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난 길

멋진 길(2006. 10. 4)

귤밭1 2006. 10. 10. 08:38

 

 

가장 놀라운 경치로 인도하는 당신의 오솔길이 구불구불 구부러지고 외롭고 위험하게 하옵소서.(에드워드 에비, 황의방 옮김, <<태양이 머무는 곳, 아치스>>, 두레, 2003, 15쪽)

어제 읽은 구절이다. 포장되지 않은 구불구불한 길을 외롭게 걷는 것이야말로 도보 여행의 진수라고 생각해 왔으므로 이 문장이 얼른 내 가슴에 들어왔다(참고로, 구불구불한 길에 대해서는 여기를 보세요).

 

살다 보면 운명이다 싶은 일이 있다. 어젯밤이 그랬다. 위에 인용한 책을 읽다가 보니 아마 한 시가 넘었던 것 같다. 평소에는 잘 없던 일이다. 집이나 연구실에 있을 때 특별한 일이 없으면 12시를 넘겨 잠자리에 든 적이 없는 것이다. 이것뿐만이 아니다. 텔레비전은 뉴스나 겨우 볼 정도인데 어제-정확하게 말하면 오늘이지만-는 책을 덮고 내 방에서 나와 안방으로 자러 가면서 아무 생각 없이 거실의 텔레비전을 켰다. 아무래도 운명이 시킨 일만 같다.

 

 문화방송이 나오는데 '관광'이라는 제목을 단 특집 방송이었다. 서양 사람들의 느릿느릿한 여행-영국인 부부는 일주일 동안 이태리의 농원에 민박하면서 오전에는 동네를 천천히 돌아보고 오후에는 책 읽고 게으르게 뒹구는 식으로 보낸다-과 우리의, 유럽을 일주일 만에 후딱 둘러보는 여행 같지 않은 여행-하루 종일 봐도 모자라는 박물관을 우리는 반 시간 동안 돌아다니면 끝이다!-을 비교해 보여 주고 있었다. 외국 여행이랍시고 안내인을 졸졸 따라다니는 일을 몇 번 했던 나로서는 부끄럽지만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어서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여기를 보세요). 무릇 일반화란 성긴 그물이어서 거기에 포섭되지 않은 예를 많이 놓치는 법이므로 한국 사람을 모두 뭉뚱그려서 한통속으로 취급한다고 생각하거나 실제로 우리의 일반적인 행태와는 다르게 여행하는 이도 있을 테지만 아주 예외적인 경우라고 보고 싶다.

 

내가 운명이라며 호들갑을 떨면서 얘기려는 것은 이게 아니다. 위에 소개한 대로 외국인과 우리의 여행을 비교하고 나서 나오는 '산티아고로 가는 길'이라고 소제목을 붙일 만한 부분은 나를 완전히 몰입의 경지로 몰아 놓았다. 이 도시는 스페인에 있는데 역시 같은 나라의 도시에서 산티아고의 옛 성당으로 가는 길을 걷는 사람들을 보여 주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야고보의 무덤이 있어 옛부터 순례자들에게 널리 알려진 길인 모양인데 그 길이가 무려 800킬로미터였다. 숲을 지나기도 하고 포장되지 않은 오솔길과 산길이 있는 것이 마음에 딱 들었다. 일년 동안에 십만 명 정도가 걷는다는데 나도, 넋이 빠져, 언젠가 걸어야지 했다. 지금으로서는 꿈에 지나지 않지만 한 달 동안의 시간을 두고 걸을 생각을 하자니 마음이 몹시 설레서 잠이 오지 않았다. 순례를 다 마쳤다는 증명서를 받은 이태리의 노부부가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다.

 

운명이라고 했지만 아직은 젊으므로 노력에 따라서 얼마든지 주체의 자발적인 행위로 만들 수 있다고 믿고 싶다. 62세의 나이에 12000킬로미터의 실크로드를 1099일 동안 걸은 <<나는 걷는다>>(임수현 옮김, 효형출판, 2003)의 저자 베르나르 올리비에는 이 길을 걷기 전에 파리에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까지 2300여 킬로미터를 걸었다고 한다(<<나는 걷는다>> 1, 26쪽. 여기를 보세요). 아마 이 도시가 앞에서 말한 저 산티아고가 아닌가 싶다. 12세기부터 순례자들이 걸었다고 했으니 말이다. 잠자리에 들면서 나는 설렘이 곁들인 비장한 심정이 되어 저런 길을 걷다가 길에 묻혀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운명이라면 이 정도의 무게가 있어야 될 터이기 때문이다. 멀고 구불구불한 길을 외롭게 걸으면 운명에 걸맞을 듯도 싶다.

 

조금 있으면 순례자처럼 고향 제주도에 가는 비행기를 탄다. 저런 꿈을 안고 가게 되어 아주 즐겁다. 동네 길도 새로운 마음으로 걷게 될 것 같다. 여러분께 추석 선물 대신에 내 즐거움과 설렘을 전염시켜 드리고 싶다.

 

(제주에서 덧붙임) '산티아고로 가는 길'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하여 여기저기를 찾아보다 김남희의 <<소심하고 겁 많고 까탈스러운 여자 혼자 떠나는 걷기 여행 2>>를 만나게 되었다. 바로 이 길을 걸었던 여행기다. 땅끝 마을에서 통일 전망대까지 29일 동안 우리나라를 걸어다닌 여행기 <<소심하고 겁 많고 까탈스러운 여자 혼자 떠나는 걷기 여행>>은 내가 갖고 있는데 저 책에까지는 눈이 가지 못했다. 읽어야 될 책이 하나 더 늘었다. 더불어 꿈이 현실이 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 같아 기쁘다. 참고로, 김남희의 집 '하늘길 걷는 사람'의 방인 '혼자 가는 먼길'에 들어가 '오마이뉴스'를 누르면 이 여행기를 읽을 수 있다.

 

훈이네 집으로 가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