 하며 한 섬지기 팔면, 한편에서는 "우리에겐 인젠 이층집도 꽤 늘고 양옥도 몇 개 생겼네. 아닌게아니라 여름엔 다다미가 편리해. 위생에도 매우 좋은 거야." 하고 두 섬지기 깝살릴 수밖에 없게 된다. 누구의 이층이요, 누구를 위한 위생이냐. (중략) 집문서는 식산은행의 금고로 들어가서 새 임자를 만난다. 그리하여 또 백 가구 줄어지고 또 이백 가구 줄었다.(염상섭, <<만세전>>(<<염상섭 전집 1권>>, 민음사, 1987, 54-5쪽)

이인화는 이와 같이 식민지 근대화의 핵심을 이루는 경제적 착취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는 부산을 명시적으로 "조선을 축사(縮寫)한 것, 조선을 상징한 것"(52쪽)이라면서 '깝살리다' '털리다' '까불리다' '말리다'와 같은 비슷한 뜻을 지니는 어휘를 되풀이 사용하여(52-5쪽) 제국주의 체제의 경제적 착취로 말미암아 생긴 "불쌍한 흰옷 입은 백성의 운명"(53쪽)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근대화의 겉모습을 침투하고 안으로 들어가 경제의 발전이 누구를 위한 것인가 하는 근원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었습니다. 말할 필요도 없이 부분을 전체와 연관하여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이러한 매개된 직접성은 자연스럽게 복잡성이라는 또 하나의 좋은 글의 조건에 연결됩니다. 여기서 복잡성이라는 말은 우리가 다루는 대상의 전체적인 측면을 뜻하는 것입니다. 대상을 단순하게 어떤 하나의 성질만을 가진 것으로 간주한다든지 긍정적인 측면만을 일방적으로 부각시킨다든지 하는 것은 이 복잡성을 존중하는 정신에 정면으로 어긋납니다. 특히 주장을 내세우는 글에서는 이 복잡성을 고려하는 일이 아주 중요합니다. 내 주장이 옳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 주장에 반대되는 측면을 배제하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강한 신념이 경직화되는 폐해가 생기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복잡성을 존중하는 눈을 가지려면 무엇보다도 사실 앞에서 겸허한 태도를 길러야 합니다. 내 신념이 무너지는 한이 있더라도 사실을 존중하겠다는 태도를 갖추는 일은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인간은 자존심 덩어리이기도 하니까요. 따라서 필요하면 자존심을 버릴 수 있을 정도로 무한히 열려 있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프로이트의 말을 들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꿈의 해석의 결론이 여러분에게 기분 나쁜 아주 부도덕적인 것으로 생각된다고 하여 그것이 어떻다는 것입니까. 나는 젊었을 때 나의 은사 샤르코 선생이 이와 같은 경우에 '사실이 그런 것을 어떻게 할 수 있나'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즉, 이 세상을 현실에 있는 그대로 알려고 한다면, 겸허한 태도로 자기의 동정심이나 반감을 철회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프로이트, 김성태 역, <<정신분석 입문>>, 삼성출판사, 1990, 157-8쪽)
마지막으로 답이나 결론을 바로 제시하는 것보다 그것에 이르기 위한 논의의 과정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답보다는 그것에 이르는 과정이 제대로 되어 있느냐 하는 것에 더 많은 점수가 매겨지는 것은 수학 문제 풀이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글에서도 꼭 마찬가집니다. 이런 점에서 모든 글은 그 종류에 관계없이 논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조건을 완벽히 갖추는 것은 어렵습니다. 불가능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이런 경지에 쉽게 이르는 직선적인 길도 나 있지 않습니다. 앞에서 말한 대로 쉬지 않고 읽고 생각하고 쓰는 게 겨우 그 길의 입구에 들어설 수 있는 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래도 위에서 말한 몇 가지 조건을 읽고 생각하고 쓸 때마다 의식적으로 고려하는 습관을 들인다면 읽을 만한 글을 지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문제는 여러분의 노력과 성의입니다!

 

훈이네 집으로 가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