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식물성의 세계-신경숙의 <<바이올렛>>
먼저, 제목에 대해 시비를 걸고 넘어가자. 왜 '바이올렛'일까. 제비꽃이라는 예쁜 우리말이 있어서 하는 소리다. 두 가지 이유가 있기는 하다. 하나는 그리스 신화와 연관된 것이다. "서양 사람들은 바이올렛을 '이오의 눈'이라고 부르"는데 이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가엾은 여인"(신경숙, <<바이올렛>>, 문학동네, 2001, 153쪽)이다. 바이올렛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작품의 주인공 오산이도 가여운 처녀다. 둘째는 영어 사전에서 violet 근처에 나오는 단어들과의 연관성을 드러냄으로써 작품이 얘기하고자 하는 것을 강조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
바이올렛. 그녀는 생각이 난 듯 사전을 들고 온다. 사전의 얇은 종잇장을 일일이 넘기던 그녀의 시선이 바이올렛 근처에서 헤매다닌다.violet. 식물, 제비꽃, 보랏빛, 신경질적인 사람, 수줍어하는 사람
violin. 바이올린, 바이올린 연주자
violence. 격렬, 맹렬, 폭력, 난폭
violator. 위배자, 방해자, 모독자, 능욕자사전을 들여다보던 그녀의 표정이 점점 곤혹스러워진다.(184-5쪽)
이들 단어들은 사전에 가까이 있어서라기보다는 구조주의 언어학에서 말하는 수직적 관계에 있다는 점을 드러내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선택된 것이다. 특히 뒤의 두 단어는 '바이올렛'이 표상하는 가여운 식물적인 세계와 정면으로 대립하는 세계를 대표하고 있다. 따라서 이런 맥락에서 보면 '바이올렛'이라 제목을 단 것을 이해 못할 것은 없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런 것들을 빼 버린다고 해도 의도하는 바를 드러내는 데는 큰 문제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작품의 핵심과 관련되기는 하지만 주변적인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말로 제목을 삼지 않은 결정적인 이유는 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이 작품을 이루는 두 개의 축은 앞에서 이미 말한 대로 바이올렛으로 대표되는 식물성의 세계와 그것을 파괴해 버리는 동물적인 힘이다. 먼저 식물성의 세계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가장 먼저 얘기해야 할 것은 오산이의 마음 속 깊이 간직되어 있는 고향 마을의 미나리 군락지이다.
봄이 되어 야생 미나리가 진흙 속에서 푸른 줄기를 돋워내기 시작하면 마을은 마치 초원을 끌어안고 있는 것 같았다. 독특한 향을 풍기며 미나리가 왔다가 가고 나면 마을 사람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아도 두엄이나 닭똥을 미나리지에 뿌려주었다. 칠월이 지나 팔월쯤에 미나리 줄기에 흰 꽃이 피기 시작하면 푸른 미나리 군락엔 눈이 내린 듯하였다. 바람에 미나리 흰 꽃이 일제히 흔들릴 때면 종소리를 듣는 듯하였다. 미나리가 살이 찔 무렵이면 타지 사람들도 장화를 신고 마을로 건너와 미나리 줄기를 꺾어갔다. 간혹 거머리가 붙어 있어도 줄거이 미나리를 꺾어갔다. 초파일이 되면 인근의 절 사람들도 마을로 내려와 미나리를 꺾어갔다. 첫돌을 맞이한 아이들의 돌상에 그 군락지의 미나리는 수명이 길라는 뜻으로 데쳐져 오르곤 했다.(233-4쪽)
한마디로 인간과 자연이, 또 인간들끼리 친밀한 관계를 맺는 곳이다. 이 소설은 이런 세계가 아파트가 들어서고 경지 정리가 됨으로써 사라지고 만 것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던 세계가 파괴되는 슬픈 모습을 그리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둘째는 오산이가 성 폭행을 당하고 사라지기 전에 일했던 화원과 그 화원 주인이 가꾸는 농원의 세계이다. 이 세계는 앞서 보았던 어린 시절의 미나리군락지의 확대판이자 구체화라고 할 만하다.
꽃 가꾸는 일이 손에 익어갈수록 식물의 주는 위로가 있다. (중략)
화원 안에서의 느낌은 여전히 거리에 나와 있는 듯하지만 식물을 돌보는 일은 즐거웠다. 식물들의 초록빛은, 그녀에게서 이미 희미해진 꿈 조각이나 실타래같이 엉킨 기억들까지 일깨워주려는 양으로 곧잘 푸르게 웃자라곤 했다. 식물의 뿌리를 분에 심어준 날 밤이면 그녀는 잠을 못 이루기도 했다. (중략) 어둠 속에서 낮에 분에 옮겨심어준 식물의 뿌리들이 새 자리를 잡느라 후, 후, 숨을 내뿜는 소리가 귀에 들려오는 것만 같아 그녀는 수없이 뒤척이곤 했다.(93-4쪽)
식물은 사람을 위로해 주고 사람은 식물의 성장을 기뻐하고 걱정해 주는 사랑의 관계가 이루어지는 곳이 화원이다. 낭만주의자들이 강조하는 유기적 세계라고 해도 좋다. 농원은 더 그렇다. 이곳은 '바이올렛'이 표상하는 세계를 대표하는 곳이기도 하므로 조금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농원에는 상식적인 의미의 가족 구성원이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은 이 농원뿐만 아니라 '바이올렛'을 상징하는 것들은 다 일상적인 가족의 관계와 무연하다. 가족은 해체되거나 가족이 존재하는 경우에도 오산이가 살았던 집 주인 가족이 그러하듯이 갈등이나 폭력을 안고 산다. 그곳에 임시로 살았던, 음악을 하고 싶어 하지만 부모의 반대로 집을 나오고 급기야 자살을 하려고 하는 청년의 경우도 이 가족의 부정적인 성격을 잘 드러내 주는 예라고 하겠다. 아버지가 떠난 후 여러 남자를 따라다니다가 나중에는 돌보는 사람도 없는 채 외롭게 죽어가는 오산이의 어머니야말로 이제는 가족이 삶의 보호막이 되어 주지 못한다는 점을 극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농원으로 돌아와서, 가족 대신에 제시되는 것은 피붙이가 아닌 사람들의 일체감 내지 공동체이다.
사십 피트짜리 컨테이너에 실려온 가지마루는 천백 개였다. 원산지에서 실려온 가지마루는 잎사귀 하나 없이 몸통뿐이다. 일일이 하나씩 조심스럽게 내리지 않으면 나무가 상처를 입는다며 수애가 그녀에게 주의를 준다. 후야와와 나당(외국인들-인용자)과 수애의 움직임은 일체감을 이루고 있다.(141쪽)
농원일이 처음인 그녀만 손길이 더딜 뿐 수애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은 척척이었다. 누가 따로 지시하고 어쩌는 것도 없이 그들은 한 공동체처럼 움직였다. 청년과 함께 외부로 나갔던 농원 주인 남자가 합세했을 때 그들의 나무 심는 일은 최고조로 진행되었다.(147쪽)
이른바 즐거운 노동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고용 노동이지만 누가 지시하지도 않고 스스로 알아서 한다. 마음 깊이에서 우러나는 자발성의 세계인 셈이다. 여기서도 낭만주의와의 유사성이 도드라진다.
전연 관계가 없었을 사람들이 같이 어우러지는 세계라는 점은 이미 말한 것이지만 식물마저도 외국에서 들어온 것이라는 점은 지적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겠다. 서로 다른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인도네시아에서 가지마루에 섞여"서 온 두 개의 씨앗에서 나온 두 그루의 파파야 야자수도 "신기하"게도 "지들끼리" "나란히 서서" "꼭 친구 같"이 자란다(133-4쪽). 식물만이 그러는 것은 아니다. 상처가 난 고양이도 이 농원에 숨어 들어오고 나서는, 원래 고양이를 무척 싫어하는 주인이 멀리 가서 버려도 다시 찾아온다. 거기다가 새끼를 배고 있다.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태어나고 자라나는 행복한 세계이다.
이런 세계는 어떻게 가능한가? 단적으로 그것은 남을 배려하는 마음에서 나온다. 농원 주인의 조카인 수애는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가 삼촌만큼 깊은 사람은 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146쪽). 그는 아기 때 농원 앞에 버려진 청년과, 채 두 살도 안 됐을 때 그 어머니가 죽어버린 조카 수애를 키운다. 그런데 수애는 어머니가 일찍 돌아간 것이 상처가 되어 복수한다는 생각으로 "인생을 망치기로" 하여 가출을 감행하지만 "삼촌이 지치지도 않고" 그녀를 "계속 찾아다닌"다. 결국 삼촌은 그녀로 하여금 "인생을 망치기도 쉽지 않"다는 고백을 하도록 만든다(79-80쪽).
그런데 이 삼촌은 남의 말을 들을 수는 있지만 말은 못하는 사람이다. 사실 '바이올렛'을 상징하는 사람들은 말을 아끼고 깊은 내면을 간직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삼촌의 변형이라고 해도 좋다. 반대 쪽 사람들이 함부로 말하고 폭력을 휘두르는 것과 결정적인 대조를 이루는 성질이라고 할 수 있다. 주인공 오산이도 글 쓰기를 좋아한다는 점에서 내면의 인간이다.
그녀에게 글을 쓴다는 것은, 그 글 속으로 그녀 자신이 숨는 일이었다. 그녀는 본격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 되는 것이 최종적인 꿈이다. 그럴 기회가 온다면 감사하게 여길 것이다. (중략)
그녀는 그런 널찍한 방과 널찍한 탁자를 가지고 글을 쓰고 있는 자신을 생각할 때, 그때만큼은 어쩌면 인생은 살 만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가지곤 했다. (중략) 만년필 뚜껑을 닫고 노트 위의 푸른 글씨 위에 내려놓고 있다. 노트 때문일까. 문장 때문일까. 온종일 그녀의 얼굴에서는 발견할 수 없었던 즐거운 빛이 잠자리에 드는 그녀의 얼굴 위에 번져 있다.(69쪽)
아마 글 쓰기는 주인공 오산에게 단 하나 남은 진정성의 세계일 것이다.
'바이올렛'과 반대의 성질을 가지면서 그 세계를 파괴해 버리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쪽에 대해서 살필 차례다. 먼저, 오산이의 "공허한 마음을 어떤 격렬함으로 속으로 이끌어 갔던 그 남자"(123쪽)부터 보자. 우선, 맨 앞에서 방금 본 '격렬'이 violence 즉 폭력과 동의어로 내세워진 점을 상기하자. 그는 사진기자인데 오산이가 일하는 화원에 바이올렛을 찍으러 와서는 그 꽃을 보이자 "잔뜩 이마를 지푸린다."(119쪽)
그 남자는 카메라 셔터를 누르면서 뭐가 불만인지 계속 중얼거리고 있다.시각을 우선시하는 사진기자를 내세운 것 자체가 의미심장하다. 앞에서 식물성의 세계가 표상하는 것이 내면이라고 얘기한 바 있다. 내면성에 대립되는 것이 외면만을 보는 시각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남자가 우연히 두 번째 해후하였을 때 그의 동료들 앞에서 오산이의 눈썹이 아름다왔다고 갑작스럽게 고백하는 것은 그럴 듯한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헤어지면서 하는 행동도 돌발적이기는 마찬가지다.
"이 꽃이 뭐가 예쁘다는 거지? 이런 순 엉터리."
그 남자가 너무 실망하자 그녀가 미안해진다.
(중략)
"아니 이꽃을 어떻게 표지로 하지? 꽃 생긴 건 생각도 않고 내 사진 탓만 할 거 아냐!"(120-1쪽)
카페 앞에서 각자 작별인사들을 할 때이다.
그 남자가 손을 뻗어 그녀의 팔에 내려놓는다. 이 여름 밤 순간적으로 그녀의 팔 위에 소름이 오소소 돋는다.
"추운가보군."
그 남자가 그녀의 팔을 쓸어내리는 통에 오소소 돋았던 소름들이 그의 손바닥에 쓸려진다.(159쪽)
그리고 헤어졌다가 바로 다시 돌아와서는 사랑해도 되느냐고 묻는다. 남자로서는 나중에 오산이를 몰라 볼 정도로 아무렇지 않게 해 본 소리에 지나지 않는데 오산이는 짝사랑의 격렬함 속으로 빠져 든다. 오산이의 대책없는 짝사랑이야말로 식물성의 세계에 대립하는 힘이 얼마나 강렬한가 하는 점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예가 된다. 한마디로 그 힘은 벌거벗은 욕망이다. 여기에서는 진정한 사랑이 필수적으로 요구하는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오랜 시간 동안의 숙성 과정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드의 즉각적인 충족만이 필요할 뿐이다.
또 한 사람은 화원에 자주 드나들면서 그 전에 화원에서 일하던 여자와 만나더니 그 여자를 "어느 날부터인가 그만 둔다고도 안 하고 그냥 안 나오"게 만든 적이 있는 최라는 남자다. 그는 결국 오산이를 유린하고 만다.
최의 손은 거침없이 그녀의 가슴을 찾아 쥐고 있다. 최의 입술이 그녀의 입 속을 비집고 들어오고 있다. 그녀의 어떠한 저항도 힘이 센 최에 의해서 제지당한다. 그녀, 어는 순간 고갤 떨구어버린다.(269쪽)
이렇게 그의 폭력은 어떤 저항도 이겨낼 만큼 거침이 없고 강렬하며 짐승스럽다. 식물적인 것들이 견뎌 낼 수가 없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오산이가 그 남자를 애타게 기다리면서 바이올렛을 심었던 자리는 어딘지조차 짐작이 되지 않는다고 서술자는 말하고 있다. 그만큼 바이올렛은 폭력 앞에 쉬이 무너질 정도로 연약하다.
이제 거칠게나마 대립하는 두 세계를 살펴본 셈이다. 대립이라고 하였지만 실상은 어느 한편이 일방적으로 유린당하는 세계라고 하는 것이 옳다. 이 소설이 구체적인 지명을 이야기하면서도 사회, 역사적인 현실을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인상을 주지 못하는 것은 이런 점과 관계가 있다. 바이올렛으로 표상되는 긍정적인 현실은 아주 가냘프게만 겨우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 낭만주의와의 유사성을 거론한 바 있지만 낭만주의자들은 부정적인 현실의 압도적인 힘 때문에 현실 밖의 이상 세계를 추구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현실에 대한 강렬한 부정에서 출발했는데도 나중에는 현실과의 연관성을 완전히 몰각하는 일도 일어났다. 신경숙에게도 그럴 가능성이 다분해 보인다. 그것을 작가의 책임으로만 돌리는 것은 옳지 않을 것이다. 현실에 긍정적인 힘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발견할 수 없었다고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독자는 책을 놓고 나서도 답답하고 막막하다. 이 무서운 폭력의 현실을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