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난 길

어린 시절의 놀이터

귤밭1 2007. 2. 19. 10:11

설 잘들 쇠셨는지요? 새해 복 많이 받고 늘 건강하고 즐겁고 행복하게 삽시다.

 

제주도에 설 쇠러 갔다가 어제 늦게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가족, 친구들과 만나 술도 마시고 재미있게 놀았습니다. 어릴 때 즐겨 찾았던 놀이터를 찾아 몇 시간 걷기도 했습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에 다닐 때 우리 동네 아이들이 여름 방학에 거의 날마다시피 모여 다녔던 곳은 계곡이었는데 물이 깊이 고인 곳이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제주도는 건천이어서 물이 늘 흐르지 않습니다. 강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 마을(지금 중문 관광단지 동쪽에 있습니다)은 다른 마을과는 좀 다르게 바다와 많이 떨어져 있어서 바닷가에는 일년에 한두 번 갈까 말까 했습니다.

 

헤엄도 치고 술래 잡기도 하면서 몇 시간 놀고 나서  배가 고파지면 집으로 돌아가게 되는데 그때쯤이면 눈은 완전히 시빨개져 있곤 했습니다. 고인 물이어서 더러웠기 때문이지요. 그래도 요즘의 오염된 물에 비하면 훨씬 깨끗했을 것입니다. 몸에 나쁜 화학물질 같은 것은 없었을 테니까요. 50이 넘은 지금도 내 눈이 그리 나쁘지 않은 것을 보면 그리 억측은 아닐 거예요. 아, 얼마나 물은 많이 먹었는지요! 

 

그런데 이번에 중문 천제연에서 시작하여 한라산 쪽으로 계곡을 따라올라가 봤는데 어린 시절에 하도 많이 가서 눈에 선한 그 놀이터가 아무래도 안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여러 개의 다리가 놓이고 하는 바람에 우리가 발가벗고 뛰어내렸던 큰 바위들이 없어져 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저기쯤이었으리라는 짐작만 하면서 지나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참 섭섭하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화가 나는 마음을 누르기가 어려웠습니다.

 

어디 고향에만 개발의 광풍이 빗겨 가기를 바라겠습니까. 이런 세상에서, 정작 나는 문명의 온갖 혜택을 받으면서 우리 고향만 옛날 그대로 남아 달라고 하는 것은 고약한 심보가 아닐 수 없지요. 그래도 추억의 장소가 영영 사라지고 말았다는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저 놀이터를 고이 간직하면서도 얼마든지 길을 내고 다리를 지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마을의 구성원 대다수의 정이 깃든 것을 아무렇지 않게 없앨 수 있다는 태도는 생각해 보면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소중한 우리의 일부를 아무렇게나 여긴다는 뜻이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갑자기 어린 시절의 행복을 잃어버린 것 같았습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 삶은 한없이 천박해지고 맙니다.

 

서울 집에 오니 내가 좋아하는 산문가인 시인 김선우의 글이 <<한겨레>에 실렸네요. 얼른 보면 내가 앞에서 한 얘기와 다른 것 같지만 우리 인간이 본성을 잃고 있다는 점에서 본다면 똑같은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글이므로 다 읽어 드릴게요.

 


닭들에게 다시 위풍당당함을!
 

 

돼지는 돼지답게, 닭은 닭답게! 
 갑자기 내 마음이 이렇게 소리친 것은 얼마 전 백담사 만해마을에서였다. 만해마을 뒤편으로 이어진 길을 따라 아침 산책을 하던 참이었다. 띄엄띄엄 있는 농가를 막 지나는데 ‘그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울타리 없이 길로 바로 이어진 농가의 마당가에 쌓아놓은 볏짚단 근처를 유유히 돌아 보무도 당당하게 아침 산책을 즐기는 닭들을 보게 된 것이다. 위풍당당! 그들을 마주친 순간 처음 떠오른 말이다. 아침 햇살이 막 비치기 시작하는 속에서 길과 관목 사이를 저희 마음껏 헤치고 돌아다니며 땅을 쪼고 깃을 다듬는 그들의 모습은 경이로웠다. 본능의 이지러짐 없는 순수한 생기 같은 걸 맘껏 발산하는 그들의 아침 산책을 훔쳐보며 나는 중얼거렸다. 아름답다...!

 

 저것이 저들의 본래 모습인데, 우리 뇌리 속의 닭들은 닭장 안에 있다. 닭장 안에 갇히지 않은 닭들을 상상하는 것이 어려워졌고, 게다가 요즘은 몸 하나 간신히 들어가도록 구겨 넣어진 사육장 속에서 모이통 밖으로 간신히 부리만 내미는 대량의 닭들을 떠올리는 쪽이 훨씬 익숙해졌다. 도대체 왜, 언제부터, 우리는 닭들에게서 그들이 가진 본연의 당당함과 아름다움을 빼앗고 사육장의 추레한 식용노예들로 전락시키게 된 것일까.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의 시스템. 말할 것도 없이 ‘대량 상품화’와 ‘인간의 탐욕’이 문제다. 세상 모든 것을 ‘상품’으로 치환하는 자본주의 생리 속에서 저마다의 본연의 아름다움을 지켜나갈 수 있는 생명 가진 것들이란 거의 전무하다. 살아있는 다른 생명들의 아름다움을 착취해 자신의 의식주를 위한 상품으로 만들어버리면서 인간은 인간만이 고귀하거나 아름답다는 착각 속에 날마다 추해져 간다. 이 악순환 속에서 저질러지는 수많은 학살들!

 

 조류독감으로 집단 폐사되는 닭들의 모습을 티브이 화면이나 사진으로 접할 때마다 저 집단살생에 내 자신이 개입된 것 같은 느낌에 몸을 떨곤 했다. 아프면 생에의 애착이 더 커지곤 하는 사람들처럼 그들도 살고싶을텐데, 우리는 그들의 의사를 물어본 적도 그들의 죽음을 애도하는 척조차도 하지 않고 집단 생매장하는 일을 아무렇지 않게 저지른다. 인간의 입장에선 문제를 일으킨 ‘상품’들을 다만 ‘처리’하는 과정이자 인간에게 피해를 줄 가능성을 예방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당연한 조치로서 말이다. 살아있는 것들은 조금씩 아프게 되어있다. 사람들이 독감 같은 것을 흔하게 앓듯이, 닭들도 독감에 걸리곤 할 것이다. 문제는 자연스럽게 아프기도 낫기도 하는 이 일련의 과정들이 ‘동물공장’이 되어버린 집단 사육장 속에서는 필연적으로 전염병화 한다는 것이다. 집단 사육되는 공간에서 병이 집단적으로 옮지 않을 도리가 없고, 또한 집단 사육이라는 반(反)생명적 환경에선 작은 병도 중증으로 유발되기 때문이다.

 

 뭇생명들의 복지에 무감각한 상품과 이윤의 논리가 생명의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도덕적  회의 없이 저지르는 한, 인간들의 복지도 궁극적으로 요원해질 것이다. 지상의 모든 삶들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콜레라나 구제역으로 집단 생매장되는 돼지들의 울부짖음, 조류독감의 닭들, 오리들의 처참한 날갯짓에서 껍데기를 달리한 인간의 생매장을 미리 본다면 너무 과할까. 그것이 대량생산-소비의 상품으로 인식되는 ‘산 것’들의 자본주의적 운명이다. 오염된 상품을 먹고 사는 인간의 운명도 시차를 달리할 뿐 비극적 종말로부터 그리 멀리 있지 않게 될 것이다.

 

 언젠가 벌목당한 산 아래 작은 암자에서 나무들을 위한 천도재를 준비하는 사람들을 만난 적 있다. 죽은 동식물들의 영혼이 평화로울 수 있기를 기도하며 천도재를 드리는 마음, 사람만이 아니라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의 영가를 위로하고자 하는 이런 마음들을 일상적으로 공유할 수 있게 될 때 우리가 두려워하는 동물들의 집단 전염병도 방지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전생명의 복지 없이 사람만 잘 살겠다는 아우성은 이기적이기도 하거니와 지상의 사이클로 보아 불가능한 오만이기 때문이다. 자연스러운 삶의 사이클에 위반되는 부자연스러운 생산과 소비는 부자연스러운 병과 죽음을 부른다. 그러니 이렇게 속삭인다. 생명이여 무탈하라. 오로지 자신의 본성을 위해서만 죽을 것! 자신의 본성을 위해 살 것! 닭은 닭답게 돼지는 돼지답게 말이다.

  

 동물들은 배고프지 않으면 살육하지 않는다. 생존에 필요한 만큼만 취하여 먹는다. 다른 생명의 죽음을 자꾸만 더 요구하는 인간의 생존방식을 겨울 산의 단출해진 능선들이 온몸으로 묻고 있는 목하 봄 밑의 계절. 김종삼의 <묵화>가 떠오른다. “물 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서로 적막하다고” 

 

우리가 잃어버린 이런 풍경들, 산 것들 사이의 교감의 능력을 잃어버린 이 난경의 지점에서 자꾸 되짚어 묻게 된다. 우리가 잃어버린 마음들이 우리의 영혼을 기형으로 만들어가고 있지는 않나. 우리는 흔히 ‘인간성 회복’을 운운하곤 하지만, 태초부터 주어진 무슨 고상한 절대의 ‘인간성’ 같은 건 없다. 인간이 어떻게 아름다워질 수 있을까를 반성하고 성찰하는 날마다의 기도 속에서만 ‘추구할만한 인간성’은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혹여 천부의 권리 같은 게 있다면 사람을 포함한 모든 만물에 해당하는 일일 터. 만물은 자연스럽게 살고자 하는 ‘본성’이 있을 뿐일 텐데, 자연스러움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찾을 수 없는 가혹한 온갖 ‘동물공장’에서 들려오는 울음소리들 처참하니, 아픈 것들이 많아서 온몸이 아프다. 

김선우 / 시인(원문)

닭 얘기가 나왔으므로 어린 시절의 내 닭에 대해서도 들려 드릴게요. 

말이 나온 김에 어렸을 때의 닭 얘기도 좀 해야겠다. 집에서는 늘 열 마리 안팎의 닭을 키우곤 했다. 키운다기보다는 그냥 놔 두면 저들이 알아서 저절로 자란다고 해야 맞다. 텃밭을 돌아다니면서 배추 같은 것도 뜯어먹고 땅을 파서 지렁이도 잡아먹는 것이다. 먹이를 찾기 어려운 겨울에 좁쌀이나 음식 찌꺼기를 주는 것이 고작이다. 닭장에서 키우지 않으므로 달걀도 아무데(그때 우리 집 울타리 안에는 소 우리라든가 농기구를 넣어두는 창고 같은 것이 많아서 초가집이 여러 채였다. 그래서 부자였나?)나 낳는다. 그러니 주인이 그곳을 모르는 수도 있다. 그래서 암탉이 자기가 낳은 달걀을 품어 병아리를 까느라고 한동안 안 보이다가 어느날 열 마리가 넘는 병아리를 자랑스럽게 거느리고 나타나서 식구들을 놀라게 하기도 한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이런 경험에서 생명의 신비스러움을 막연하게나마 느꼈던 것 같기도 하다. 하기야 다 큰 닭은 집에서 무심하게 잡아먹거나 오일장에 내다 팔았으므로 생명 운운하는 게 멋쩍기는 하지만.(전체 글)
도보 여행을 하면서 안타까운 것 가운데 하나가 여름에 닭을 키우는 곳을 지나면서 커다란 선풍기가 돌아가는 우리에 가득찬 닭들을 보는 일입니다. 그 냄새는 둘째 치고 숨도 쉬기 어려운지 하나같이 축 늘어진 닭들의 불쌍한 꼴을 보느라면 인간이 참 무서운 존재구나 하는 마음이 절로 듭니다. 저들도 생명인데 뛰어 놀 공간이라도 주면서 잡아 먹어야지요.

 

조류 독감이 발생하면 지역 전체의 닭을 모아 죽이고, 잘 익혀서 먹으면 괜찮다고 높은 사람들이 나와서 호들갑을 떨면서 모범을 보이는 일로 끝내서는 안 됩니다. 저렇게 우리에 마치 상품을 창고에 가득 쌓아놓은 것처럼 닭을 채워 놓고 키운다면 전염병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지요. 설사 운이 좋아 전염병에서 안전하다고 해도 늘 학대받으면서 죽지 못해 살아가는 닭이 우리 몸에 좋을 리가 없지요.

 

우리는 임시방편의 삶을 때우고 있습니다. 집도 그냥 임시로 사는 곳일뿐입니다. 늘 옮겨다녀야 하므로 가족의 근원적인 고향으로서의 의미를 가질 수가 없지요. 그래서 우리는 고향이 없는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렇다면 우리의 삶도 닭과 그리 다르지 않다고 해야 맞습니다.

 

사라지는 고향, 자연스럽지 크지 못하는 사람과 동물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훈이네 집으로 가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