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난 길

박남준의 시 한 편-<따뜻한 얼음>

귤밭1 2006. 11. 4. 10:48

따뜻한 얼음

옷을 껴입듯 한겹 또 한겹
추위가 더할수록 얼음의 두께가 깊어지는 것은
버들치며 송사리 품 안에 숨 쉬는 것들을
따뜻하게 키우고 싶기 때문이다
철모르는 돌팔매로부터
겁 많은 물고기들을 두 눈 동그란 것들을
놀라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얼음이 맑고 반짝이는 것은
그 아래 작고 여린 것들이 푸른빛을 잃지 않고
봄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겨울 모진 것 그래도 견딜 만한 것은
제 몸의 온기란 온기 세상에 다 전하고
스스로 차디찬 알몸의 몸이 되어버린 얼음이 있기 때문이다
쫓기고 내몰린 것들을 껴안고 눈물지어본 이들은 알 것이다
햇살 아래 녹아내린 얼음의 투명한 눈물자위를
아 몸을 다 바쳐서 피워내는 사랑이라니
그 빛나는 것이라니

 

박남준, <<적막>>, 창비, 2005, 14-5쪽.

나는 시를 거의 읽지 않는다. 여러 말 할 것 없이, 둔해서 압축된 말의 묘미를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시도 누가 읽어 보라고 하지 않았으면 즐거움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처음 제목만 듣고, '차거운 얼음이 따뜻하다니?' 하면서 저런 얼음을 떠올려 보려고 했지만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따뜻해지면 녹아 내리는 얼음밖에. 이런 감수성으로 시를 읽지 않는 것은 무엇보다도 시에게 다행한 일이다.

 

그런데 본문을 읽자 둔한 내게도 뭐가 와서 무릎을 치게 했다. 정말이지 시인은 신이다! '따뜻한 얼음'을 만들어 냈으니 말이다. 도무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얼음과 사랑을 연결시키다니, 거듭해서 시인은 대단하다.

 

그런데 삐딱하게 시비를 걸고 싶은 마음도 생긴다. 시를 제대로 읽지 못하는 사람의 투정쯤으로 받아들여지면 좋겠다. 다음 구절을 보자.

쫓기고 내몰린 것들을 껴안고 눈물지어본 이들은 알 것이다
햇살 아래 녹아내린 얼음의 투명한 눈물자위를
아 몸을 다 바쳐서 피워내는 사랑이라니
그 빛나는 것이라니
첫 연에서 얼음은 얼음 밑에서 노는 생명을 따뜻하게 해 주기 위하여 더 두꺼워진다고 했다. 그렇다면, 해가 비치자(또는 봄이 오자) 얼음이 녹는 것을 두고 눈물을 흘린다고 하는 것은 이상하지 않은가? 따뜻해지면 더 좋아해야 할 거 아닌가? 앞뒤의 맥락으로 보건대 기쁨의 눈물은 분명 아니다. 불쌍한 것들을 껴안아서 흘리는 눈물이라거나 '몸을 다 바쳐서 피워내는 사랑'이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인은 전혀 의도하지 않은 것이겠지만, 얼음의 눈물은 사랑에 깃들기 쉬운 소유욕이나 자기 중심주의(여기를 보세요) 같은 것을 만족시키지 못한 데서 오는 것은 아닐까?

 

물론 해가 비치기 전에 흘린 눈물이라고 못 읽을 것은 없다. 그래도, 이기주의자인 나는 '몸을 다 바쳐서 피워내는 사랑'이 못마땅하다. 다 바치고 나면 나는 어디 있는가? 다음 글을 읽고 난 다음에 불편하게 느낀 것도 이런 질문에 마주치게 하기 때문이다.

모두를 위한 도구가 되어보세요

나무를 싫어하는 분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셸 실버스타인의 그림책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보면 아낌없이 주는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랑이 책을 읽는 사람의 마음에 울림을 줍니다.

 

이 책에서 알 수 있듯이 나무의 삶은 성자의 삶과 닮았습니다. 나무는 자신의 환경을 탓하지 않습니다. 어디에 심어졌든 묵묵히 자라 봄이면 싹을 틔워 여름이면 그늘을 만들어 냅니다. 이산화탄소를 들이마시고 동물에게 이로운 산소를 뿜어냅니다.

 

제가 좋아하는 한 선배는 나무를 '내가 없다'는 뜻으로 풀이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나무는 햇빛을 피하는 그늘도 되고, 성글지만 비를 피하는 우산도 됩니다. 아이들 놀이터도 되고 그네를 매는 기둥도 됩니다. 베어져서는 집을 짓는 재료나 땔감으로도 쓰입니다.

 

어디에 쓰여도 좋은, 내가 없는 마음이 바로 나무의 마음입니다. 프란체스코 성인께서는 당신을 평화를 위한 도구로 써 달라고 하늘에 기도하셨습니다. 도구는 무엇이 되겠다고 주장하는 게 아닙니다. 무엇이 되어도 좋다는 마음, 바로 그게 나무의 마음이 아닐까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무엇이 되고자 하지 도구로 쓰이고자 하지 않습니다. 조직 안에서도 빛나고 훌륭한 일만 하려 하지 궂은일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나를 넘어 모두를 위한 어떤 도구도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보세요.

 

나라는 생각이 없어 나무는 수승화강(水昇火降)이 됩니다. 물 기운이 위로 올라가고 뜨거운 기운은 아래로 내려감을 뜻합니다. 건강한 사람이 그렇게 됩니다. 머리는 시원하고 아랫배는 따뜻한 것이지요. 그런 나무의 마음으로 살아보세요. '나'라는 생각 대신 우리를 위해 산다고 생각해보세요. 나뿐만 아니라 자신의 몸담고 있는 조직도 함께 좋아집니다. 건강도 좋아집니다.(권복기 기자, 기사 원문)

정말로 나무는 희생하기만 하는가? 이런 생각 없이 그냥 크는 것이 아닐까? 중심을 잡고 잘 커야 다른 것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닐까? 나무는 희생이 본업이니까 나무를 아무렇게 대해도 된다는 것일까? (참고로, 나는 나무를 좋아해서 뭐라고 쓰기도 했다. 여기를 보세요.) 

 

희생을 지나치게 비장하고 아름답게 기리는 것은 희생의 당사자는 물론이고 그 희생으로 은혜를 입은 사람들에게도 큰 짐이 된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에서 마음껏 저 하고 싶은 대로 사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한다. 그런 과정에서 사랑이 나오면 더 좋고. 그렇다면 사랑은 희생이 아니라 그냥 저가 좋아서 하는 것이 된다.

 

훈이네 집으로 가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