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박눈이 많이 왔던 날에 쓴 글
어제(2001. 12. 29)는 서울에도 꽤 많은 눈이 내렸습니다. 그것도 함박눈이었습니다. 오전에 하늘이 어두워지면서 조금씩 눈발이 날리더니 곧 함박눈으로 변하여 그야말로 펑펑 내리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하늘에 눈을 보관하는 무슨 창고가 있는데 그 바닥이 무너져서 마구 대책없이 쏟아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에 맞춰서 내 마음도 아이처럼 설레고요.
그래 딸 아이한테 눈 구경 가자고 했는데, 이런, 추운데 어딜 가느냐는 반문이 그 응답으로 돌아왔습니다. 또 한 사람의 식구는 감기 걸려 누워 있고 하니 나 혼자 나서야 할 판입니다. 눈이 오래 올 것 같으니까 오후에 나서기로 하고 하던 일을 마쳤습니다. 그런데 점심을 먹을 즈음에는 눈이 그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등산이나 하자고 생각해서 수락산 쪽으로 가는 지하철을 탔습니다. 거기는 오늘 내린 눈이 그대로 남아 있을 테니까 눈 구경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수락산역에 도착하여 지하철 역을 빠져나오는 계단을 오르자 함박눈이 내리는 것이 아니겠어요! 어찌나 많이 오는지 앞에서 걸어오는 사람들이 잘 안 보일 정도였습니다. 다시 집으로 되돌아올 생각으로 계단을 내려왔지요. 그런데 마음 한편이 허전한 거예요. 반쯤 내려오다가 다시 올라갔습니다.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입구까지만이라도 걸어야 될 것 같아서요. 마침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있었으니까 눈이 많이 오는데도 걸을 만했습니다.
토요일이라 평소 같으면 사람이 많을 텐데 뜸했습니다. 그래서 눈을 맞는 일이 더 좋았을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일은 고즈넉한 분위기에서 외롭게 해야만 되는 그런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혼자 온 것은 아주 잘한 일이었습니다. 눈은 끝이 없을 것처럼 내리고 나도 영원으로 향하기나 하는 길 위에 선 것처럼 내내 걸었습니다. 정말 내려올 일이 걱정되지 않았으면 하루 종일이라도 걷고 싶었습니다.
하강하는 함박눈은 공중에서 자유롭게 유영하는 모습 때문에 하늘로 올라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함박눈이 특히 우리를 고양시키는 것은 이런 성질 때문인 것 같습니다. 땅에 발붙여 살아야 하는 인간에게 지상을 초월하는 일의 자유로움을 한껏 보여 주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현실의 한계를 벗어난 것과 마주 서면 나도 나 이상의 어떤 존재로 된 듯한 느낌을 갖게 됩니다. 이런 느낌은 직접 눈을 맞아 봐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잠깐 동안의 자기 초월이랄까 이런 상태가 우리 마음을 깨끗하게 만들어 주는 것 같습니다. 눈이 오면 소원을 빈다는 것도 이해가 되었습니다. 소원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현재의 자기를 넘어서겠다는 의지를 표출하는 것 아닌가요!
산 입구를 벗어나서 한참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내내 올라갈 수는 없는 일입니다. 내려올 때 많이 미끄러울 일이 걱정되었습니다. 이렇게 나는 오래도록 낭만주의자가 될 수는 없는가 봅니다. 그래서 눈을 맞으면서 고양감에 들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안타깝지만 산을 내려왔습니다. 현실로 돌아온 것입니다.
집 가까이 있는 역에 내려서 본 도시의 길에는, 언젠가 물을 물 쓰듯 한다는 말을 들어 웃은 일이 있는데 그것을 본받아서 쓰면, 눈 녹듯이 눈이 녹아 버려 눈이 내렸던 흔적만 조금 남아 있을 뿐이었습니다. 오늘의 내 행로와 비슷했습니다. 환상처럼 꾸며졌던 하얀 세상이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온 것이니까요.
아무튼 눈이 내리는 날은 혼자 마냥 걸어 볼 일입니다. 우리에게는 가끔씩 현실을 벗어날 권리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