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난 길

손에 대하여

귤밭1 2005. 10. 6. 23:35
사람이 동물과 다른 점, 달리 말해서 인간만의 고유한 특질을 설명하는 데는 여러 가지 관점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생각한다든지 논다든지 하는 성질을 강조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다 아는 얘기들입니다. 이밖에도 도구를 만드는 것을 인간의 특징으로 드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경우에 자유로운 손은 거의 절대적인 근거가 된다고 하겠습니다.

다 아다시피 인간은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손을 갖고 있습니다. 물론 이 글도 손으로 쓰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동물들에게도 손이 있다고 할지 모르나 발과 거의 구분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인간의 손과는 본질적인 차원에서 다릅니다. 유인원은 예를 들어 이를 잡는 데 손을 쓰지만 인간처럼 늘 서서 걸어다니지 않는다는 점에서 도무지 인간의 손과는 같은 차원에서 얘기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유전적인 것은 물론이고 여기에다 후천적으로 배우고 닦은 손 재주를 후손들에게 전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오로지 유전적으로 물려받은 손의 기능만을 반복하는 침팬지와는 질적으로 차이가 납니다. 그렇다면 같은 손이지만 유인원의 것은 손이 아니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주어진 것만을 쓴다는 점에서 인간을 제외한 다른 동물에게서 손의 역사를 거론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여기서 역사란 물론 변화, 좀더 적극적으로 말하면 발전을 뜻하는 것입니다.

손은 나는 물론 나 밖의 세계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도록 하는 도구입니다. 나와 세계 사이의 매개물이지요. 그런데 인간이 만들어서 사용하는 도구들은 이 손을 확장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도구를 만드는 인간이라는 개념은 바로 여기서 나온 것입니다. 손이 만들어 낸 기계들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서는 길게 얘기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이 기계를 사용하는 덕분에 우리 인간들은 생존에 필요한 시간을 절대적으로 줄일 수 있게 됩니다. 얼른 보기에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할애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술 같은 것을 그 예로 들 수 있습니다.

물론 예술이 꼭 여유가 있어서만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인간의 감정이 없어지지 않는 한 예술이라고 할 만한 현상이 늘 존재할 테니까요. 그렇지만 생존을 위해서 대부분의 시간을 써야 하는 사회에서 생산되는 예술의 성취는 보잘것없는 것이기가 쉽습니다. 이런 점에 대해서는 다른 글(<아름다움의 조건>)에서도 인용한 바 있는 마르크스의 발언이 그럴듯합니다.

조야한 실제적 욕구에 사로잡혀 있는 '감각'은 역시 '제한된' 감각일 따름이다. 굶주림에 지친 인간에게는 음식의 인간적 형식이 존재하지 않으며, 오로지 음식으로서의 추상적 현존재만이 존재할 따름이다. 이처럼 음식은 가장 조야한 형식으로 존재하는바, 우리는 이러한 영양 활동이 무엇에 의해 '동물적인' 영양 활동과 구별되는가를 말할 수 없다. 근심에 가득 차 있는 굶주린 인간은 아무리 훌륭한 연극을 보더라도 '감흥'을 느낄 수 없다. 광물 상인은 광물의 상업적 가치만을 알 뿐이지 그 아름다움과 고유성까지는 깨닫지 못한다. 그는 광물학적 감각을 지니고 있지 않다.(K. Marx, Oekonomische-philosophische Manuskripte aus dem 1844. Marx and Engels, Literature and Art, New York, International Publishers, 1947, pp. 16-7)
그런데 손이 노동과 기계의 제작을 통해서 이른바 물질문명의 발달에만 이바지한 것은 아닙니다. 사실은 손을 통해서만 인간은 동물적인 수준에서 참다운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 해야 맞습니다. 앞에서 이 글도 손으로 쓰는 것이라고 그냥 지나가면서 말하듯이 했습니다만 손을 거쳐야 제대로 된 생각도 나오는 것입니다. 머리에서 맴도는 생각을 손으로 꽉 붙잡아야 글을 쓸 수 있습니다. 머리에서 굴리는 것들은 발전하지 못하고 그냥 그 자리에서 맴돌고 맙니다. 손을 거쳐야 생각이 비로소 살아 움직이면서 구체화되는 것입니다.

'파악(把握)'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잘 아다시피 뭘 손에 잡아 쥔다는 뜻인데 비유적으로 전용되어 확실하게 이해한다는 뜻도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손에 잡아야 대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기하게도 '잡는다'는 뜻을 가진 영어 단어 'catch'나 'grasp'도 꼭 마찬가지의 생각을 보여 줍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생각도 손으로 붙잡아야 글 쓰기가 시작된다고 하는 것은 헛말은 아닙니다. 하얀 종이에 한 글자라도 써 놓으면 그 뒤를 따라서 뭔가 나오게 됩니다. 사람마다 얼마나 나오느냐에는 차이가 있겠지만 손을 거쳐야 글이 된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는 글을 쓰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글감을 제시하면서 한 문장이라도 좋으니 직접 써 보라고 주문합니다.

그런데 다음의 설명을 들으면 손이 글을 쓰는 데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해밀튼(Victoria Hamilton)도 이와 비슷하게 유아가 사물을 움켜쥐는(grasping) 능력을 획득하는 것이 건강한 나르시시즘과 나르시시즘의 초월 모두를 예증한다고 강조한다. 움켜쥐는 능력은 어린아이에게는 엄청난 성취이며, 종종 성취감과 만족감을 낳기도 하는 것으로 보인다. 높은 탁자에서 가까스로 컵을 당겨 생전 처음으로 입에 댈 때, 어린아이의 눈에는 의기양양한 표정이 담긴다. 또한 움켜쥐는 능력이란 유아가 자기중심성에서 탈출하는 것, 즉 그 단어가 비유적으로 사용되듯이 현실세계와 만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 능력은 (영어에서는) 관념들을 이해하는 능력을 지칭한다. 아이를 '망치는 것', 즉 자율성을 해칠 정도로 지나치게 돕는 것은 세계를 발견하는 이러한 과정을 방해하는 것이다.(제레미 홈즈, 유원기 옮김, <<나르시시즘>>, 이제이북스, 2002, 54-5쪽)
이렇게 손은 파악을 통한 자기화와 함께 대상이나 현실 세계와 접촉함으로써 자기화하면서 아울러 폭 좁은 자기 중심주의를 초월하도록 합니다. 주로 손으로 이루어지는 노동의 참다운 의미는 바로 세상과의 소통에 있습니다.

노동은 나를 둘러싼 세계와 적극적으로 관계를 맺는 일입니다. 특히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는 노동이 그렇습니다. 따라서 나와 세계가 주고받는 관계 속에서 나는 세계에 대해 문을 열게 되고 그것이 바로 고통의 치유 과정이 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땅을 판다고 해 봅시다. 너무도 당연하게도 잘 파내려면 땅의 성질을 잘 파악해야 됩니다. 이렇게 내 힘이 가해져야 할 대상의 성질을 파악하는 것이야말로 내 마음을 여는 일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땅과 내 마음이 일치된 상태로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노동은 내 안에 숨어 있는 능력을 이 세계에 드러내 보이는 일이기도 합니다. 어떤 일을 해냈을 때 느끼게 되는 보람은 바로 이러한 능력의 외화와 노동 대상과의 일치된 리듬에서 오는 것일지 모릅니다.( <고통을 치유하는 50 가지 방법>)

이렇게 손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소통의 측면에서 다른 인간과의 관계를 친밀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손이라는 점도 강조해 둘 만합니다. 무얼 잘하면 손뼉을 치고 절대적인 존재에게 손을 모아 기도하며 사랑하는 사람들은 손을 잡습니다. 물론 화가 나거나 상대방이 미우면 손으로 때리기도 하지요. 그런데 이 경우에는 다른 기관들을 쓰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발로 차고 입으로 욕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말하면 다른 것으로도 사랑하는 게 아니냐고 할지 모르지만 사랑이 진행되는 단계에 따라 사용되는 기관이 다르다고 하는 것이 정확할 것 같습니다. 구체적으로 사랑을 하게 될 경우, 손을 잡는 것과 입을 맞추는 일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시기가 다르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니 손이 친밀한 관계를 이루는 데만 쓰이는 것은 아니네요. 그와는 많이 다르게, 무엇에 항의하기 위해서 주먹을 단단히 쥐어 팔을 흔들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손으로 싸우기도 하니까요. 그러므로 앞의 주장을 고쳐서 손이 인간의 관계를 살아 있게 하는 데 이바지한다고 해야겠습니다. 여기서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 글의 마지막을 읽으면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앞에서 기계를 손의 연장이라고 하면서 그 유용성을 강조했습니다만 이렇게 일면적으로만 얘기해서 안 된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인간의 소외 현상을 손의 역사에서도 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음식을 놓고 우리는 손맛이라는 얘기를 흔히 해 왔습니다만 앞으로는 과거의 말로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요컨대 기계화가 진행됨에 따라 점점 더 손맛을 느끼기가 어려워진다는 것입니다. 문명화 또는 그 문명화의 척도인 예의는 자꾸 손의 직접적인 개입을 금지하는 쪽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박물관 같은 곳에 들어가면 전시된 작품을 만지지 말라고 합니다. 더 이해하기 쉬운 예를 들면, 코를 풀 때 과거에는 직접 손으로 했습니다만 이제는 손수건이나 휴지가 코와 손 사이에 있어야 합니다. 손의 간접화라고나 할 추세를 시각의 압도적인 이용과 비교할 만합니다. 눈이 어느 때보다도 많이 이용된다는 말은 그만큼 손의 사용이 줄어든다는 것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을 것도 같네요.

손의 직접적인 개입이 줄어드는 현상은 자동차의 대중화로 발이 땅에 직접 닿는 일이 드물어지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자동차뿐만 아니라 현대의 삶 자체가 발과 생명의 터전인 땅과의 직접적인 소통을 가로막는 방향으로 간다고 해야 옳습니다. 사무실에서도 집에서도 양말을 신고 사는 게 일반화되었으니까요.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한다고 해서 세계적으로 반대가 무척 거센데 전쟁도 과거와는 다르게, 총을 들고 하기보다는 방에 앉아서 손가락으로 무슨 단추를 누르면 되는 식으로 변했습니다. 인터넷에서 무슨 게임을 하듯이 말입니다. 이러다 보니 실제의 인간의 목숨이 가상의 것과 구별되지 않고 따라서 아주 하찮게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풀어야 할 문제는 손의 직접성이랄까 이런 측면을 어떻게 살릴까 하는 것입니다. 특히 교육의 현장에서는 이 문제를 중요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머리로만 하는 공부가 아니라, 예컨대 손으로 직접 땅을 파 보고 무얼 심고 하는 일이 온전한 인간으로 자라는 데 결정적인 의미를 갖고 있으니 말입니다. 여기서 다시 글 쓰기의 중요성을 되풀이하여 강조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 전에 올린 글을 꺼냈습니다.

훈이네 집으로 가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