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품 있게 살기
요즘 신문에 나는, 사람들이 하는 짓들을 보면 기품이 좀 있었으면 좋겠다는 비원을 품게 된다. 책임 있는 자리에 있던 바로 그 사람이 탈당을 선도한다. 탈당하려면 책임을 지고 정치를 그만두는 게 옳다. 교수들도 기품이 없기는 정치인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논문 표절을 가리면 되는 문제를 총장 자리를 둘러싼 권력 투쟁으로 분위기를 몰아가 버린다(관련 기사). 중요한 것은 표절 여부를 분명히 가리는 것이다. 사태의 추이를 보아 하니 당사자가 기품 있게 총장에서 물러나는 게 순린데 그럴 생각은 없는 것 같다. 설사 반대파가 총장을 몰아내고자 표절을 문제 삼았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불순한 목적이 섞여 있느냐를 가리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이다. 세상에 의도가 없는 행위가 어디 있는가? 의도를 따지기보다는 제기한 문제가 사실에 부합하느냐는 것을 논의하는 것이 훨씬 생산적이다(참고로, 문학 비평 분야에 '의도론의 오류'라는 개념이 있다. 그 요점은 작품을 논의하면서 작가의 의도를 중시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흔히 겪듯이, 맛있는 음식을 만들겠다는 의도가 그대로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이와는 반대로 음식이 제대로 되었다면 굳이 실현된 의도를 따질 필요가 없다. 이 개념은 문학뿐만 아니라 사람의 행위 일반을 논의할 때도 퍽 쓸모가 있다.). 그리고 그 결과를 시원하게 따르면 그래도 구겨진 기품이나마 조금은 유지하게 될지 모른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남을 비판하는 나부터가 기품이 있기나 한 건지 돌아보고 있는데 마침 공감이 가는 의견이 오늘 신문에 실려서 여기에 옮긴다.
살면서 우리는 수많은 이별을 경험한다. 싫든 좋든 떠나야 할 때가 되면 떠나야 한다. 세상과의 영원한 이별인 죽음은 어쩔 수 없지만 우리는 모든 크고작은 이별의 시간과 장소, 방법을 선택할 수 있다. 허망하지만 사랑은 움직이는 것이고, 사랑이 떠난 자리를 붙들고 있다고 해서 사랑은 돌아오는 것은 아니므로 고통을 견뎌내야만 한다.그렇다. 영원한 것은 없다. 나오면 들어가야 하는 게 어길 수 없는 자연의 이치다. 그래도 현재나 미래를 위하여 내 과거를 아무렇지 않게 내던지는 것은 보기 흉하다. 과거도 소중한 내 일부다.
연초에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연예인 부부의 이별 과정은 너무나 서글펐다. 단 한마디 모두 내가 잘못했다는 말만 했으면 됐을 일이다. 그러나 내 탓이 아니라고 상대를 비방하고 흠집내기를 하는 동안 사랑했던 시간들과 그 사랑의 진정성까지도 의심하게 만드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별의 고통을 견뎌낼 줄 몰랐기 때문일 것이다. 그 일주일 뒤인가 30년 결혼 생활을 한 미국의 갑부 부부가 이혼하면서 소송도 없이 재산을 의논껏 나누고, 지난 결혼생활은 행복했고 이제 서로 다른 길을 가겠다고 기자 회견을 한 것을 보았다. 이별의 고통을 과거에 진정으로 사랑했던 시간에 대한 존중으로 바꾸어낸 것이다.
남녀 사이 사랑만이 사랑은 아니다. 직업과 학문, 예술에 걸었던 열정도 사랑이다. 나라와 겨레, 혹은 어떤 이상을 위해 뭉쳤던 뜨거운 순간들도 사랑이다. 사회적 이슈에 몸과 마음이 아플 정도로 헌신했던 터질 것 같은 순간들도 사랑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그런 순간들을 뒤로하고 헤어져야 할 때가 온다. 사랑의 순간이 뜨거웠을수록 이별의 고통은 크다. 왜 사람들은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사랑의 순간들까지도 훼손하는 것일까?
최근 열린우리당의 탈당 사태를 보면서도 이별을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해 관계가 다르고 꾀하는 바가 다르면 정치 집단의 이합집산이야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처음 당을 만들었을 때의 역사적 소명감이나 명분, 기대, 서로 손을 마주잡고 부풀어 오르던 일체감의 순간들이 있었을 터이다. 그런 순간들을 기억한다면 이런 방식의 헤어짐이 너무 염치없고 부끄러운 일이 아닐까 싶었다.
10년 전에 고향인 경남 진해에 내려가신 사회학자 이효재 선생께 물은 적이 있다. 이곳저곳에서 선생님이 필요하다는데 왜 갑자기 낙향하셨냐고. "어느 순간 내가 한 말을 또 하고 한 말을 또 하더라. 아차 싶어서 중요한 자리를 맡거나 선두에 나서기에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게 선생의 답변이었다. 생물학적인 나이와 거기에 따른 노쇠 현상을 인정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놀라운 자기 억제로 고통의 순간들을 이기고 떠날 시기를 선택한 것이다. 지난 주말 찾아뵈었더니 선생은 진해에 '기적의 도서관'을 유치하고 그곳에서 스탬프를 찍으며 건강하게 지내고 계셨다.
우리 사회엔 자신의 시대는 지나갔는데도 망령된 글이나 발언을 하는 인사들이 더러 있다. 한때 빛나던 사람들이다. 그 빛나던 순간까지도 추레한 것으로 만드는 것을 보면서 세월에 대한 겸손함이나 염치와 예의를 차리지 않는 아집을 본다. 봄이 지나 여름이 왔는데도 지난 봄을 붙잡고 봄은 어떠해야 한다고 말한다. 봄은 다시 오지만 다시 오는 봄은 과거의 그 봄은 아니고 새로운 봄이라는 것을 왜 모를까. 자신이 어떤 시대의 대변자였다고 해서 자기 삶의 모든 시기를 통틀어 시대를 대변하겠다는 것은 만용이다. 슬프지만 인정하고 떠날 때를 알아야 한다.
우리는 처음 사랑을 시작할 때 서먹서먹하지만 설레는 마음으로 상대에게 주춤주춤 다가간다. 그 아름다웠던 순간들, 인생에서 많지 않았던 그 뜨거운 사랑의 순간들을 잿빛으로 만들지 않으면서 우리는 이별을 맞아야 하고 고통도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이 모든 사랑했던 순간들에 대한 예의고 또한 이별의 예의다."(김선주, <이별에도 예의가 필요하다>, <<한겨레>>, 2007. 2. 8. 기사 원문. 참고로, 열린우리당 집단 탈당과 이에 대한 비판은 각각 여기와 여기를 보세요.)
위의 얘기와 관련이 되는지 판단이 잘 안 서는데 영원한 사랑을 신화라고 주장하는 글도 읽어 보겠다.
사랑하면 만나고 사랑이 식으면 헤어지는 게 솔직하고 정상인지도 모른다. 사랑이 식었는데도 관계를 유지한다면 그건 도덕적 의무감이 남다르거나 아니면 뭔가 관계 속에 오히려 이기적 이해타산이 숨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의무로 지속되는 관계는 훌륭하지만 그건 꽃이 없는 고목나무일 뿐이다. (중략)전체적으로 맞는 얘긴 것 같기는 한데 미심쩍은 데가 없지는 않다. 사랑에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헌신적으로 몰입했다고 하더라도 '24시간'은 사랑하기에는 너무 짧지 않을까? 이런 만남이 영혼을 먹여 줄 수 있을까? 나는 구식이어서 그런지 사랑에는 숙성 기간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렇게 쓴 적이 있다.
'영원한 사랑'에 대한 강박적 믿음이야말로 사랑을 방해하는 큰 요인이다. 영원한 사랑이라는 존재하지 않는 신화 때문에 연인들은 사랑을 겁내고 사랑의 상처를 두려워하고 사랑을 깰까 봐 노심초사한다. 영원성의 환상을 깰 때 우리는 사랑에 '쉽게' 몰입할 수 있고 '쉽게' 빠져나올 수 있다. 이게 우리 시대의 경박한 사랑 풍조라고? 기간이 중요한 게 아니고 진정성이 중요하다. 24시간이건 열두 달이건 아무런 이해타산 없이 미래에 대한 불안 없이 헌신적으로 몰입하는 사랑 말이다. 누군가 사랑이 밥 먹여 주냐고 반문한다. 밥 먹여 주지 못한다. 그러나 삶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근원적 행복을 준다. 영혼을 먹여 준다."(권혁범, <영원한 사랑은 없다?>, <<여성주의, 남자를 살리다>>, 또하나의문화, 2006, 78-9쪽)
구불구불한 길은 사랑과 아주 잘 어울립니다. 마음 졸이기, 망설임, 상대방의 눈치 보기, 싸움이 사랑의 과정에는 어김없이 끼어들기 마련인데 이런 우여곡절을 구불구불한 길처럼 잘 드러내 주는 말도 없을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손 한 번 잡는 데도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흐르는지요! 그러니 사랑은 직선적일 수가 없지요. 직선과 여기에 직결되는 속도와는 사랑이 어울리지 않지요.(전문)
질문 하나 더하고 마치자. 이해타산이 개입하지 않는 사랑이 있을까? 난 없다고 생각한다. 사랑이 진행되다 보면 순수하지 못한 것이 끼어들게 마련이다. 그러면 그때부터 사랑이 아닌 걸까? 이런 것을 묻는 것을 보면 나는 틀림없이 속물이다. 기품 있게 살기 참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