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과 울음에 대하여
가을이 되면 몸도 마음도 가라앉기가 쉽습니다. 생리적으로는 햇빛의 양이 줄어드는 것이 우리 몸이 영향을 미쳐서 그렇다고 합니다. 다른 면에서 보면, 벼를 거두어들이듯이 한해 동안의 우리 삶도 정리하여 결산서를 내야 되는 때여서 그렇게 되는 것 같습니다. 뒤를 돌아보면 아무래도 제대로 못한 것이 먼저 보일 테니까 말입니다. 이렇게 지내다 보면 자칫 웃음을 잃기 쉽습니다. 그러니 혹시 잘못된 일이 있더라도 다음에 더 잘 하면 되지 하고 편하게 생각하도록 합시다. 이런 여유를 가져야만 웃음이 나옵니다.
웃음이 우리 몸과 마음에 두루 좋다는 얘기는 다 아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우리 몸이 그 효과를 증명해 주지요. 반대의 경우로 화를 내고 난 다음에 느끼는 기분과 내 몸이 보이는 반응을 생각해 보면 억지로라도 웃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이렇게 다 느끼는 거지만 그래도, 웃어야 하는 이유를 한의사에게 들어 봅시다. 글의 제목은 <진짜로 웃으면 내장도 웃는다>입니다.
아마 다 고개를 끄덕이리라고 생각합니다. 얘기를 시작하였으니 내가 전에 웃음에 대하여 쓴 글이 있으므로 여기에 옮기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헤르만 헷세의 <싯다르타>라는 소설에 보면 마지막에 참 멋있는 장면이 있다. 싯다르타의 예전 친구인 고빈다가 싯다르타를 찾아왔다. 이 사람은 출가한 사문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고통과 번민에 쌓여 있었다. 지나던 길에 옛 친구인 싯다르타를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왠지 모르게 성자의 느낌이 풍기는 싯다르타에게 가르침을 청한다.
싯다르타의 이야기를 들은 고빈다는 자신의 스승인 붓다와는 좀 다르게 이야기하는 싯다르타를 금방 이해 할 수 없었다.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가르침을 청한다. 이때 싯다르타는 자신의 이마에 입을 대라고 한다. 반신반의하며 고빈다는 시키는 데로 한다. 그때 순간 싯다르타의 얼굴위로 서로 서로 이어져 변하는 수많은 생명체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여자와 남자의 모습 그리고 아이와 노인, 잉어, 죽음 등 수많은 모습들이 있고 또 여전히 그 배후에 변하지 않는 모습인 싯다르타의 웃는 모습이 있었다. 다시 모든 것이 사라지고 제정신이 돌아왔을 때 거기에는 싯다르타의 웃는 얼굴이 보였다. 미소 짓는 그 얼굴은 자신의 스승인 붓다의 미소였다. 고빈다는 울면서 자신도 모르게 절을 했다. 이때 고빈다는 깨달은 자는 미소 짓는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미소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붓다의 미소다. 평화와 자비의 상징인 그 미소는 진정 깨달은 자의 미소일 것이다. 마음이 평화롭지 않으면 진정한 미소는 나오지 않는다. 직업적으로 미소 짓는 진짜 미소가 아닌 경우는 입주변, 관골 주위의 근육만 움직인다고 한다.
요즘은 진짜 미소 띤 얼굴을 찾아보기 힘들다. 미소는 몸 안의 내장들을 이완시킨다. 몸 안의 긴장을 풀어주는 것이다. 운동을 많이 하는 사람도 소화가 안 되는 경우는 대개 스트레스 때문이다. 그런 사람은 거의 웃지 않는다. 웃어야 몸 안의 내장이 이완되는데 늘 긴장하니 소화가 잘 안 되는 것이다. 또 운동을 하더라도 늘 짜증스런 표정을 짓는 사람도 겉의 근육은 풀려도 내장의 근육은 긴장되어서 여전히 피곤함을 느낀다.
마음에서 평화로움을 느낄 때 우리 몸은 앤돌핀이라는 호르몬을 낸다고 한다. 평화의 호르몬인 이 호르몬은 암도 치료 할 정도로 강력하다고 한다. 한의학에서도 마음이 평화로움을 느끼면 가슴의 에너지 센터가 활성화되어 몸 안의 모든 기운이 조화롭게 되고 강력한 생명력이 발동된다고 본다. 평화로움의 미소는 강력하여 중국의 어떤 사람은 암에 걸렸을 때 암이 걸린 곳을 향해 계속 평화로운 미소를 보내서 스스로를 치료했다고 한다. 평화의 미소는 자신을 보호하는 최고의 보약인 것이다. 직장이나 버스 등에서 잠깐의 시간이 있으면 고요히 마음을 내리고 미소 지으며 주변의 모든 존재들에게 평화와 사랑을 보내보자. 어떤 영양제보다도 좋다. / 한의사 권선영(원문)
어제(2003년 2월 18일) 밤에 KBS1 TV에서 연속으로 내보내는 <생로병사>를 보았습니다. 어제는 웃음이 암을 치료할 수 있을 정도로 몸에 좋다는 얘기를 과학적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안 보신 분들을 위하여 생각나는 대로 웃음이 어떻게 우리 몸에 좋은지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우리 몸에는 자연 살상(NK: Natural Killer) 세포가 있답니다. 이 세포는 암 세포를 파괴하는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웃으면 이 세포의 활동이 활발해질 뿐만 아니라 그 수가 알아 보게 늘어납니다. 그러니 웃음이 암을 치료한다는 게 말짱 헛말일 수는 없지요. 또 웃음은 스트레스 호르몬을 현격하게 줄여 준답니다. 웃고 나면 가슴이 시원해지는 게 바로 이런 작용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효과는 꼭 웃겨서 웃을 때만이 아니라 일부러 또는 억지로 웃어도 나타난다니 신기합니다. 웃음은 또 얼굴뿐만 아니라 몸의 근육을 활발하게 움직이게 하여 운동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결과를 가져다 줍니다. 달리기와 비교하여 어떻다는 얘기도 했는데 기억할 수 없어서 여기에 옮기지 못하겠습니다.
그런데 얼굴에서 웃음을 결정짓는 것은 입이랍니다. 입꼬리가 위로 올라가면 웃는 모습이 되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 한국 사람들은 서양인들에 비해 입꼬리가 조금 밑으로 내려가 있어 평소에 무겁게 보인답니다. 어제도 대구 지하철역에서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나 사람들이 많이 죽은 데서 보이듯 웃을 일이 적은 대신에 신경을 쓰고 마음을 졸여야 할 일이 상대적으로 너무 많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인지 모릅니다. 20세기의 역사만 보아도 식민지 경험, 분단, 전쟁 등 결코 웃을 수 없는 굵직굵직한 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근래 들어서 전체적으로 많이 나아지기는 했지만 집에서는 아이들 교육 문제, 집을 나서면 교통 문제, 환경 문제, 나라의 차원에서는 대북 관련 문제 등 모두 심각하게 생각해야 될 것 투성이지요. 이 가운데서 어떤 것들은 더 나빠졌다고 해야 맞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여도 늘 무겁게 살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어렵다고 해도 웃음의 시간은 있는 법입니다. 의식적으로 가벼워지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자면 우리가 마주치는 대상에 대하여 방심한 듯한 태도를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좀 어려운 말로 거리를 두어야 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희극 배우가 자기 가족이면 아마도 마냥 웃기는 어려울 거예요. 어느 순간에 문득 가족의 생계를 위하여 저렇게 웃기자고 하는 것이 눈물겹게 보일 수 있으니 말입니다. 한마디로 거리가 가까워서 내 문제로 느껴지게 되면 심각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여유와 유연한 태도를 가져야 웃음이 나옵니다. 또 입꼬리를 위로 올리는 연습도 해 볼 만합니다. 자꾸 연습하면 저절로 웃는 얼굴이 된다니 무슨 일에서든 연습이 완벽하게 만든다는 말이 통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 함께 거울을 보며 '김치'라고 소리내 봅시다. 웃는 모습이 보이지요.
이렇게 웃음은 우리 마음과 몸을 건강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런데 이런 기능은 웃음을 유발하는 대표적인 문학의 갈래인 희극에서도 발휘됩니다. 희극에서 조롱거리가 되는 인물은 기계적인 인물이거나 편집광입니다. 이들은 과거의 것들을 고집스럽게 유지하려고 하면서 새로운 것이 나타나는 것을 방해합니다. 이런 고집은 낡은 것을 유지하려는 것이어서 당연히 새로운 세대에게는 엉뚱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엉뚱함이 웃음을 유발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비틀기-웃음에 대하여>에서 이미 얘기한 바가 있습니다.
편집성이 갖는 극적 기능은 의식적 속박(ritual bondage)이라고 일컬어질 만한 상태를 표현해 주는 것이다. 방해꾼은 자신의 편집증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극 중에서 그의 역할이란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의 망집(妄執)을 되풀이하는 일이다. (중략) 수전노는 황금을 숨기는 일 또는 돈을 저축하는 일과 관계되지 않는 일은 일체 행할 수도 없거니와 일체 말할 수도 없다. (중략)그런데 희극은 웃음거리가 된 인물이 마음을 바꾸는 것으로 끝납니다. 결말 부분의 잔치는 이런 것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웃음의 대상이 되는 인물이 새로운 사회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지요.
편집성의 원리는 쓸모없는 행동을 반복하는 것, 즉 의식적인 속박을 문학적으로 모방하는 것이 우스꽝스러운 것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비극에 있어서-<<오이디푸스 왕>>이 정해진 실례이지만-반복은 논리적으로 파국에로 이르게 된다. 너무 지나치게 많이 반복한다거나, 그렇기 때문에 어느 곳으로 갈지 모를 정도로 방향이 없는 반복은 희극의 영역에 속한다. 왜냐하면 웃음은 얼마간의 반사운동이며, 다른 반사운동처럼 단순히 반복되는 패턴에 의해서 조장될 수 있기 때문이다.(N. 프라이, 임철규역, <<비평의 해부>>, 한길사, 1982, 235-6쪽)
희극은 그 결말에서 얻게 되는 새로운 사회에 가능한 한 많은 수의 사람들을 참여시키려는 경향을 갖고 있다. 방해꾼들도 단순히 추방당하기보다 화해하기도 하고, 개심하기도 하는 경우가 더 많다.(N. 프라이, <<비평의 해부>>, 231쪽)결국 웃음은 현실에 맞지 않는 것들을 현실에 맞게 치료하는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설명한 것을 희극에 적용하면 자연살상 세포가 암세포인 완고한 태도를 파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희극에 있어서 편집성에 빠져 있는 사람은 보통 상당한 사회적인 특권과 권력을 가진 사람이므로, 자신의 망집에 따라서 극 중의 사회를 무리하게 한 쪽 방향으로 나아가게 할 수 있다. 이리하여 편집성은 우스꽝스러운 법이나 불합리한 법률의 주제와 밀접한 관련을 갖게 되지만, 희극의 극적 전개는 이런 것을 파괴시켜 버리는 방향으로 나아간다.(N. 프라이, <<비평의 해부>>, 236쪽)그런데 울음도 웃음과 마찬가지로 우리 몸에 좋답니다. 웃음이 그렇다는 말에 대해서는 얼른 동의할 수 있지만 울음에 대해서는 좀 뜻밖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조금만 더 생각하면 그럴듯한 바가 있다고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실컷 울고 나면 가슴이 시원해지는 경험을 한 일이 있을 테니 말입니다. 비극의 기능으로 드는 카타르시스를 생각해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카타르시스는 원래 몸 속에 들어 있는 거북한 것을 밖으로 내보내는 설사제를 뜻한답니다. 비극을 보고 나면 이런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인데 한마디로 마음이 정화된다는 말입니다. 왜 그러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복잡한 설명이 있습니다만 여기서는 비극적인 일과 정면으로 마주서는 데서 오는 결과라고 간단히 설명해 두겠습니다. 이런 경우에 흘리는 눈물은 마음의 때(진실을 가렸던 편견, 헛된 욕망)를 씻어내는 정화제인 셈입니다.
사실 눈물을 흘리는 경우를 가만히 생각하여 보면 울음이 우리 마음을 깨끗이 해주는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불쌍한 사람들에 대한 동정의 마음, 자신의 부끄러움에 대한 솔직한 인정,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깊은 공감은 대개 눈물을 불러오게 됩니다. 물론 속이 상해서 흘리는 눈물은 처음에는 앞의 것과는 다르게 시작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탐욕을 비우는 쪽으로 흘러간다는 점에서 울음의 일반적인 성질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요컨대 잘 웃거나 울자면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무엇에 집착해 있어서 다른 데를 보지 못하면 마음과 몸이 늘 무겁기만 합니다. 앞에서 본 대로 어떤 일이나 대상에 기계적으로 매여 있는 편집증적인 인간이 늘 웃음의 대상이 되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이렇게 웃자고 호소하는데도 안 그런다면 당신은 틀림없이 불쌍한 사람입니다. 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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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한겨레 21>>(578호, 2005. 10. 4)에서 웃음에 대한 짧은 얘기를 읽고 내가 지나치게, 여유에서 나오는 웃음만을 강조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글의 마지막에서는 아주 단정적인 어조로 "이렇게 웃자고 호소하는데도 안 그런다면 당신은 틀림없이 불쌍한 사람입니다."라고까지 했었던 것이다. 물론 글의 일부에서 다룬 희극의 웃음은 비합리적인 세력에 대한 조롱이나 비판을 포함하는 것이므로 내 '웃음'론이 아래 글에서 주장하는바 길든 돼지의 낙관론이라고만 할 수 없을지는 모르지만, 이야기의 흐름이 좀 균형을 잃은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아무리 노력해도 웃을 수 없는 사람이 많은 것이다. 억지로 웃는 것이 괴로운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웃는 것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웃는 것이 다는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그래도, 싸우면서도 웃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반론을 펴고 싶지만, 내게 돌아올 '네 처지가 절박하지 않아서 그런 말을 한다'는 대꾸에는 대답할 자신이 없다.무조건 웃으라는 처방전
▣ 반이정/ 미술평론가 http://dogstylist.com
웃음만큼, 일방적인 찬사와 전폭적인 권장사항으로 장려되는 게 있는지 의문입니다. 웃음은 크게 처세와 건강 회복에 신뢰도가 높은 상품으로 인지되었고, 지지되는 방식 역시 비중 있는 물증 제시를 통해 관철되곤 합니다. 출세한 명사의 웃음 예찬론을 인용하는 주입식, 크게 웃을 때 근육 231개가 움직인다는 의학적 견해가 가세한 웰빙식. 거기에 코미디 프로의 이름으로까지 채택된 소문만복래(笑門萬福來)라는 불멸의 믿음까지, 웃음 앞에 대항군은 없어 보였고 무조건 웃으라는 처방전은 유행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강제되는 무엇은 언제나 진정성이 의심되는 법입니다. 더욱이 서비스업 종사자의 훈련받은 웃음이 그들에겐 도리어 스트레스 부메랑으로 돌아온다는 기사도 있잖습니까. 부조리한 세상에서 웃음만을 권유하는 이는 이미 가진 자일지도 모릅니다. 분노와 비판이 필요한 자리에 웃어넘기는 낙관론은 길든 돼지가 되는 지름길입니다. 정작 억지웃음이 필요한 사람은 항시 얼굴이 굳어 있는 배우 최민수 정도일지도 모릅니다.(원문 출처)
글을 쓰기가 어렵다. 웃자고 시작한 건데 심각해져 버렸다. 둔한 탓이다. (2005. 10.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