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난 길

논리력을 키우려면

귤밭1 2006. 8. 3. 08:23

아래 옮기는 것은 목포대학교 영재교육원에서 '논리력 키우기'를 주제로 세 시간 동안 수업할 자료입니다. 좀 에돌아서 논리력을 키우는 데 필요한 전제 조건을 생각해 봤습니다. 그 핵심은 '글쓰기를 생활화하자'인데 내용은 대부분 그동안 이 집의 여기저기에서 했던 이야기를 모아 놓은 것입니다. 초등학교 6학년과 중학교 1학년인 수강생들에게는 조금 어려운 개념이 있을 테지만 수업하면서는 쉽게 풀어서 얘기할 것이니 걱정하지 말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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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늘 글을 써야 한다

 

 

1) 글쓰기 위주로 진행되는 영국과 미국 교육의 예

 

* 참고 자료 1

 

미국 명문대 합격이 다는 아니다

 

                                                                     콜린 박(서울대 유학 상담자)

요즘 4월만 되면 일어나는 현상이 있다. 미국 최고의 명문 대학에 당당히 합격한 특목고 유학반 학생들에 대한 기사다. 올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우리는 보통 그런 기사를 접하면 놀라움과 부러움을 느끼곤 한다. 하지만 여기에도 드러나지 않은 면이 있다. 이렇게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미국의 톱 학교에 들어가는 학생들 중 처음부터 학교에 잘 적응하며 공부할 수 있는 학생은 그다지 많지 않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특목고 유학반의 교육 시스템에 있다. 모 외고 홈페이지의 유학반 소개를 보면 "21세기 국제화 시대에 세계로 뻗는 한국인을 양성한다"는 취지 아래 만들어졌다고 돼 있다. 그러나 고등학교 3년 동안 인재를 양성하기보다 무조건 명문 대학에 학생들을 많이 입학시켜 학교 이름 알리기에만 힘을 쓰고 있는 게 현실이다.

 

국제화 시대의 인재를 양성한다고 하면서 우리나라 대학 입학 준비와 다른 게 하나도 없다. 먼저 유학반 학생들의 고등학교 성적은 무조건 톱이다. 미국의 명문 대학에서 톱 수준의 학교 성적을 원하기 때문에 'A(수)'를 쉽게 주거나 영어로 이뤄지는 강의 성적과 페이퍼는 점수를 후하게 주어 모두 우수한 성적을 받는다.

 

지난해 특목고 유학반을 갓 졸업하고 미국 유학을 준비하고 있던 학생들에게 쓰기(writing)를 가르쳤던 적이 있다. 이들은 모두 미국 최고의 대학들에 합격한 상태였지만 이들의 쓰기 실력은 많이 부족했고 그중 한 학생의 수준은 심각할 정도였다. 이 학생의 에세이는 문법, 표현력, 구조, 논리, 열정, 어느 면으로 보아도 'F(가)'였다. 하지만 이 학생은 자신의 쓰기 실력이 우수하다고 생각해 왔다고 한다. 그 이유는 외고를 다니던 3년 동안 영어로 쓴 에세이에서 모두 'A'를 받았기 때문이다.

 

또한 학교에서 SAT I.II(미국 대학입학시험)를 준비시켜 주는데 이는 학교에서 수능시험을 가르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특목고 커리큘럼들을 보면 영어로 이뤄지는 강의도 AP 시험들(미국 대학 입학에 필수는 아니지만 톱 대학들이 선호한다)을 위해서다.

 

비슷한 수준의 미국 사립 고등학교의 교과 과정에는 SAT 등의 대학 입학시험 준비를 위한 과정이 없다. 학생들이 각자 알아서 준비한다. 대신 학교에서는 아이들이 대학에 들어간 뒤 충분히 적응할 수 있도록 쓰기와 토론 위주의 교육에 집중한다.

 

현재의 특목고 유학반은 아주 우수하고 영어도 뛰어난 학생들에게 미국인이나 미국인 교포 선생님들이 3년 동안 미국 대학 입학 준비만 시키는 것이다. 사실 대학 입학은 뛰어난 인재가 되기 위한 100m 달리기에서 약 50m만 뛴 것인데, 나머지 50m는 상관없다는 셈이다.

 

실제로 지난 몇 년간 SAT I.II, AP 시험 점수와 학교 성적이 거의 완벽해 언론의 관심을 받으며 명문 대학에는 들어갔으나 학교 수업을 따라가지 못해 돌아오거나, 또는 조금 더 낮은 수준의 학교로 편입한 경우가 종종 있었다. 프린스턴대학에 갔다가 다시 돌아와 한국에 있는 대학에 다니고 있는 한 학생은 "아무리 써도 끝이 없는 리포트들과 미국식의 토론 방식에 도저히 익숙하지 못해 다시 돌아왔다"고 했다.

 

비록 잘 버티고 있는 학생이라 하더라도 아주 힘들게 공부하고 있다. 스미스대학에 유학을 간 한 학생은 교수가 "이것도 글이냐. 네가 어떻게 우리 학교에 들어왔는지 알 수가 없다. 내일까지 다시 써와라"며 야단을 쳤다고 한다.

 

<<인터넷 중앙일보>>의 <나도 한마디>에 특목고 학생들의 미국 대학 입학 기사에 대한 어느 독자의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병폐는 목적과 수단이 전도됐다는 것이다. 단순히 명문 대학 합격하는 것이 인생의 목표이니…"라는 지적이 인상 깊다. 앞으로 우리나라에서 세계적인 인재를 키우기 원한다면 똑똑한 학생들을 데려다 시험만 잘 보는 기계를 만들어 미국의 명문 대학에만 보내는 교육 시스템을 바꾸어야 한다. 그보다는 미국의 어느 대학에 들어가든 미국에서의 생활과 대학에서의 공부가 자연스럽게 이뤄질 수 있도록 교육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21세기 국제화 시대에 세계로 뻗는 한국인을 양성한다"라는 말이 부끄럽지 않을 것 같다.(중앙일보, 2004. 4. 15.)


 

* 참고 자료 2

 

제대로 된 국어 교육 받고 싶어

 

                                                                                  이채린(서울 양재고1)

중학교 때 미국에서 1년 동안 학교에 다녀본 적이 있다. 미국에선 국어과목을 '문학'과 '언어'로 나눠 수업했다. 문학 시간엔 먼저 책을 읽은 뒤 내용을 놓고 토론한다. 토론이 끝나면 느낀 점을 적고, 그 글을 각색한 영화가 있으면 감상하기도 한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 글에 몰입하게 돼 어휘력이 절로 늘고 독후감이 잘 써졌다. 한마디로 수업이 흥미진진했다.

 

우리나라의 국어 교육은 어떤가. 입시에 맞추다 보니 중.고등학교 과정 모두 단조롭기 그지없다. 글을 제대로 음미하기에 앞서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의 5단 구성을 엄격하게 나눈다. 그러고 나서 각 부분에 해당하는 요지를 적고 문체나 글의 특징 등 세부 사항을 정리해야 한다. 학생들은 단순 지식을 암기해 다섯개의 문항 가운데 하나의 정답을 고르는 골치아픈 문제 풀이를 반복해야 한다. 이쯤 되면 새로운 글을 접할 때 흥분과 희열.호기심.상상력이 발동될 여지가 없다. 그러니 모국어를 배우고 문학적 상상력을 키우며 즐거워야 할 수업 시간이 무미건조하고 답답해진다. 입시 성적에 얽매일 수밖에 없어 그렇게 가르쳐야 하는 교사도 학생과 같은 심정일 것이다.

 

글을 읽고 쓰는 것은 학문의 기본이라며 중요하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정작 학생들에게 학교에서 글을 써볼 기회를 얼마나 주고 있는가. 일년에 한두 번 백일장에 나가 끄적여보는 게 고작이다. 국어를 좋아하는 학생들, 문학을 사랑하는 많은 학생은 그래서 염증을 느낀다. 진정 글의 맛을 느끼고 배울 수 있는 교육이 그립다.(중앙일보, 2004. 4. 27.)

 


2) 왜 글을 써야 할까?

 

왜 글을 써야 할까요? 자신과 만날 뿐더러 새로운 나를 만들어 나감으로써 행복해지기 위해서입니다. 나와 정면으로 마주치는 경험 없이 참다운 행복을 누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마음 깊은 데서 우러나오지 않는 즐거움이나 아름다운 느낌은 대체로 오래 가지 못할뿐더러 사람을 황폐하게까지 합니다. 그런데 글쓰기는 무엇보다도 날마다 되풀이되는 과정에서 잊기 쉬운 나와 마주 앉는 일입니다. 물론 이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익숙하고 당연하게 생각했던 일들을 낯선 것처럼 되돌아보고, 습관이나 버릇에 따라 사는 나를 반성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밥을 먹지만 보통은 왜 이것을 날마다 해야 하느냐고 질문하지는 않습니다. 귀찮으니까요. 더 나아가 현재의 나를 부정해야 하는 일도 생깁니다. 사실 앞에서 겸허하게 내 생각이 잘못이었음을 인정해야 하기도 합니다. 힘든 일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과정을 겪지 않고서 나를 넓고 깊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이미 가지고 있던 생각만으로는 절대로 좋은 글을 짓지 못합니다. 글감을 골똘히 들여다보면서 따지면 따질수록 평소에는 하지 못하던 생각이 신기하게도 떠오릅니다. 좀 과장하면 글이 나로 하여금 글을 쓰도록 만들었다고 해야 되는 경우도 생깁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영감도 아마 이와 비슷한 것일 것입니다. 물론 얼른 보기에는 뜻하지 않게 얻은 것처럼 보이는 행복한 표현이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나온 것은 아니고 평소에 많이 생각한 결과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뿌린 대로 거둔다고 생각해야 옳습니다. 아무튼 글을 의식적으로 쓰게 되면 그냥 지나치던 것도 주의깊게 돌아보게 되고 책도 이전과는 다른 태도로 읽게 됩니다. 그러므로 글을 쓰는 과정이 늘 고통스럽기만한 것은 아닙니다. 현재의 나를 넘어서는 것은 나를 버려야 한다는 점에서 고통이지만 새로운 경지를 발견하는 기쁨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내 마음은 넓어지고 깊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마음의 넓이와 깊이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빈 항아리에는 가득 채우면 더 담을 수 없지만 사람의 마음은 채울수록 빈 데가 늘어납니다.

 

모든 글의 핵심은 논리력입니다. 그런데 논리력이나 문장력은 따로따로 느는 것이 아니라 쓰는 과정에서 차츰차츰 향상되므로 많이 써보는 것이 최선의 공부 방법입니다.

 

명심할 것은 글을 쓴 다음에는 반드시 누군가에게 보여 주고 조언을 들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친구끼리 돌려 읽으면서 토론을 해도 좋습니다. 다른 사람과 의견을 나누지 않으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모르고 자기 혼자만의 생각이 옳다는 독단에 빠지기 쉽습니다.

 

 

3) 좋은 글은?

 

어떤 글이 좋은 글일까요? 여러 가지로 대답이 가능하겠습니만 글쓴이의 의도를 성공적으로 드러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누구나 공감하리라 생각합니다. 물론 그 의도가 뻔한 것이어서는 안 되고 깊이와 독자가 수긍할 수 있는 보편성을 갖춘 내용이어야 되겠지요. 그런데 이런 글의 내용은 평생에 걸쳐서 끊임없이 배우고 읽고 쓰고 해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글 못 쓴다고 가만히 앉아서 한탄할 것이 아니라 부지런하게 읽고 생각하고 써 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읽을 만한 글을 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성의와 노력입니다.

 

내용의 깊이나 독창성, 보편성을 갖추는 일은 위에서 말한 대로 평생에 걸쳐서 해야 할 일이니까 여러분의 노력에 맡기기로 하고 여기서는 그 내용을 전달하는 방식에서 반드시 고려해야 할 점에 대해서 얘기하고자 합니다.

 

좋은 글이 갖추어 할 가장 중요한 요건은 구체성입니다. 여기 내 앞에 아름다운 꽃이 있다고 합시다. 내가 아무리 아름답다고 얘기해도 여러분은 무슨 말인지 모를 것입니다. 그 꽃이 눈앞에 보이지 않으니까 말입니다. 독자의 공감을 얻는 글이 되려면 꽃의 모양이라든가 향기라든가를 마치 눈앞에서 그 꽃을 보고 냄새 맡듯이 보여 줄 수밖에 없습니다. 이게 구체성입니다. 글의 교훈적인 성격도 이 구체성에서 나온다고 해도 좋습니다. 예를 들어, 열심히 공부하자는 말 대신에 그렇게 하는 모습과 그렇게 하여 얻은 결과를 구체적으로 보여 주면 독자들은 '아! 이러니 열심히 해야겠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다루는 대상을 우리 눈이나 귀에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듯한 느낌을 주게끔 제시해야 합니다.

 

구체성에는 또 다른 뜻도 들어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일은 다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무슨 얘기를 하면 그렇게 해야만 하는 숨은 뜻이 반드시 있습니다. 그러니까 구체성이란 말은 대상과 관계를 맺고 있는 더 넓은 틀과의 연관성을 드러낼 때 얻어지는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나무는 보고 숲을 보지 못한다’는 말을 하거나 듣습니다. 이게 바로 구체성을 제대로 나타나지 못한다는 점을 지적하는 말입니다. 나무 한 그루를 아무리 자세하게 그리고 직접 보듯이 묘사했다고 해서 그 나무를 다 드러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숲과 연관해서 어디쯤 자리잡고,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등을 살펴야 그 나무를 제대로 파악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좋은 글의 또 다른 조건은 복잡성입니다. 복잡성은 대상을 이루는 여러 측면을 고려한다는 뜻입니다. 대상을 단순하게 어떤 하나의 성질만을 가진 것으로 간주한다든지 긍정적인 측면만을 일방적으로 부각시킨다든지 하는 것은 이 복잡성을 존중하는 정신에 정면으로 어긋납니다. 특히 주장을 내세우는 글에서는 이 복잡성을 고려하는 일이 아주 중요합니다. 내 주장이 옳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 주장에 반대되는 측면을 무시하거나 아예 없는 것처럼 굴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복잡성을 존중하는 눈을 가지려면 무엇보다도 사실을 존중하는 겸허한 태도를 길러야 합니다. 내 신념이 무너지는 한이 있더라도 사실을 존중하겠다는 태도를 갖추는 일은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인간은 자기 중심적이며 자존심 덩어리이기도 하니까요. 따라서 필요하면 자존심을 버릴 수 있을 정도로 무한히 열려 있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마지막으로 답이나 결론을 바로 제시하는 것보다 그것에 이르기 위한 논의의 과정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답보다는 그것에 이르는 과정이 제대로 되어 있느냐 하는 것에 더 많은 점수가 매겨지는 것은 수학 문제 풀이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글에서도 꼭 마찬가집니다. 이런 점에서 모든 글은 그 종류에 관계없이 논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조건을 완벽하게 갖추는 것은 어렵습니다. 불가능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이런 경지에 쉽게 이르는 길도 나 있지 않습니다. 앞에서 말한 대로 쉬지 않고 읽고 생각하고 쓰는 게 겨우 그 길의 입구에 들어설 수 있는 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래도 위에서 말한 몇 가지 조건을, 읽고 생각하고 쓸 때마다 의식적으로 고려하는 습관을 들인다면 읽을 만한 글을 지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2. 많이 읽고 놀자

 

우리는 유한해서 모든 형태의 삶을 경험할 수가 없지요. 자신의 전공이나 직종을 몇 번씩 바꾸었다고 하더라도, 경험하지 못한 분야들에는 여전히 문외한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남들로부터 존경받고 스스로도 후회 없는 생활을 한다고 할지라도, 자신이 경험하는 삶만이 가치 있고, 다른 사람들의 삶은 무의미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대단히 위험한 독단과 편견에 사로잡힌 것이겠지요. 따라서 더불어 사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생각의 폭을 넓히기 위해서는 간접적인 경험이 필요합니다. 좋은 책을 폭넓게 읽어야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좋은 책을 만남으로써 직접 경험하지 못한 형태의 삶, 고뇌하며 사랑하며 승리하는 인간의 모습, 그리고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깊이 있는 사상을 발견하게 됩니다.

 

좋은 책은 글을 잘 쓰는 데도 큰 도움을 줍니다. 위에서 방금 말한 대로 깊이 있게 생각하게 만들고, 풍부한 어휘력과 상상력을 제공합니다. 이런 것들이 글에서 가장 가장 중요하게 평가되는 독창성을 발휘할 수 있는 바탕이 됩니다.

 

그런데 책만 읽어서는 안 됩니다. 직접 겪어야 합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입니다. 그러므로 많이 놀고 돌아다녀야 합니다. 그래야 몸도 튼튼해지고 다른 사람과 어울려 잘 살 수 있습니다. 몸이 건강해야 마음도 건강하고 감정도 풍부해집니다. 특히 방학 때는 친구끼리 어울려서 먼 데로 여행도 가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여행은 부모의 품을 벗어남으로써 내 주인이 바로 나 자신이라는 점을 깨닫는 아주 좋은 기회입니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책임지는 주체적인 개인이 되어야 자기만의 생각을 할 수 있고 따라서 좋은 글을 쓸 수 있습니다. 잘 노는 것, 참으로 중요합니다.

 


3. 생각하는 방법이 있다

 

 

1) 늘 질문하자―고정 관념, 상식, 권위, 관습을 당연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

 

* 참고 자료 1

 

선풍기 바람과 사망사고

 

                                                                   서민(단국대 의대 교수·기생충학)

"지난 8일 오후 8시20분쯤 대구시 서구 비산동 한 모(81)씨가 자신의 집 안방에서 창문을 닫은 채 선풍기를 켜놓고 자다 숨졌다. 이에 앞서 4일에도 광주 북구 양산동 고 모(45)씨가 집에서 선풍기를 켜고 자다 사망했다."(2004년 8월11일, <<매일경제>>)

 

여름이면 이런 보도가 빠지지 않고 나온다. 올해는 그리 덥지 않아서 그런지 좀 뜸하지만, 2004년처럼 날이 덥다 싶으면 선풍기를 틀어놓고 자다가 숨졌다는 기사가 잦아진다. 의사들은 '선풍기-죽음'을 이렇게 설명한다. 첫째, 저체온증설. 선풍기를 틀면 체온이 낮아지고, 심한 저체온증은 심장마비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 하지만 덥고 습한 여름에 틀어대는 선풍기가 사람의 체온을 낮추면 얼마나 낮출지 의문스럽다. 둘째, 질식설. 선풍기 바람이 질식을 유발한다는 거다. 강한 바람이 질식을 유발한다면 오픈카 운전자는 어떻게 안 죽을 수 있을까?

 

이쯤에서 의문이 생긴다. 선풍기가 과연 죽음을 유발하는가? 더위를 무지하게 타서 잘 때마다 선풍기를 3단으로 틀어놓고 자는 난 왜 아직까지 안 죽었을까? 선풍기를 언제나 얼굴로 향하게 해놓는데다, 창문 여는 걸 잊어버리는 경우도 꽤 있는데 말이다. 의문을 증폭시키는 것은 선풍기로 말미암은 죽음이 우리나라에서만 보도되는 기이한 현상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나라 공기에 산소가 더 부족하지 않고, 국산 선풍기가 유난히 더 빨리 도는 게 아니라면 한번쯤 이에 의심을 품을 만도 한데, 의사들마저 선풍기 탓에 숨졌다는 얘기를 반복하고 있으니 희한하기 그지없다. 해마다 숨진 사람이 십여 명에 이른다는 중요한 질병을 왜 연구조차 한 사람이 없을까? 밀폐된 방에 쥐와 선풍기를 놓고 과연 죽는지 알아보는 건 그리 어려운 게 아닐 텐데 말이다.

 

여기까지 읽은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할 것이다. "실제로 죽은 사람들은 뭐냐?" 그게 바로 '고정관념의 확대 재생산'이다. 사람이란 누구나 자신이 믿고자 하는 대로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 예를 들어 어느 지역에 콜레라가 유행한다면, 아이스크림을 너무 많이 먹어 설사를 하는 사람까지도 콜레라로 오진되기가 쉽다는 얘기다. 선풍기 죽음 역시 마찬가지다. 밀폐된 공간에서 사람이 죽었는데 선풍기가 머리맡에서 돌아가고 있다면, 우리나라처럼 선풍기가 죽음을 유발한다고 믿는 나라에서는 다른 원인을 찾기보다 선풍기에 원인을 돌리기 마련이라는 거다.

 

사실 자다가 숨지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다. 심장마비나 뇌혈관 질환으로 숨질 수도 있다. 약물 중독이나 기타 감염으로 숨지는 경우도 있을 수 있고, 조용히 자살을 택한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어찌되었건 '선풍기 때문에 죽었다'고 쉽게 단정짓는 대신 사인을 규명하려고 노력했다면, 그들 중 상당수에서 다른 사인을 찾지 않았을까.

 

'선풍기를 틀어놓고 자면 숨질 수가 있다'는 경고문을 박은 선풍기 회사를 본 적이 없고, 실제로 그 때문에 돈을 배상한 선풍기 회사가 없는 것으로 보아 가전회사들은 물론이고 피해 당사자조차 선풍기로 말미암은 죽음을 실제로는 믿지 않는 것 같다. '선풍기-죽음'이 사실이 아니라면 우리 언론들도 선풍기 죽음 사례를 별 생각 없이 보도함으로써 대중들의 잘못된 믿음을 증폭시키는 행위를 그만둬야지 않을까? 의사들 역시 선풍기 죽음을 정당화하는 대신 그게 진짜인지 밝혀줄 필요가 있다. 말 꺼낸 사람이 책임을 져야 하니, 내가 먼저 실험 대상이 되리라. 오늘 밤, 난 밀폐된 공간에서 선풍기를 틀고 잘 거다. 내가 다음에 칼럼을 쓸 수 있다면 '선풍기-죽음'은 미신이다.(원문)

 

* 참고 자료 2

 

감기 예찬

 

                                                                   이종찬(아주대 의대 교수·의학사상)

감기에 걸리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감기는 우리를 매우 귀찮게 하고 번거롭게 한다. 자신이 마음대로 몸을 움직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스스로 몸과 마음이 일치하지 않는다. 바쁜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에게 감기는 그야말로 불청객이다.
 
콧물이나 재채기로 감기에 걸리기 쉬운 환절기가 되면, 아예 약국은 자칭 '감기 환자'들로 북적거린다. 광고에서 듣고 본 대로 자기가 약을 마음대로 처방하여 무슨무슨 약을 달라고 말한다. 어떤 사람은 당장에라도 나을 수 있도록 약을 '독하게' 지어달라고 약사에게 청한다. 여기에서도 만족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동네 의원으로 곧장 달려가서 의사에게 한방에 감기가 물러갈 수 있도록 주사를 놓아달라고 떼를 쓴다. '빨리 빨리' 낫지 않으면 의사나 약사를 탓한다. 이처럼 감기는 현대인들에게 마음과 몸의 '적'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이다.

 

과연 감기는 '적'일까? 오히려 친구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자주 오는 형편도 아니고 1년에 한번씩 찾아오는데, 어찌 며칠 만에 가라고 눈치를 줄 수 있는가. 애써 더 놀다가라고 나는 친구에게 오히려 졸라대는 편이다. 친구는 1년간 내 몸이 어떻게 변했는지가 궁금한지 온몸을 샅샅이 돌아다닌다. 그러니 친구 때문에 몸살이 날 정도이다. 하지만 친구는 다른 친구를 또 찾아 삼천리 방방곡곡 돌아다녀야 한다고 때가 되면 내 곁을 떠나간다. 섭섭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친구 덕택에 지난 1년간 내 삶을 되돌아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지게 되어 오히려 마음이 가벼워진다. 하루하루의 삶에 허덕이다 1년이 어떻게 후딱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였는데, 오랜만에 넥타이와 허리띠를 풀어놓으니 마음이 이렇게 넉넉할 수 없다. 그러니 하루 종일 듣고 싶은 음악을 듣고, 읽고 싶은 시를 읽을 수 있다. 특히 온갖 종류의 차를 가까이 두고도 바쁜 생활로 마시지 못했는데, 이 기간에 다양한 차 향기에 빠져든다. 그러면 친구도 좋은지 나를 보채지 않는다. 이런 가운데 여러 가지 상념들이 맴돈다. 지난 한해 동안 마음속에 맺혔던 것들은 스스로 풀려버린다. 그리고 새로운 생각들이 떠오른다. 삶의 활력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샘솟는다. 친구가 떠날 때 즈음엔 환송회를 베풀어준다. 내년에 다시 보기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그래서 나는 11월이 기다려진다.

 

감기를 통해서 우리는 마음이 몸에 대한 자연치유력을 조절할 수 있는 지혜를 깨달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감기가 우리에게 주는 삶의 슬기이다. 감기는 사람에게 없어서는 안 될, 삶의 필수적인 요소이다.

 

'더 많은 약과 주사를 달라!' 현대인들이 이런 맹신에 집착할수록 사람의 몸은 점점 망가지게 될 것이다. 몸은 스스로의 치유 능력을 갖고 있다. 자연치유력이 있다는 것이다. 몸이 자연치유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고 조정할 생각을 하기는커녕 약과 주사로 몸을 정복하려고 한다. 그렇게 되면 몸의 자연치유력은 떨어지게 된다. 약과 주사로 몸을 다스리는 사람은 몸의 진정한 주인(주체)이 될 수 없다.(원문)

 

2) 자기 중심주의(지역주의, 국가주의)에서 벗어나기―사실 앞에 겸허하라, 차이를 인정하라, 틀리다고 하지 말고 다르다고 말하자

 

* 참고 자료 1

호메로스는 그레시아인이었으나 그레시아군 지도자들의 치기어린 다툼을 감추지 않았고 또한 적군의 대장 헥톨의 영웅됨을 아낌없이 칭찬하였다. 공정을 기하기 위해, 민족적 감정을 애써 억누른 흔적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그는 사실 앞에 겸허했던 것 같다. 그는 또한 한 떼의 그레시아군이 불의의 습격을 당해 많은 동료를 잃고 도망하다가 안전한 곳에 이르러 우선 먹을 것을 실컷 먹고 쉬고 난 다음에야 죽은 동료들을 기억하고 울었다고 덤덤히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에는 문학적 선택주의의 전형인 감상주의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감상벽이 있는 아류는 아마도 "먹을 것도 있고 오래 굶주리기도 하였지만 죽은 동료들 생각에 울음만 나올 뿐 입맛이 통 없었다"고 썼을 것이다. 그러나 물론 이것은 사실과는 거리가 먼 <감상적 허위>이다. 호메로스의 이런 대목들을 읽을 때, 우리는 우리의 가식적 통념―스스로 세련된 교양이라고 자부하고 있는―을 파괴하는 준열을 느끼는 것이다. 그런 일을 해대면서도 호메로스는 무척이나 덤덤하다.(이상섭, <사실의 준열함과 문학>, <<말의 힘>>, 민음사, 1976, 20-1쪽)

 

* 참고 자료 2

꿈의 해석의 결론이 여러분에게 기분 나쁜 아주 부도덕적인 것으로 생각된다고 하여 그것이 어떻다는 것입니까. 나는 젊었을 때 나의 은사 샤르코 선생이 이와 같은 경우에 '사실이 그런 것을 어떻게 할 수 있나'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즉, 이 세상을 현실에 있는 그대로 알려고 한다면, 겸허한 태도로 자기의 동정심이나 반감을 철회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프로이트, 김성태 역, <<정신분석 입문>>, 삼성출판사, 1990, 157-8쪽)

 

3) 복잡성을 존중하기―세상은 복잡하다, 일면적으로 보지 말자

 

공평하게 그리고 꼼꼼이 들여다보면 인간의 삶은 아주 복잡합니다. 그래서 전적으로 옳거나 그르다고 평가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의 요소가 아니라 서로 다르거나 심지어 반대되는 요소로 이뤄지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기 때문입니다.

 

 

* 참고 자료

 

                             내 방 벽에는 일본의
                             악귀(惡鬼) 탈이 걸려 있다.
                             노랑칠을 한 것이다.
                             고약하다는 것이 얼마나 힘드는 것인가를 보여주는
                             이마에 삐져나온 힘줄을
                             나는 알 듯한 기분으로 바라다본다.

                                                          ―베르톨트 브레히트, <악의 탈>

 

 

그런데 이 이 마지막 참고 자료를 두고는 고개를 갸웃거리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어뗗게 복잡성과 관계가 되는지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훈이네 집으로 가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