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원래 오늘(2006. 6. 30)쯤 도보 여행을 시작하려고 했는데 날씨가 방해하네요. 4일과 5일에는 목포에서 강의가 있으니까 그걸 마치고
나서야 떠날 수 있을 것 같네요. 짐을 다 꾸린 배낭에게 미안한 마음이 드는 시간입니다.
중국에는 잘 다녀왔습니다. 떼거리-같은
학부의 선생들이 일행이었습니다-로 안내자를 따라다니는 것이라 여행이라 할 수도 없었습니다. 만리장성만 하여도 아무리 못해도 하루쯤 시간을 들여
실제로 걸어 봐야 제격인데 아주 잠깐 케이블카를 타고 둘러보는 것으로 끝냈으니 말이 아니지요. 자금성도 걸어서 그냥 가로지르는 데만 한 시간쯤
걸리니까 조금 찬찬히 보려면 도대체 얼마의 시간이 들지 가늠이 되지 않는 곳인데도 한 시간 반 정도로 구경을 마쳤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얘기해야
할 여행 소감이랄 것도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 저 벤야민의 "문명의 기록치고 야만의 기록 아닌 것이 없다"는 말은 충분히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자금성에 대면 우리 경북궁은 건물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아무것도 아니지만 이 조그만 규모야말로 조선 왕조 체제의
인간다운 품위 같은 것을 간직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도무지 불가능했을 것 같은 대규모의 성과 집을 짓기 위하여 필요했을 이름
없는 민중의 피와 땀을 떠올리면 끔찍한 바가 있습니다. 실제로 만리장성 쌓는 데 동원되면 거의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다고 합니다. 거기다가 그
주검도 그냥 성의 일부로 묻혔을 뿐이지요. 저렇게 높은 산을 둘러가며 견고한 상을 쌓아도 외적의 침입이 아니라 내부의 갈등 때문에 진나라가
망했다니 이런 아이러니가 따로 없습니다. 바로 내 욕심이 나를 천박하게 만드는 거라고 가슴을 여몄습니다.
이렇게 보잘것없는
여행이지만 그래도 잘 먹기는 했습니다. 몇 년 전에 상해, 소주, 항주를 돌아다녔을 때는 중국인의 안내를 받아 가는 곳마다 펼쳐진 무궁무진한
중국 음식의 향연에 깊은 감동을 받은 적이 있어서 이번에는 그냥 좋다는 정도의 반응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본격적인 중국 요리를
맛보는 기분은 별났습니다. 특히 저녁 식사는 우리끼리 따로 사먹어서 더 그랬습니다. 북경 오리 구이, 광동 요리, 사천 요리를 저녁마다
돌아가면서 맛봤습니다. 음식을 생각하면 다시 가고 싶은 곳이 중국입니다. 깨고 나면 뒤가 깨끗한 중국술도 먹을 만하고요.
* 다음은 이 글에 대한 어떤 분의 대꾸입니다.
설레시겠습니다. 배가 불룩한 배낭에게 미안할 정도니 얼마나 좋으실까 짐작이 갑니다. 선생님께서 다시 걷는 다는 소식은 올 여름 제게 더
특별한 의미로 다가옵니다. 아들이 지금 걸어서 내려오고 있거든요. 6월 18일에 서울에서 출발해서 어제 광주에 도착했다는 전화를 받은 참이라
어제 오늘 잔뜩 흐린 하늘이 다행스럽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하고 복잡합니다.
처음에는 걸어오다 말겠지 했어요. 그런데 견뎌주네요.
누가 시킨 게 아니라서 죽어라고 걷는 것인지... 며칠 전에는 한낮에 숨이 막힐 정도로 달궈진 아스팔트를 걷는데 배낭 무게까지 저를 짓눌러
헉헉거리다가 그냥 포기해 버릴까 갈등했다고 그러데요. 그런데 지도를 보면 어쩌면 그렇게도 가까운지, 조금만 더 걸으면 집에 닿을 것 같아서 또
끄덕끄덕 걷게 된다네요. 말은 그렇게 하는데 내려오는 속도를 가늠해 보니 죽을 둥 살 둥 모르고 걷는 것 같습니다. 무리하지 말고 즐겨라,
힘들면 그냥 차 타고 와라 했더니 헤헤 웃으며 시작한 거니까 끝까지 해 보겠다고 합니다.
밥은 사 먹고 잠은 여관에서 자는데
교회나 절에서 자는 날이 더 많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절에서는 밥도 주고 자는 방에 선풍기까지 내줘서 고맙더라고, 인심은 절이 더 좋더라고 해서
한참 웃었습니다. 아파서 내 마음 고생 그렇게도 시키더니 이젠 걱정 안 해도 되겠구나 싶습니다. 아들이 집에 오면 할 얘기가 많을 것
같습니다.
참! 아들이 처음에 걸어 오겠다고 했을 때 이곳 주소를 알려 주었는데 어떻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오면 물어봐야
겠습니다.
선생님께서도 도보 여행 건강하게 잘 마치시기 바라겠습니다.
* 다음은 위의 글에 대한 내 대꾸입니다.
아들이 엄마를 많이 닮았나 봐. 젊은 날에 감행했던 가출하고 비슷한 데가 있으니까 말이야. 아무튼 젊은이다운 게 보기가 참 좋아.
꼭, 이 집에 도보 여행 소감을 올리라고 해 줘. 글도 엄마를 닮았으면 좋을 거야.
우에무라 나오미라는 사람이 있있어. 북극권
12000km를 1년 반 동안(1974. 12. 29-1976. 5.8) 혼자 개썰매에 의지하여 횡단한 이야. 이것뿐만이 아니야. 아마존강
6000km를 뗏목으로 두 달 동안 역시 혼자 여행한다거나 일본 열도 3000km를 52일 동안 걸어서 종단하기도 하고 5대륙의 최고봉을 세계
최초로 다 오르기도 한 엄청난 업적을 쌓은 분이야. 최후도 모험가다와서 겨울(1984. 2)에 세계 최초로 알래스카의 매킨리 산(6194m)를
오르는 데 성공하고 내려오다가 실종되고 말았어. 참고로,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에베르스트를 오른 고상돈도 이 산의 등반을 마치고 하산하다
죽었대.
이 사람의 대단한 기록을 소개하려는 것이 아니야. 이 분이 지은 책이 우리나라에서 어떤 대접을 받는지를 생각하고 싶어서
얘기를 꺼낸 거야. 우리나라에는 이 사람이 쓴 책 가운데 세 권이 번역되어 있는데 <<내 청춘 산에 걸고>>(평화출판사,
1994), <<안나여, 저게 코츠뷰의 불빛이다>>(평화출판사, 1989), <<아내여, 나는 죽으러
간다>>(신원문화사, 2003)가 그거야. 이 가운데 마지막 것은 모험하는 동안에 아내에게 보낸 편지를 묶어 낸 것인데 지금 서점에서
살 수 있어. 나오미의 저서와 관련 자료를 엮어서 만든 <<돌아오지 않는 봄-우에무라 나오미의 모험과 인생>>(하창성
엮음)도 있어. 그런데 문제는 앞의 두 권은 절판되어서 책을 구하기가 어렵다는 거야. 운이 좋게도, 앞에서 말한 북극권 횡단기인
<<안나여, 저게 코츠뷰의 불꽃이다>>(여기서 '안나' 썰매를 선도한 암캐의 이름)는 우리 동네 도서관에 있어서 빌릴 수
있었어(이번 내 도보 여행에 함께 가는 유일한 책이 될 거야). 하창성이 엮은 것도 어렵게 헌책방을 뒤져서 구해 놓기는 했는데 <<내
청춘 산에 걸고>>는 안 보이는 거야. 출판사에 전화해도 없다는 대답을 들었어. 그 많은 대학 도서관 가운데도 소장하고 있는 데가
몇이 안 되더라고. 국립중앙도서관에는 있다니까 거기 가서 복사할 생각이야. 이 책들의 내용이 좋고 나쁨-그런데 뛰어난 산악문학을 소개하고 있는
심산의 <<마운틴 오딧세이>>(풀빛)에는
나오미의 <<내 청춘 산에 걸고>>가 목록에 당당하게 올라 있어-을 떠나 무상의 행위에 목숨을 건 사람의 위대함을
생각해서라도 많이 읽고 가슴이 뛰어야 하는 건데 절판이 되어서 구하기가 어렵다는 사정이 나로서는 몹시 슬퍼. 말할 필요도 없이 찾는 이가 없어서
그렇게 된 거지. 무엇보다, 젊은이의 광장이라고 해야 마땅하고 따라서 모험과 자유를 부추겨야 할 대학에 이런 책이 없다는 것은 할 말을 없게
만들어. 참다운 자유와 주체성은 혼자서 무모할 정도로 뭘 해 보는 데서 생긴다고 난 믿어. 젊은이에게는 더욱 그래(<상처 입을 수 있는 권리>). 이런 책을 만나게
되면 젊음의 혈기가 가만히 있게 하지 않을 텐데 매우 안타까운 일이야.
물론 이런 책이 주위에 많이 있다고 해도 우리 젊은이들이 잘 읽으려 들지는 않을 거야.이른바 명문 대학에서도 학문을 위한 공부를
하는 학생은 볼 수 없고 다 취직에만 매달려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니까 말이야. 이렇게 불쌍하게 되어 버렸는데 누가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낭비한 저런 사람의 책을 보겠어.
그런 점에서 아들은 참 멋있어. 솔직하게 말하면, 나도 지난 여름의 나를 생각하면
자족감과 뿌듯함을 느껴. 올여름의 땡볕 속을 걸을 나를 그려 보면 더욱 그래. 아직도 탄 흔적이 남은 다리가 어떻게 저걸 하나 하는 두려움
비슷한 마음을 물리칠 수 없도록 만드니 말야.
아들이 집으로 돌아오면 많이 칭찬해 줘(내일쯤 도착할까?). 무상을 얘기해 놓고 나서
실용적인 관점을 보이는 것이 아귀에 안 맞기는 하지만, 이번의 경험은 그에게 틀림없이 든든한 재산이 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