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난 길
비 오는 날 마루에 앉아서
귤밭1
2006. 7. 28. 08:23
일이 있어서 제주도에 갔다왔다. 현대식 단독주택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그 집에는, 요즘에는 잘 보기 힘든 풍경인데, 꽤 넓은 마당이 있어 잔디와 감나무, 보리수, 문주란 들이 자라고 있었고, 거기다가 옆의 텃밭에는 콩, 옥수수. 고추 들을 심어서 어린 시절을 생각나게 했다. 그런 기분은 비가 오면서부터 더 강해졌다. 마루에 앉아 비가 듣는 소리며 마당의 풀과 나무들이 더 파릇파릇하게 살아나는 모습이 시골 초가집의 어린 시절을 아주 그럴듯하게 재현하는 것이었다. 귤나무와 팽나무가 보이는 뒤란까지 있었다면 완벽에 이를 뻔했다. 그랬다면 어미 닭이 열 마리가 넘는 병아리를 데리고 마당에 나와 있는 것이 아주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이렇게 상상을 이어가니 비가 막 오기 시작할 때 땅에서 올라오는 정겨운 흙냄새를 맡는 것 같기도 했다.
마루에 앉아 가져간 이지누의 <<이지누의 집 이야기>>를 읽는데 내가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것을 발견한 것도 큰 기쁨이었다.
한옥에 살 때 비가 오는 날이면 마루에 나앉아 뒤란으로 나 있는 문을 활짝 열어 놓고 나뭇잎 위로 빗방울이 떨어지는 모양과 소리를 즐겼던 기억이 있다. 혹은 처마에서 마당으로 물 떨어지는 자리를 잘 잡아 빈 깡통이나 양푼이라도 서넛 빗물받이로 놓고 턱을 괸 채 엎드려 빗물 튀는 모양이며 소리를 듣는 것은 기나긴 장마철에 개구쟁이들의 무료함을 달래기에 더없이 좋은 놀이기도 했다. 이렇듯 마루는 방보다 자연에 더 가까이 있었다.(이지누, <<이지누의 집 이야기>>, 삼인, 2006, 194쪽)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어린 시절이 가난만 했던 것이 아니라는 걸 알수 있다. 저처럼 품격있는 시인의 호사도 누렸던 것이다. 이에 비하면 우리가 사는 아파트의 베란다는 너무 삭막하다.
어찌어찌 고생해 장만한 아파트에 입주하기도 전에 새로 지은 집에 먼지라도 들어올까 싶어 꼭꼭 틀어막는 일부터 서두른다. 베란다의 알리민늄 새시가 그것이다. 그 일은 어쩌면 스스로 우리들의 숨구멍을 막아 버리는 일과도 같은 것이다. 그리하여 아파트에 들어가면 우리는 자연을 제대로 보거나 느낄 수 없는 지경에서 살게 된다. 매연 가득한 아파트는 그렇다 치자. 그런데 산 좋고 물 좋은 곳에 지어 놓은 전원 아파트라는 곳에서조차 베란다부터 막고 보는 마음은 도대체 무엇일까. 공간 소유에 따른 지나친 욕심이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다르다. 베란다를 유리로 막으면 겨우 베란다 공간만큼만 나의 것이 되겠지만 그것을 열어 두면 멀리 보이는 앞산까지도 나의 것이 될 터이니 오히려 더 큰 공간을 가지는 셈이 아니겠는가.(위의 책, 194-5쪽)이러한 폐쇄성은 마당이 없는 것과 깊은 관계가 있을 것 같다. 애정을 갖고 바라볼 꽃이나 풀이 없으니 저절로 밖과 안 사이에 튼튼한 벽을 쌓게 되는 것이다(도둑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는 것도 그 이유지만). 마당 대신으로 사용하는 것이 베란다다. 그래서 마당에서 키우는 것을 집안으로 들여온다. 잘 자랄 리가 없다.
비가 오면 아파트에서 가장 먼저 하는 것이 베란다의 문을 닫는 일이다. 처마가 없을 뿐더러 아파트 자체가 높아서 비가 안으로 들어오기 때문이다. 마당이 없으니, 담배 피우는 이들이 거실에서 쫓겨나 불쌍하게 서 있을 때를 빼고는, 굳이 밖을 내다볼 필요가 없는 것은 물론이고. 이런 데서 서정시인이 나올 수 있을까?
아파트의 편리함을 누리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자니 좀 열없기는 하다. 나중에 마당이 있는 집에 살고 싶은 꿈을 갖고 있다고 말하면 이런 기분이 좀 눙쳐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