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진강 도보 여행 4: 구례에서 하동까지(2. 25)
오늘(2006. 2. 25)은 다른 때보다 일찍 일어나서 7시에 출발했다. 구례에서 하동까지 35Km 정도가 될뿐더러 집에 가는 차를 타자면 하동에 빨리 도착해야 하기 때문이다. 여관을 나서는데 아직은 완전히 밝지 않은 상태다. 어제 저녁에 미리 오늘 아침과 점심으로 때울 빵은 사 두었다. 일찍 나서면 아침을 못 먹을 수 있고, 또 작은 길에는 마땅히 점심을 사먹을 데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운이 참 좋다. 김밥집이 문을 연 게 아닌가. 지난번에 하동에서 진주로 갈 때도 김밥집 덕분에 밥을 거르지 않게 되어 앞으로는 김밥집을 많이 이용하리라 다짐했는데 벌써 보상을 톡톡히 받는 셈이다. 많이 사먹어 줘야 문을 닫지 않고 장사를 하게 된다. 걸어다니다 보면 폐업한 식당이 아주 많다. 가다가 길에서 먹을 생각으로 김밥 두 줄을 사고 걷기 시작한다.
오늘은 안개가 끼고, 바람이 불어 좀 춥다. 열심히 걷는다. 그런데 하동으로 가는 길은 곡성에서 구례로 올 때와 같이 두 개다. 이번에는 반대로 강 왼편에 19번 국도가 있고, 오른편이 861번 지방도로다. 물론 나는 후자를 골랐다. 읍내를 빠져나와 군부대를 지나자 문척교라는 다리가 나온다. 섬진강인 것이다. 다리를 건너니 이번 여행에서 잔뜩 맛을 들인 강둑길이 나온다. 몇 번의 경험으로 길은 길에 이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무조건 강둑길(사진 1, 사진 2, 사진 3)로 올라선다. 잔디가 깔려 있어 푹신푹신하다. 해가 뜨기 전의 강과 산은 신비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아름답다. 신선들이나 사는 곳 같다. 사진을 보니 그림 같지 않은가? 물론 실제로 보는 풍경은 사진보다 훨씬 더 아름답다. 한 시간 정도 가니 아쉽게도 둑길은 끝이 난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본격적인 861번 지방도로다. 벚나무가 가로수로 보기 좋게 잘 자라고 있다(사진). 이 나무는 하동에 이르기까지 거의 전구간에 걸쳐 심어져 있다. 여기다가 이쪽에는 매화마을이란 데가 있을 정도로 매화를 많이 키우고 있으니 이 도로야 말로 봄의 길이라고 할 수 있겠다. 꽃이 활짝 필 때쯤이면 장관을 이룰 테니 나는 거기로 다시 가고 싶어 환장하게 될 것이다. 꽃이 결들여지면 강의 아름다움도 더할 것이다. 정말이지 나는 도보 여행가가 되어야만 할 것 같다.
매화는 아직 꽃을 피우지 않았다. 아주 가끔씩 그것도 나무 전체가 아니라 가지 끝에만 피어 있는 정도다. 과수원이 있을 정도로 나무가 많은데도 꽃을 피운 것은 몇 그루가 안 된다. 전에도 말은 들은 것 같은데 이번에 실제로 보고서야 꽃망울의 색깔에 따라 청매화와 홍매화가 구별된다는 것을 알았다. 대개는 홍매화인데 청매화가 좀 일찍 피고 꽃도 더 예쁜 것 같았다(매화 사진들: 사진 1, 사진 2, 사진 3, 사진 4, 사진 5, 사진 6, 사진 7).
몸과 마음은 통하는 것이 틀림없다. 오늘 마친다고 생각하니 몸이 알아채서 이제까지 아무 이상이 없었던 넓적다리의 근육-아파서야 있는 줄 안다. 그러니 어디가 불편하면 알아달라고 호소하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라 여겨야 한다-이 몹시 땡겨 절뚝거리지 않고서는 걸을 수 없을 정도가 되어 버린다. 마음이 몸에게 그걸 못 참느냐고 화를 낸다. 무슨 문학적 수사로 읽지 말기 바란다. 걷다 보면 내 몸의 구성 부분은 저마다 독자적인 주인으로서 행세하는 것같이 여겨진다. 어느 하나만 잘못되거나 이른바 태업을 해도 움직일 수 없게 되니 다 저마다 주인공이 아닌가! 이렇다면 '나'라는 존재는 뭔지 모르지만, 다리나 허리와 같은 구성원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도 있다. 좀 어려워지는데, 쉽게 말하면 다리나 발은 '나'를 구성하는 종속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뜻이다. 걷다 보면 몸의 구석구석이 소중하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하여 나 자신도 모르는 얘기를 한다고 이해하기 바란다.
그런데 나는 초보자인 것이 아주 확실하다. 걷기의 대가가 다음과 같이 얘기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제 걷는 것에는 큰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됐다. 건강한 사람들이 대개 그러하듯 원기왕성한 보행자들은 배은망덕하게도 자신의 신체기관에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베르나르 올리비에, 임수현 옮김, <<나는 걷는다 1>>, 효형출판, 2003, 158쪽)
특히 순례자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하루 평균 30킬로미터를 걷는 것이 단련이 되면 육체의 개념 자체가 무화되곤 한다. 거의 모든 종교에서 순례의 전통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몸의 단련을 통해 영혼을 고양하는 일이다. 발은 땅을 딛고 있지만 머리는 신神 가까이에 가 있다고 할까. 보이오티아인들이 굳게 믿었던 걷기의 지적인 측면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이런 경험을 해 보지 못한 사람들은 흔히 걷는 것을 고통스럽다고 생각한다. 마조히즘이나 종교적인 이유로 자갈 위를 무릎이나 맨발로 걸으며 스스로 고문하는 사람들에겐 그럴 수 있다. 그러나 하루 30킬로미터 범위 내에서라면, 걷는 것은 기쁨이며 부드러운 마약과도 같다.
홀로 외로이 걷는 여행은 자기 자신을 직면하게 만들고, 육체의 제약에서 그리고 주어진 환경 속에서 안락하게 사고하던 스스로를 해방시킨다. 순례자들은 아주 긴 도보 여행을 마친 후엔 거의 예외 없이 변모된 자신의 모습을 느낀다. 이는 그들이 그토록 오랫동안 스스로를 직면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발견할 수 없었을 자신의 일부를 만났기 때문이다.(위의 책, 188-9쪽)
참고로, 이 책의 지은이는 예순두 살의 나이에 이스탄불에서 시작하여 중국의 서안에 이르는 12000킬로미터의 비단길을 1099일 동안 걸었다. 4년 동안 봄부터 가을까지 걷고 나머지는 쉬었다가 다시 계속했던 것이다. 몸과 마음이 다 자유의 경지에 올라선 이다.
나는 아직 시작의 단계에도 이르지 못한 것이다. 늘, 지치고 아프다는 타령을 하고 있으므로..... 처음부터 잘할 수는 없으리라. 그 주체가 몸인지 마음인지 모르나 아무튼 참으니까 걸을 만하다. 그래도 버스가 지나가면 타 버릴까 하는 유혹을 물리치기 위하여 애를 쓴다. 이번의 섬진강 도보 여행에서는 이틀째인 운암대교에서 순창에 갈 때 저녁이 되어 한번 버스를 탄 것밖에는 없는데 대낮에 부끄럽게 차를 탈 수 없다는 생각이 유혹을 이기게 한다. 차가 없는 길의 한적함과 강의 아름다움도 내 결심을 거든다.
4시쯤에 하동에 도착했다. 거의 9시간 동안 걸은 셈이다. 구례로 가는 버스를 탔는데 버스는 내가 걸어온 길의 맞은편 길(19번 국도)로 간다. 차창으로 보는 강의 풍경은 도무지 못 봐주겠다. 휙휙 스쳐지나는데 무슨 감흥이 일어나겠는가! 빨리 가면 현장이 없어진다. 아마 현재라는 시간도 재빠르게 지나가 버릴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미래를 위한답시고 소중한 현재를 희생해 버리는 것이 아닐까?
자연의 아름다움은 느림과 같이갈 것만 같다. 아마도 몸으로는 걸음이, 마음으로는 여유와 자유가 이 느림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느릿느릿 현재를 위하여 살자. 이것이 이번 섬진강 도보 여행의 결론이다.
<사진 몇 장>
빈집, 재첩, 섬진강 1, 섬진강 2, 섬진강 3, 섬진강 4, 섬진강 5, 섬진강 6, 섬진강 7, 섬진강 8, 섬진강 9, 섬진강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