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난 길

위하여, 대하여(관하여), 불구하고, 경우

귤밭1 2006. 4. 21. 08:07

<<한겨레>>의 금요일판 '책과 지성'은 작은 책이다(여기를 보세요). 좋은 글들이 잔치를 벌인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오늘은 한겨레말글연구소장 최인호가 연재하는 '말글찻집'에 실린 기사 몇 꼭지를 소개하고자 한다(여기도 꼭 보세요). 하나하나 줄을 치면서 읽으면 자연스러운 우리말을 쓰는 데 큰 도움을 받을 것이다.
 

‘위하다’는 예부터 써 왔다. 사람·사물을 받들거나 이롭게 하고자 할 때 썼다. 그런데, 요즘 자주 쓰는 ‘위(爲)하다’는 말·글에서 ‘위하는’ 구실보다 ‘해롭히는’ 구실을 할 때가 많다. 보통 ‘-하기 위하여, -를 위하여, -를 위한’ 꼴로 쓰이는데, 그 쓰임을 살펴보자.

 

“특수목적 회사는 유동화증권 발행을 위해 만든 서류상 회사다.”

 

여기서 목적어를 ‘유동화증권 발행’으로 잡았는데, 이보다는 ‘유동화증권’이어야 자연스럽다. 손질하면 “특수목적 회사는 유동화증권을 발행하기 위해 만든 서류상 회사다”가 된다. ‘발행하기’는 ‘발행하다’를 명사화한 쓰임인데, 좀 나아졌지만 아직 ‘위해’를 달고 있다.

 

대체로 ‘-기 위해’는 의지를 가진 씨끝 ‘-고자, -하려고, -하도록’을 쓰면 간단해진다. 그래서 “특수목적 회사는 유동화증권을 발행하고자 만든 서류상 회사다”가 된다.

 

‘위하다’는 전통적인 말법을 빼면 제목·법·단체 이름 등 말을 극히 줄여 쓸 때나 쓸모가 있을 뿐, 보통 글에서는 ‘부림마디, 매김마디, 어찌마디’를 길고 복잡하게 두는 폐단이 있다. 또한 한자말을 여럿 잇대어 붙이기도 하고, 입말을 글말로 바꾸며, 걸맞고 적확하게 쓰일 풀이말을 사장시키는 구실도 한다.

 

“환율방어를 위해 달러를 사들이는 과정에서 과도하게 풀린 통화량을 조절하기 위한 목적 등으로 통화안정 채권과 외국환 평형기금 채권을 발행한다.” 여기엔 ‘위해·위한’이 두루 보이는데, 이는 월을 둘로 나눠 쓰면 간명해진다. 다른 말에 손을 덜 댄다면 “환율을 방어하려고 달러를 사들이는 과정에서 과도히 풀린 통화량을 조정할 목적으로 통화안정 채권과 외국환 평형기금 채권을 발행한다” 정도로 다듬을 수 있겠다.

 

‘위하여’꼴이 많이 쓰이게 된 데는 영어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숱한 영어 익은말(in order to, so as to, with a view to, in the cause of, for the cause of, for the sake of, for the benefit of, for one’s sake, in the interests of …)들을 ‘-하기 위하여, -를 위해, -를 위한’으로 익히고 써버릇한 까닭이다.

 

△학벌지상주의 극복을 위하여 → 학벌지상주의를 극복하려면 △의뢰자들은 대부분 초·중·고교생 자녀를 조기유학시키기 위해 이민을 신청했는데 → ~ 자녀 조기유학 관계로 이민을 신청했는데 △신자유주의는 더 많은 일자리를 약속하지만 그러한 삶의 조건을 갖추기 위해 우리의 삶이 더 망가지게 되어 있다 → ~ 그런 삶의 조건을 갖추자면 ~.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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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관(關)해, -에 대(對)하여’ 따위가 들어가지 않으면 말글이 안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20세기 이전엔 거의 찾아볼 수 없고, 그 후반 들어 많이 나타나는 것을 보면 연유를 대충 알조다. 말이 안 되는 지경이란, 그만큼 많이 쓰기도 하고, 이를 쓴 문장을 손질할 때 피를 봐야 할 정도로 들러붙었다는 말이다. 그것이 들어가 말을 어지럽히고 군더더기를 만드는데도 아무데나 쓸데없이 많이 쓰는 게 문제다. 이 두 가지는 뜻차이 없이 서로 넘나들며 쓴다.

 

이 말이 많이 쓰이게 된 연유는 두어 가지다. 먼저 일본말(-に 關して, -に 對して) 영향이다. 특히 일제 행정·법률 문서를 그대로 베껴 쓰면서 쉬를 슬기 시작했다. 여기에 광복 뒤 줄곧 영어 영향이 더한다. 곧 갖가지 꼴의 영어(for, as regards, as to, as for, in regard to(of), with regard to, in respect of, with respect to, as respects, about, concerning, regarding …)를 마냥 ‘-에 관해, -에 대해, -에 관해서는, -에 대해서는” 따위로 가르쳐 버릇하고 배우며, 이를 번역문 아닌 보통 말글에서도 써댄 결과다. 요즘은 ‘-에 관한’보다 ‘-에 대한’ 쪽이 더 잦은 편이다.

 

예컨대 “다음 물음에 관해 답하시오. 평화에 대해 갈망하다, 달러에 대한 원화 환율, 누구누구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하다”가 아니라 “다음 물음에 답하시오. 평화를 갈망하다, 원-달러 환율, 누구누구의 구속영장을 청구하다”면 될 터이다.

 

△이 물건이 쓸모가 있는지에 관해 논의하고 있다 → 이 물건이 얼마나 쓸모가 있는지 논의하고 있다. △이 이슈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할말이 없다 → 이 이슈를 두고는 아무 할말이 없다 △무엇에 대해 알고 싶은가 → 무엇을 알고싶은가 △아시아 다른 나라들의 미사일방어 계획에 대한 태도에 대해선 ~ → 미사일 방어계획을 다루는 아시아 다른 나라 쪽 태도 분석에서 △하원 인권 코커스에 대해 간단히 소개해주시죠 → 하원 인권위원회를 간단히 소개해주시죠 △최근 들어 많이 다루는 주제는 북한 난민들에 관한 것입니다 → ~ 북한난민 얘기입니다 △이에 대해 → 이에 △여성의 사회적 지위에 관하여 토론하도록 하겠습니다 →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주제로 토론하겠습니다

 

문장을 손질할 때 스스로 마음만 먹으면 상당수 군더더기들을 털어낼 수 있다. 최선은 글을 쓸 때부터 아예 이런 말을 쓰지 않는 것이다.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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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이어갈 때는 이음씨끝을 붙여 이음마디를 만들고서 뒷마디를 따라붙이는 게 보통 방식이다. 이음씨끝 가운데 ‘-지만·-언만, -은데도/-는데도/-ㅁ에도, -으나, -기로, -거늘 …’ 들은 앞마디에서 어떤 조건을 들추고 그것이 마땅히 사실로 인정되는데도 뒷마디에서는 이를 뒤집고 다른 사실을 들추는 구실을 한다. 입말에서는 물이 덜 들었으나, 연설문·신문글을 비롯한 실용글에서는 군더더기를 끼워 호흡과 말의 자릿수를 늘리는 현상이 뚜렷하다.


뜻을 드세게 하고자 ‘간에·불구하고’를 넣어 쓰는 현상이 그렇다. 주로 ‘-에도 불구하고, -ㄴ데도 불구하고’ 따위로만 쓰이는데, 전날에는 ‘물구(勿拘)하고’도 썼으나 이는 앞에 목적어를 둔 쓰임이었다.(부인 동포들은 다소를 물구하고 혈심의연하와 …)

 

예삿소리 대신 된소리·거센소리가 들어가 쓰이는 경우, ‘대다·먹다·제끼다·젖히다’ 따위 도움풀이씨, 뒤집는 구실을 하는 이음씨끝들을 힘줌말로 본다. 아울러 ‘-에도 불구하고’처럼 쓰는 이은말들도 힘줌말로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이는 자릿수만 늘릴 뿐 강조나 호흡조절 효과를 찾기가 어렵다. 그나마 ‘불구(不拘)하고’를 놓을 자리는 ‘돌보지 않고, 매이지 않고’처럼 타동사로 쓰일 때이다.(염치를 불구하고, 교사 신분임을 불구하고 …)

 

오늘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 따위가 두드러지게 쓰이는 까닭은 일본말 영향에 더하여 영어(in spite of, for all, though, although, despite of, disregarding, nomatter, for all that, with all, never the less, none the less) 이은말·낱말이 든 문장을 상투적으로 ‘-에도 불구하고’로 박아 써 버릇한 탓으로 본다. 많이 굳어진 까닭에 쓰지 않으면 허전한 지경에 이르렀으나 마땅히 적절한 이음씨끝으로 써야 말이 가지런해지고 품위가 선다는 말이 나온다.

 

△수출 호조에도 불구하고 기업투자는 여전히 정체돼 있다 → 수출은 잘되지만 ~. △정부의 강력한 보급확대 정책에도 불구하고 → 정부에서 보급 확대 정책을 강력히 펴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때로 믿을 수 없고, 앞뒤가 안 맞고, 자기 중심적이다 → 그런데도 사람들은 ~. △국제 팔라듐 가격이 기록적인 상승폭을 유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는 팔라듐 생산을 증산할 계획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 팔라듐값이 기록적인 상승폭을 보이는데도 러시아는 ~.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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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우(境遇), 경위(涇渭)는 같은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사리나 도리 또는 그것을 가리는 힘’을 일컬을 때 그렇다. 경위(經緯)는 ‘날줄·씨줄’에다 ‘일의 앞뒤 됨됨이’를 가리킨다.

 

‘경우가 밝은 사람’ ‘경우에 어긋나는 행동’ ‘그런 경우가 어딨냐’에서 ‘경우’는 ‘경위’(逕渭)로도 쓸 수 있다. ‘경위서·경위를 밝히다’에서는 경위(經緯)가 된다. 전통 국어사전에서는 ‘경우’와 ‘경위’가 섞갈려 쓰이면서 ‘경우’에 ‘이치·도리’란 뜻이 덧붙어 쓰이는 것으로 보는데, <표준국어대사전>은 ‘경우’의 첫째 뜻으로 ‘사리나 도리’라 풀고 있다.

 

요즘은 이런 쓰임조차 잘 보이잖고 “그 경우, -의 경우, -ㄴ(-은·-는) 경우, -ㄹ 경우”로 써댄다. “만일의 경우, 최악의 경우, 대개의 경우, 이런 경우, 비가 올 경우 …” 들이 그렇다. 그 까닭은 뭔가?

 

우스개로 한상범 님(헌법학) 말을 한마디 딴다. “민사소송법의 대가로 통했고 대학 교수와 대법원장을 역임한 이아무개는 동경대학 교수 가네코 하지매의 책을 번역하면서, 우리말로 ‘경우’라는 뜻의 일본말인 ‘장합’(場合)을 그대로 한자 ‘장합’(場合)이라 옮겨 수험생들이 ‘장합’이란 법률용어가 무엇인지 몰라 쩔쩔매게 했다.”(내가 겪은 격동 60년)

 

일본말 ‘-の 場合’을 ‘-의 경우’로 번역하면서 ‘-ㄴ 경우, -ㄹ 경우’ 들로 급속히 번져 쓰게 됐으며, 이는 또 영어(case, in case, an occasion, time, circumstances, conditions, situation, an instance)를 마냥 ‘경우’나 ‘-의 경우’ 로 공부한 까닭에 어른아이 가리지 않고 쓴다.

 

사실 ‘-의 경우’가 아예 필요 없거나(만일의 경우, 대개의 경우 → 만일, 대개), 이음끝으로 쓰거나(비가 올 경우, 실패할 경우 → 비가 오면, 실패하면), 주격토 ‘은·는’으로 바꿔(전자의 경우 → 전자는·앞은) 쓰면 자연스럽다. ‘경우’를 ‘때’로 바꾸는 것도 좋은 방식이다.(최악의 경우, 저런 경우 → 최악일 때, 저런 때)

 

△조정규정 제3조 제1항에 의거하여 도메인이름 분쟁조정 신청서를 제출하는 경우에는 별지 1호의 서식을 따라야 한다. 법인의 경우에는 법인등기등본과 대표자 주민등록등본, 개인인 경우에는 주민등록등본 등 → 조정규정 제3조 1항을 근거로 도메인 이름 분쟁조정 신청서를 낼 때는 별지 ~. 법인이면 법인등기등본과 ~, 개인은 주민등록등본 등. (원문)

조금만 신경 쓰면 보기 좋은 글이 된다. 잘 때를 빼고-꿈도 말로 꾼다고 하니 사실은 자면서도 말을 쓰고 있다!-는 늘 함께하는 것이 우리말이니 고마워서라도 예의를 차려야 한다. 물론 그 예의의 핵심은 제대로 쓰는 것이다. 우리말을 사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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