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난 길

"왜 윗옷 벗고 수영하면 안 되나?”

귤밭1 2006. 10. 22. 18:08

"왜 윗옷 벗고 수영하면 안 되나?” 누가 얘기한 걸까요? 남성이 그 임자라고 대답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수영장에서 남성이 윗옷을 벗는 것은 아주 당연한 거니까요. 누가 가르쳐 준 바도 없는데 그렇게 여겨 왔고 실제로도 했지요. 그러므로 저렇게 항의한 사람은 여성이어야 합니다. 실제로 캐나다의 여성이 그렇게 했습니다 신문 기사에서 그 이가 왜 그랬는지 알아 봅시다. 

여성도 남성과 똑같이 공공장소에서 윗옷을 벗는 것이 용인돼야 한다고 주장해온 캐나다 여성이 경찰과의 투쟁을 시작했다고 20일 밴쿠버 선이 보도했다.

 

린다 메이어(45)는 밴쿠버 경찰위원회에 진정서를 보낸 데 이어 청문회에 참석해 "경찰이 상의 벗은 남성은 제재하지 않으면서 상의 벗은 여성만 위협ㆍ억류ㆍ심문하는 것은 이중기준이며 명백한 성차별"이라고 주장했다.

 

밴쿠버 교외 메이플 리지에 사는 메이어는 토플리스 여성과 토플리스 남성이 동등하게 대우받아야 한다는 신념을 실천하기 위해 그동안 동네 실내수영장에서 하의만 입은 채 수영해왔다. 이런 행위는 큰 논란을 일으키면서 그를 유명인사로 만들었다. 일부 시민의 신고로 경찰이 출동하는 소동을 빚기도 했으나 수영장을 운영하는 시 당국은 마땅한 제재근거를 찾지 못해 결국 토플리스 수영을 허용했다. 메이어는 이를 근거로 활동영역을 밴쿠버 등 다른 지역으로 넓히기로 했다. 강력한 요구를 담은 진정서를 밴쿠버 경찰에 보낸 것도 그 때문이다.

 

메이어는 경찰의 연례 업무지침에 성행위를 하지 않는 한 여성이 공공장소에서 윗옷을 벗고 다닐 권리가 있음을 명시할 것을 촉구했다. 그는 경찰위원회에 출석하면서 윗도리를 벗고 나타나지는 않았다. 대신 사진기자들 앞에는 청바지 차림에 윗옷을 벗고 캐나다 인권헌장으로 가슴을 가린 모습으로 섰다.

 

경찰위원회의 테리 라 리버티 민원위원장은 "메이어의 관심사를 진지하게 검토중"이라고 말했다.(기사 전문)

한마디로 멋집니다. 나는, 모르는 여성을 열심히 쳐다봐 상대방을 민망하게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내 행동을 만족시켜 줄 수 있는 예를 만났기 때문은 아닙니다. 이런 점이 전혀 없다고 한다면 솔직하지 못한 것이겠지만 내가 멋지다고 한 것은 무엇보다도 세상에서 상식이라고 하는 것을 뛰어넘고 있기 때문입니다.
 
외국에 가면 해수욕장에서 윗옷을 입지 않은 여성을 볼 수 있습니다(어떻게 했냐고요? 바보 같이, 안 보는 척하면서 봤습니다. 떳떳하게 보기 위해서 다시 가고 싶어집니다). 그런데 그런 차림(?)으로 헤엄을 치는 여성은 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러니 저 캐나다의 여성은 멋지지 않을 수가 없지요. 저렇게 한다고 해서 다른 사람에게 해를 미칠 것도 없을 테니 말입니다. 사실 요즘의 젊은 여성의 옷차림으로 말하면 거의 벗은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느낌을 주기도 하니까 윗옷을 벗었다고 뭐라고 하는 것은 정당성을 갖지 못하지요.

 

참고로, 터키의 해수욕장에서 윗옷을 벗은 여성을 만난 느낌을 나는 다음과 같이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 

사전에 "가슴과 샅 부분을 약간씩만 가린 투피스 모양의 여자용 수영복"으로 정의되어 있는 비키니 얘기를 좀 할까요? 어떤 데서는 수영장이나 바다가 아닌 데서도 이런 차림이 보였습니다. 물론 사진에서 보듯이 전통적인 모습이 일반적입니다. 나이가 든 여자들은 특히 그렇습니다. 수영장 같은 데서는 가끔씩 가슴을 가린 부분을 벗어젖힌 여성들도 눈에 띄었습니다. 안 보는 척하면서 눈길을 주었는데 생각처럼 그렇게 이상하지는 않았고 오히려 자연스러웠습니다. 아무튼 그런 곳에서 가슴과 샅 부분을 이은 수영복을 입은 여성의 국적은 안 봐도 한국이었습니다. 누구 보기 좋으라고 해서가 아니라 좀 대담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일행 가운데는 햇빛을 가리느라 양산을 쓴 분도 있었는데 거기서는 그렇게 하면 이상한 사람으로 본다는 말도 참고로 덧붙이겠습니다. 물론 살아가는 환경이 다른 데서 오는 결과일 테니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특히 유럽에서는 평소에 햇빛을 잘 볼 수 없으니 오히려 반가울 수밖에요. 그래서 터키 쪽으로 휴가를 많이 온다고 했습니다.(전체 글)
아무튼 남녀나 나이에 따라 차별적으로 적용되는 상식이나 관습은 대체로 약한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는 금지의 다른 이름이기가 쉽습니다. 그 나쁜 담배를 어른은 아무렇지 않게 피우면서 아이에게는 그게 안 된다고 하는 것을 생각해 보세요. 저 여성과 비슷하게 앞으로 용감한 미성년자가 나서서 우리에게도 떳떳하게 담배를 피울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다면 어른이 그러는 한에서는 막을 도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을 억압하는 나쁜 상식을 거스르는 통쾌한 얘기를 들으니 저 여성과 비슷한 '괴짜 심판'도 떠오릅니다. 전에 쓴 것을 읽어 드릴게요. 

심판이, 축구 경기에서 너무 큰 차이로 지고 있는 편이 불쌍해 보여서 골을 넣었답니다. 우선 먼저 기사를 보십시다.

 

심판의 행동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나에게는 운동이 뭔지를 근원적으로 생각하게 해 주는 아주 통쾌한 장면으로 비칩니다. 왜 그렇게 보이는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 조상이 다시 살아 돌아와서 지금 벌어지는 일을 보게 되면 놀랄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내 짐작에 가장 놀랍게 보일 것 가운데 하나는 운동에 대한 현대인의 태도가 아닐까 합니다. 아니, 멀리 갈 것도 없이 내가 어린 시절만 하더라도 스포츠만 전문으로 다루는 신문이 나올 수 있으리라고는 도대체 생각조자 할 수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한겨레>>가 처음 나올 때만 해도 기자들이 스포츠 관계 기사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그랬던 것을 기사를 통해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제 신문이나 방송이 스포츠를 다루지 않는다면 바로 망해 버릴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은 엄청나게 변했습니다.

 

과거에 운동은 문학이 마음에 작용하는 방식과 비슷하게 즐거움을 통해서 몸을 튼튼하게 하고 협동심을 기르기 위해서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과 비교하면 아주 순수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즐거움을 누리는 게 가장 중요한 요소였으니까요. 그 즐거움을 통해서 당대의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간이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은 그럴듯한 전언을 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른바 전인적인 차원에서 운동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으니까요.

 

그런데 이제는 어떻습니까? 한마디로 운동은 가장 유망한 돈벌이가 되었습니다. 유명한 선수들의 인기가 높은 것도 이 돈벌이와 깊은 관계가 있을 것입니다. 이제 운동은 전인적인 인간을 형성하는 차원에서 행해지는 일이 아니라 돈을 버는 직업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운동을 하는 사람과 어떤 방식으로든지 돈을 내고 그것을 보면서 즐기는 사람이 따로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심판이 자기 기분에 따라서 행동하는 것은 엄청난 사건이지요. 그런데 운동이 본래 그 운동을 하는 사람이 즐겁기 위하여 하는 것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면 이 괴짜 심판의 행동도 얼마든지 호의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심판도 그랬을 뿐 아니라 나도 신이 납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2002. 4. 12)

주말이 다 지나고 있습니다. 유쾌한 반란을 즐기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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