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난 길

아파트에서 병아리 키우기

귤밭1 2005. 10. 20. 10:20

딸이 초등학교 다니던 때다. 아이가, 교문에서 파는 병아리 세 마리를 사 왔다(이에 대해서 전에 쓴 것이 있는데 여기를 보세요). 둘은 며칠 안 돼서 죽어 버렸는데 하나는 용케 살아 남았다. 손 안에 들어가는 조그만 것이 사람을 졸졸 따라다녀서 여간 귀엽지가 않았다. 먹이 주는 것은 몰론이고 외출도 시키고 하면서 정성껏 키웠더니 어느덧 딸이나 그 엄마는 가까이하기를 무서워할 정도로 발톱도 제법 날카롭게 자라 닭이라 부를 만하게 컸다. 날개가 달린 것이라 내가 앉아 있으면 어깨 위로 올라와 내 얼굴에 많이 나 있는 점을 먹이로 아는지 콕콕 찍곤 했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키울 만했다.

 

어엿한 중닭이 되니 둘 데가 마땅찮았다. 지금까지는 그럭저럭 조그만 종이 상자면 되었는데 자리가 비좁아진 것이다. 베란다에는 이제 곧 얘기할 난초와 나무가 있고 또 빨래도 널어야 하기 때문에 키울 자리가 생기지도 않거니와 닭이 일으키는 먼지와 아무렇게 싸는 똥 때문에 거기서 키울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텔레비전을 포장하는 커다란 종이 상자에 있게 하는 것이었다. 상자의 크기만 달라졌을 뿐이다. 명색이 날개가 있는, 자유롭게 뛰어놀아야 하는 닭에게는 못할 짓이었다. 식구들이 외출할 때는 상자에 집어 넣는데 누가 집에 들어오는 기척이라도 나면 난리가 난다. 밖으로 나오겠다고 마구 푸드덕거리는 것이다. 그때 일어나는 먼지는 여러분의 상상에 맡기겠다. 하도 불쌍해서 꺼내 주면 활개를 치며 돌아다니다가 생각 없이 자리 가리지 않고 똥도 갈긴다(이래서 '닭 대가리'라고 하는 모양이다). 제법 자랐으므로 많이 먹으니 상자에 싸 놓은 똥을 날마다 치우는 것도 귀찮아졌다. 이쯤 되면 누가 사왔는지 모르게 딸은 아예 모르쇠하니 먹이를 주고 청소를 하는 것은 다 내 일이 되고 만다.

 

 몇 차례 겪었어도 여전히 되풀이된다. 전에 청거북이나 올챙이를 키울 때도 딸이 졸라서 시작했는데 관심을 보이는 것은 며칠뿐이고 기르는 일은 어느새 내 책임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래서 닭똥을 치울 때마다 내 굳은 결심을 되새기곤 했다. 앞으로 살아 있는 것은 절대로 집으로 들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 뒤에도 딸이 강아지니 고양이니 했지만 단호하게 거절하면서 '네 집이 생기면 네 마음대로 하라'고 대답하곤 한다. 아파트 같은 데서 동물을 키우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학대라는 점을 덧붙이는 것은 물론이다.

 

전말이 궁금할 테므로 아파트에서 고생한 닭 얘기를 끝마치자. 구정이어서 고향(제주도)에 내려가야 했다. 닭을 어떻게 해야 하나? 처음에는 비행기를 태워서 데려갈까 했다. 아버지네는 단독 주택인데다 마당과 텃밭이 있고 또 내가 어렸을 때는 닭을 그냥 밖에서 키우기도 했으므로 키우려면 못할 것은 없었다.

 

말이 나온 김에 어렸을 때의 닭 얘기도 좀 해야겠다. 집에서는 늘 열 마리 안팎의 닭을 키우곤 했다. 키운다기보다는 그냥 놔 두면 저들이 알아서 저절로 자란다고 해야 맞다. 텃밭을 돌아다니면서 배추 같은 것도 뜯어먹고 땅을 파서 지렁이도 잡아먹는 것이다. 먹이를 찾기 어려운 겨울에 좁쌀이나 음식 찌꺼기를 주는 것이 고작이다. 닭장에서 키우지 않으므로 달걀도 아무데(그때 우리 집 울타리 안에는 소 우리라든가 농기구를 넣어두는 창고 같은 것이 많아서 초가집이 여러 채였다. 그래서 부자였나?)나 낳는다. 그러니 주인이 그곳을 모르는 수도 있다. 그래서 암탉이 자기가 낳은 달걀을 품어 병아리를 까느라고 한동안 안 보이다가 어느날 열 마리가 넘는 병아리를 자랑스럽게 거느리고 나타나서 식구들을 놀라게 하기도 한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이런 경험에서 생명의 신비스러움을 막연하게나마 느꼈던 것 같기도 하다. 하기야 다 큰 닭은 집에서 무심하게 잡아먹거나 오일장에 내다 팔았으므로 생명 운운하는 게 멋쩍기는 하지만.

 

다시, 아파트의 불쌍한 닭으로 돌아오자. 고향으로 데려가는 것은 아무래도 안 되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제주도로 간다고 해도 이제는 그 많던 초가집이 다 헐리고 서울과 크게 다를 것 없는 현대식 집만 있으므로 닭이 밤에 잠을 잘 곳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청계천의 조류를 파는 곳에 줘 버리기로 했다. 물론 딸에게는 고향에 갔다온 다음에 되찾아 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그런데 딸은 이제 닭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으므로 돌아온 후에 가끔씩 시늉으로만 닭이 어디 갔느냐고 했지 더는 따지지 않았다. 아무튼 지은 죄가 있으니만큼 동물을 키우자는 것을 내가 바로 묵살해도 뭐라 하지 않는다. 나도 이제는 나이가 들었는지 생명을 키우는 일이 힘들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나쁜 조건에서 자라야 할 생명이 불쌍해서 되도록이면 살아 있는 것을 집에 들이지 않으려고 한다(이런 점에 대해서는 여기를 보세요).

 

나무도 풀도 살아 있는 것이므로 집으로 들이지 않을 것에 해당하는 것은 물론이다. 지금 집에는 난초와 나무(이 나무와 관련된 글은 여기를 보세요)가 있다. 또 연구실에도 동료 선생이나 제자들이 준 난초 같은 것이 있다. 전에는 방 안에 나무나 꽃이 있는 게 보기 좋기도 하고, 또 시골 출신이라 감각이 있어서-물론 나 혼자만의 매우 주관적인 평가이다-인지 집 안으로 들인 것은 웬만하면 죽이지 않으니까 별 생각 없이 키웠는데 이제는 이들이 불쌍해서 누구한테 줘 버리겠다는 생각부터 한다. 공교롭게도 집도 연구실도 둘 다 서남향이어서 식물을 기르기에 맞지가 않다. 특히 난초는 오후의 햇빛을 싫어한다니 더 그렇다. 여름철에 오후가 되면 강한 햇빛 때문에 문을 열어 놓을 수가 없으니 나도 식물도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연구실에 에어컨이 있지만 되도록 켜지 않고 선풍기만 틀어놓고 지내려고 한다. 적응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집에는 없다. 작년에 한창 더울 때 딸이 이 기계를 설치하자고 하도 조르길래 '내년에도 더우면 사겠다'고 약속했는데 올해도 그럭저력 그냥 넘겼다. 적어도 내년 여름이 되기까지는 내가 이긴 것이다!). 더구나 연구실은 그 방 임자가 금요일부터 비우게 되니 문을 닫게 되는데 식물은 안에 갇힌 채로 바람 한 점 없이 견뎌야 한다. 한마디로 사람 보기 좋으라고 식물은 고생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우리 인간이야말로 아파트에서 자라는 저 병아리나 연구실 안의 불쌍한 꽃처럼 갇혀 있는 존재가 아닐까? 박완서의 소설에서 이런 모습이 잘 드러난다. 설명 없이 중요한 대목을 옮겨 보겠다.

나는 어머님이 손으로 생선을 집어서 새하얀 틀이로 뼈까지 오지직오지직 씹어서 상 귀퉁이에 퉤퉤 뱉고, 비린 손가락을 쪽쪽 빠는 걸 지켜보며, 어쩔 수 없이 내 속에 자리 잡은 그분에 대한 미움을 의식했다. 그것은 아직도 내 마음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점잖고 고상하고 도덕적인 것에 짓눌려 부피 작은 것이었지만 압축공기처럼 다부지고 위험스러운 것이기도 했다.(박완서, <집보기는 그렇게 끝났다>, <<배반의 여름>>, 창작과비평사, 1978, 258쪽)

 

그러나 나는 조금도 그것들(남편이 아끼는 분재-인용자)한테 애정을 느낄 순 없었다. 남편은 마치 분재 속에 대자연을 축소해놓은 것처럼 만족해 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 강제로 왜화(矮化)된 나무들한테 약간의 연민 외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그러나 어느 날 남편이 가장 아끼던 소나무 분재의 밑동을 보고 나는 이상한 충격을 맛보았다. 윗가지는 벼랑의 낙락장송처럼 품위있게 늘어져 있는데 밑동은 뱀이 또아리를 튼 것처럼 심하게 감겨 있었다. 아마 인위적으로 억제된 성장이 그런 모양으로 괴롭게 또아리를 틀고 있으리라. 나는 우리 집안의 점잖음과 화평도 남편이 분재 가꾸듯이, 그의 취미에 맞게 자르고 다듬고 억제해서 만들어낸 작품 같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260-1쪽)

 

나는 남편이 없고 나서 처음으로 생기발랄해졌고, 나를 생기있게 하는 하는 건 바로 그 증오였다. 시어머님이 맹렬히 미식을 탐하시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나는 내 내부에서 왜화를 강요당한 채 괴롭게 또아리를 틀고 있던 그분에 대한 솔직한 감정이-홀시어머니가 외며느리 시집살이 시킬 때부터 접어두었던 묵은 증오까지가 활갯짓을 하면서 되살아나는 기쁨에 몸서리쳤다. 증오야말로 가장 확실한 삶의 보람이었다. 공허해야 할 남편이 없는 나날이 팽팽치 충족됐다.(265쪽)

 

우리 집은 이제 정말 점잖고 화평한 집이 아니었다. 나는 매일 포장지를 찢어내듯이 점잖고 화평한 겉껍질을 찢어내고 있었다.
이런 일에 열중하느라 나는 그만 며칠 동안이나 분재를 돌보는 걸 잊고 말았다. 아직 죽지는 않았지만 나무들이 몰라보게 추레해져 있었다.
그러나 나는 물주고 볕 보이는 일을 다시 시작하지 않았다. 사랑하는 마음 없이 그런 일을 해봤댔자 추레해지고, 종당엔 죽어가긴 마찬가지일 것 같았다.
어느 추운 날, 나는 추위에 약한 몇 그루의 꽃나무 분재를 바깥마당에 내동댕이쳤다.
드디어 남편이 돌아왔다. (중략)
나는 아마 남편의 진짜 얼굴도 보지 않고는 못 견디리라. 그는 포장하려 들고, 나는 찢어내려 하고, 우리 부부는 처음으로 갈등하리라. 그것이야말로 진짜 살맛이 될 것 같았다. 나는 벌써부터 살맛이 났다.
남편은 내가 내동댕이친 분재를 거둬들이고, 나는 그를 위해 목욕물을 데웠다.(266-7쪽)

우리 삶의 실상이란 것이 분재 식물과 다르지 않으니 그곳을 벗어나야 참다운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일상으로 되돌아가는 삶의 경로를 요약해 놓고 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이런 도식을 운명으로 정식화하고 있는 것으로 내게는 읽힌다.

그것(외디푸스 컴플렉스)은 우리가 주체로 만들어지고 구성되는 전환점인데, 한 가지 문제는 이것이 어떤 의미에서 항상 부분적이고 결점이 있는 메카니즘이라는 사실이다. 외디푸스 콤플렉스는 쾌락 원리에서 현실 원리로의 이행을 나타낸다. 근친 상간에서 가족 외적인 관계로 변하기 때문에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사회 전반으로의 이행이기도 하다. 또한 어린아이와 어머니와의 관계를 다소는 ‘자연적인’ 관계라고 볼 수 있고 외디푸스 콤플렉스를 벗어난 아이를 문화 질서 전체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해 가는 존재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자연에서 문화로의 이행을 나타내기도 한다. (중략) 게다가 프로이트에 있어서 외디푸스 콤플렉스는 도덕성, 양심, 법률 그리고 모든 형태의 사회적·종교적 권위의 시발점이다. 아버지가 근친 상간을 실제로나 가상적으로나 금지시키는 일은 아이가 후에 맞닥뜨릴 보다 높은 권위를 상징한다. 이런 가부장적 법률을 내투사할 때, 즉 자신의 것으로 만들 때 아이는 내부에 있는 양심의 무섭고 징벌을 가하는 목소리인, 프로이트가 초자아라고 명칭한 것을 만들어 가기 시작하는 것이다.(테리 이글턴, 김명환 외역, <<문학 이론 입문>>, 창작과비평사, 1986, 192-3쪽)

그러니까 여기서 아버지나 초자아는 무의식적인 수준에서 인간을 가두는 그물인 셈이다(참고로, 프로이트의 이러한 체제 순응성을 비판하는 흐름이 <<안티 외디푸스>>나 한곳에 정주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는 노마드론이다). 무의식적 수준이라고 한 것은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우리 몸에 배어 있다는 뜻이다. 담배 중독이 된 사람을 생각해 보면 된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담배를 피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 운명의 족쇄를 벗어던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바탕에 깔려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런 소리를 들으면 인간이 가축과 마찬가지 존재라는 주장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인간의 '자기 가축화'는 자기 자신을 가축의 상태로 몰아가는 것이다. 순서대로 살펴보자.

 

첫째, 인공적인 환경. 인간은 도시를 조성해 자신들이 살아갈 공간을 대부분 인공적인 환경으로 만들어 버렸다. 우리들은 집, 도로, 상하수도, 자동차, 전철, 전기 등에 둘러싸여 생활한다. 아침 일찍 일어나 전철을 타고 출근해 에어컨이 잘 가동되는 사무실에서 일하는 모습은 가축공장의 닭과 비슷하다.

 

둘째, 식료품의 자동공급. 도시 주민 중에서 자기가 먹을 것을 산에서 캐내고 바다에서 잡아오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거의 모든 사람들은 재료나 제품을 슈퍼마켓 등에서 사 단시간에 조리해 먹는다. 돈이 있는 한 거의 자동공급에 가깝다.

 

셋째, 자연의 위협. 인간은 문명화와 함께 자연의 위협을 극복해 왔다. 범람하는 하천을 정비하고, 태풍에도 부서지지 않는 집, 농작물의 대량생산과 비축으로 식료품을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데 성공했다.

 

넷째, 생식의 관리 또한 현대 과학기술이 자신하고 있는 분야다. 인공수정, 체외수정, 불임수술 등에 의해 생식에 개입하는 것이 최근 들어 심각한 생명윤리 문제를 일으켰다. 그 기술들은 우선 가축을 이용해 개발한 다음 인간에게 적용한 것으로, 불임치료라는 이름으로 지금은 중요한 산업을 형성하고 있다.

 

다섯째, 인간은 일관되게 품종개량을 해 왔다. 19세기 말에 우생학이 나타나 '불량한 인간'을 낳지 않도록 하기 위한 정책이나 입법이 많은 선진국들에서 실시되었다. 가축의 '생명의 질' 관리와 같은 일은 현대의학이 인간에게 하고 있다. (중략) 선택적 중절이나 유전자 진단 등의 현대 생식기술만큼 인간의 자기 가축화를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드물다.

 

여섯째, 신체의 형태 변화. (중략) 가축에게서 나타나는 변화 같은 것을 인간에게서도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곱슬머리의 출현, 추(椎) 간판뼈 수, 사지뼈 수의 변화, 피부색소의 증감 등은 인간과 가축에게서만 두렷하게 나타나는 형태 변화다. (중략)

 

일곱째, 죽음의 통제. 현대문명은 확실히 인간의 죽음을 통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늙어서 쇠약해지기까지 가능한 병을 치료하고 수명을 늘리려고 하지만, 더 이상 목숨을 이어갈 수 없음을 깨달았을 때에는 아픔이 적은 안락사를 택하려는 흐름이 강해졌다. '예기치 않은 죽음'의 철저한 배제를 목표로 문명이 진행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죽음의 자기 결정권'도 이 흐름 위에 있다.

 

여덟째, 자발적 속박. 인간은 먹을 것과 안정, 쾌적함을 공급해 주는 사회 시스템과 자발적인 속박관계를 맺으려는 듯이 보인다. 예를 들면 지구 환경 문제는 아무리 떠들어도 경제성장을 멈추거나 줄이지 않는 한 해결책이 나오지 않는다. 사람들은 시스템에 묶여 사는 것이 불편해도 지금의 생활 수준과 안락함을 보장해 주는 시스템 속에서 계속 살아가고 싶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이 가축화의 특징 중 거의 모든 것은 현대문명 속에서 살고 있는 인간에게도 해당된다. 인간은 스스로 가축화하는 것으로서 문명을 건설하였다. 그리고 가축의 안락함과 비애를 한 몸에 짊어지게 된 것이다. (모리오카 마사히로 지음, 이창익, 조성윤 옮김, <<무통문명(고통 없는 문명)>>, 모멘토, 2005, 13-5쪽)

우리는 아파트의 닭인 셈이다! 고통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안락하지만 한편으로는 순치되는 것이 서럽기도 한 그런 존재가 인간인 것이다.

 

훈이네 집으로 가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