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난 길

숙달에 대하여(2003. 8)

귤밭1 2005. 11. 21. 13:59

글을 읽고 나서 제목에 대하여 시비를 거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숙달'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무엇에 익숙하고 통달함'으로 정의되어 있는데 '통달'은 '(어떤 일이나 지식 따위에) 막힘이 없이 통하여 환히 앎'이다. 도사라는 사람이 연상될 정도로 높은 경지에 이르렀을 때 쓸 수 있는 말임을 알 수 있다. 군대에서 훈련을 하기 전에 '숙달된' 조교가 시범을 보이는데 통달이란 말이 바로 저거다 싶기도 하다. 그러니 숙달이라는 말은 앞으로 내가 하고자 하는 얘기와는 격이 달라도 한참 다르다. 제목으로 적당한 것이 안 떠올라 이 말을 썼다. 내 마음대로 '어떤 일에 조금 익숙해진다'는 뜻으로 쓴 것이니 오해 없었으면 한다.

 

요즘 매일이다시피 아침을 먹고 나서 수락산에 가 세 시간쯤 지내다 온다. 오늘은 틀림없이 사람들이 많이 가겠기에 가지 않았다. 번잡스러움이 산에서 혼자 노는 맛을 빼앗기 때문이다. 그런데 며칠 전에 산을 오르내리면서 황홀감이라고 해야 할 기분을 느낀 적이 있다. 이 얘기를 좀 할까 한다.

 

나는 겁이 많기도 하고 걸음걸이가 이상해서 경사가 급한 곳을 내려올 때면 손을 짚는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내 걸음걸이에 대해서 간단히 얘기하고 넘어가는 것이 좋겠다. 이른바 팔자 걸음이다. 군대 가기 전에는 내가 어떻게 걷는지 몰랐다. 졸병이 건방지게 걷는다는 상관의 꾸중을 듣고서야 알게 되었다. 본격적으로 고치려고 해 보지는 않았지만 가끔씩 다른 사람처럼 걸으려고 하면 힘이 들어서 그냥 두어 버린다. '이렇게도 잘 살아왔는데 이제 와서 뭘' 하는 자포자긴지 자위인지 모를 핑계를 곁들이면서 말이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와서 다른 사람들이 발로만 사용해서 가볍게 내려오는 곳에서 나는 굼뜰 수밖에 없다. 어느 날인가부터 이런 내 모습이 창피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안 보이면 손을 짚지 않고 내려가는 연습을 하곤 했다. 당연히 몇 번 미끄러지기도 했다. 어떤 때는 바위 중간에서 내려가지도 다시 올라가지도 못해 땀을 흘리다가 겨우 구르다시피해서 내려간 적도 있다. 무모하다고 하지 말기 바란다. 산에 많이 다닌 사람은 익숙하게 다니는 곳이다.

 

그런데 며칠 전에 꽤 경사가 있는 길을 아주 가볍게 걸어 내려올 수 있었다. 나도 모르게 어느 순간에 일어난 기분이었다. 뭔가 숙달된 경지에 이른 것이다. 어떻게 이런 놀라운(?) 결과가 나올 수 있는지 하는 것에 대해 이리저리 생각해 보았다.

 

시간이 날 때마다라고 해도 좋을 만큼 산을 가까이 했다는 점을 들어야 할 것이다. 나도 모르게 이치를 몸으로 익힌 것이다. 어렸을 때 헤엄을 치게 된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이 좋겠다. 내 고향 제주도에는 아다시피 강이 없다. 그런데 여름이 되면 비가 많이 오니까 그동안 말랐던 냇가에 물이 고인다. 꽤 깊은 곳도 생긴다. 우리 마을은 바다와는 멀리 떨어진 곳이어서 거기에는 일년에 몇 번 갈까 말까 하고 주로 냇가에서 많이 놀았다. 큰 아이들은 깊은 곳에 들어가서 활개를 치며 노는데 헤엄을 못 치는 우리는 얕은 곳에서 그 아이들을 부럽게 바라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많이 놀다 보면 어느덧 헤엄을 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놀라게 되는 때가 꼭 있게 된다. 내게도 그랬다. 물이 내 몸의 일부처럼 느껴지고 두려움이 없어지는 것과 함께 일어난 것이겠다.

 

두려움이란 나를 둘러싼 세계를 믿지 못하는 데서 온다. 알지 못하니 믿을 수가 없다. 알아야 자기를 열 수 있다. 어떻게 알게 되는가? 뭐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는 없지만 끊임없는 되풀이가 그 답이 아닐까 싶다. 그러니까 되풀이는 내 의지만의 작용이라고 하기보다 나와 산 또는 물이 소통하는 과정이라고 하는 것이 그럴 듯해진다.

 

아닌게 아니라 급한 길을 손을 짚지 않고 내려온 다음부터 산은 나를 탄력있게 받아주는 것 같았다. 황홀한 느낌이었다. 어떤 분은 여기서 성적인 심상을 연상할지 모르겠다. 나로서는 그래 주면 반갑겠다. 사랑하는 사람과 하룻밤을 지낸 느낌과 비슷하다고 생각했으니까. 아무튼 내 발걸음을 그렇게 가볍고 상쾌하게 느낀 것은 처음이었다. 다음과 같은 말이 과장이 아니라는 점을 실감했다.

걷는 것은 자신을 세계로 열어놓는 것이다. 발로, 다리로, 몸으로 걸으면서 인간은 자신의 실존에 대해 행복한 감정을 되찾는다. 발로 걸어가는 인간은 모든 감각기관의 모공을 활짝 열어주는 능동적 형식의 명상으로 빠져 든다. (다비드 르 브르통, 김화영 옮김, <<걷기 예찬>>, 현대문학, 2002, 9쪽.)
이런 행복한 감정은 걷기만의 특권은 아닐 것이다. 짐작하건대 자유로운 상태에서 몸을 열심히 움직여서 자연과 만나는 일은 대체로 이런 기분을 자아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행복하다거나 황홀한 느낌은 자신의 능력을 믿는 데서 나오는 것이기도 하다. 그 능력이란 이제까지 내 안에 숨어 있던 것인데 자유로운 되풀이를 통하여 눈 앞에 볼 수 있는 모습으로 드러난 것이다. 이 능력을 확인하는 일을 다른 말로 하면 보람이겠다.

 

이렇게 쓰고 있자니 수락산이 내 애인이기나 한 것처럼 보고 싶다. 그러나 사람이 붐비지 않은 월요일까지는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 사람이 많이 보는 데서 사랑할 나이는 지난 것이다.

 

훈이네 집으로 가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