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2. 23) 도보 여행 떠납니다
드디어 내일(2007. 2. 23) 도보 여행 가려고 합니다. 3월 4일까지 부산에서 동해안 따라서 올라가려고 합니다. 그동안 몇 번이나 떠나려고 했는데 잘 안 돼서 번번이 좌절하는 기분이었는데 이번에는 제발 마음먹은 대로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격려해 주기 바랍니다.
내일 출발에 즈음하여, 걷기와 느림에 대하여 얘기하는 멋진 구절 읽어 드리겠습니다. 다 읽고 나면 틀림없이 어디론가 걷고 싶은 생각이 들 것입니다.
진화사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바에 의하면 걷는 것, 그것도 똑바로 서서 걷는 것은 결정적으로 인간의 뇌가 커지는 것을 도와주었다고 한다. 우리는 이런 진보의 성과를—실제로 그럴까 하는 등의 모든 기본적인 회의에도 불구하고—유지해야 하고 그것을 지켜야 한다. 이렇게 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보다 만연되어 있는 잘못된 생각을 고쳐야 한다. 우리는 사는 동안 한 번이라도 제대로 걷는 것을 배워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하며 이런 노력은 바닥을 딛고 똑바로 일어설 수 있다는 특별한 감정으로 이어진다. 걷는 것을 배우는 자만이 커질 수 있으며 그런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티베트말로 우리 인간은 걷는 사람이랍니다. 그럴듯하지 않나요? 내게는 전적으로 그렇습니다.
“걸어라! 그래야만 사람은 스스로 그 자신의 주인이 된다!” 1786년 슈네펜탈(Schnepfenthal)의 범애교(汎愛敎 Philanthropin)의 보고에는 그렇게 적혀 있다. 걸으면서, 그리고 걷는 것을 통해서 우리의 세계는 내부와 외부로 확장된다. 걷는 사람은 자유롭다. 걸으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으며—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걷는 것은 이행 운동이다. 멈춤은 휴식이면서 동시에 활동이다. 걷는 것과 멈추는 것, 단지 그렇게만 계속된다. 걷지 않으면 많은 것이 우리에게서 빠져나간다. —아마도 가장 중요한 것이. 티베트어로 인간은 ‘걷는 사람’, 혹은 ‘걸으면서 방랑하는 사람’을 뜻한다. 인간의 삶이 시간과 함께 걷는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걸어가야지 무엇인가를 타고 가면 안 된다.
이제 걸어보자! 어디로? 목적지를 생각할 필요가 없는 곳으로. 도착을 생각하지 않고 걸을 것. 그러면 탐색하는 것, 폐쇄적이지 않은 것에 익숙해진다. 걷는 것은 그 자체가 목표이다. 남에게 내보일 만한 그런 목표를 포기하는 것이다.
“걷는다-멈춘다-걷는다: 이것이 이상적인 존재 방식이다.” 한트케는 그가 쓴 「연필의 역사」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기분 좋게 걷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렇게 걷는 것은 제2의 본능이 되어버린 인간성, 즉 시간을 점점 더 벌고 싶어하며 벌어야만 하는 그런 정신과 대처된다. 이제 우리는 정확하게 감지한다. 자신과 타인에 의해 설정된 그런 명령은 현실적 삶, 사랑과 사고를 위해 필요한 시간 척도와 반대 되는 것임을.
빠름이 행동의 영향력 있는 기준이 되었던 시대에 걷는 것은 필연적으로 그것과는 대립되는 세계관을 대변한다. ‘걷는 것’은 우리의 경제 원동력을 지배하는 ‘언제 어디서나’의 모델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의도적으로 '언제', '어디서나'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경찰이 걷는 사람들을 특별히 유심히 쳐다보는 것이 아주 근거가 없는 행동이 아니며 아주 의미도 없지 않다. 걷는 사람들은 기분 내키는 대로다. 그들은 시간의 호흡을 느끼며 거기서 적절한 결론을 끌어낸다.
걷는 것은 공간과 시간에 적응하는 것이다. 타고 가는 것—제일 극단적인 형태인 비행기를 타는 것—은 시간과 공간을 정복하려는 행동이다. 걸으면서 사람들은 자기 자신과 만난다. 반면 육상 교통수단이나 비행기를 타고 갈 때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서 달아난다. 우리는 올바른 걸음걸이를 알고 있지만 육상 교통수단이나 비행기를 올바르게 타는 법은 알지 못한다.—이것은 생명에 위협을 주기 때문이다. 마음이 급할 때는 올바른 것과 정당한 것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한다. 걸을 때에만 자기 자신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노발리스는 “어디로?”라고 물으면서 이렇게 대답한다. “항상 집으로.” 집은 바로 자기 자신을 의미한다. 자신에게 다가가고 자기 본연의 상태에 머무르고자 하는 사람은 걸어야 한다. 로베르트 발저는 말한다. “산책하지 않았다면 나는 죽었을 것이다.” 걸어서 이동해야만 한다. 위대한 철학자와 문학자들, 칸트, 하이데거, 아달베르트 슈티프터 등과 같은 사람들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이것과 관련해 괴테의 시를 인용하지 않을 수 없다.
니체의 충고도 필요하겠다.숲에서 혼자 그렇게 걸었다.
아무 것도 찾지 않으면서.
그것이 내 의도였다.
가능한 한 앉아 있지 마라. 야외에서나 자유로운 움직임에서 나온 생각이 아니면 믿지 마라. 모든 선입견은 내부에서 나온다. 오래 앉아 있는 것은—다시 한 번 강조한다—성령을 거스르는 죄이다. 단지 행동으로 옮긴 생각만이 가치를 갖는다!왜냐하면—이것은 크롬웰의 인식이다—“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사람이 가장 일찍 오기” 때문이다. (중략)
목적을 가지고 걷는 일은 늘 있어 왔다. ‘신을 위해 걷는 것’인 순례 여행과 군대의 행진, 행군이 가장 잘 알려진 형태이다. 그러나 오늘날 그것들은 자동차 여행에 의해 양적으로 추월당했다. 그러면서 어떤 의심도 하지 않는다. 혈압을 내리려면 하루에 30분씩 걸으라는 의사의 긴급 처방을 받은 자가 골목 앞까지 자동차를 타고 가서 거기서부터 전기로 걸음 수를 기록하는 기계에 의존하여 그 명령을 실행하겠다고 든다면, 그런 자에게는 ‘걷는 시간’이 허락되지 않는다. ‘걷는 시간’이란 분주한, 그리고 기계적인 이상한 이행 운동에 불과한 몇 십 킬로미터짜리 육상 경기 시합에서 메달을 따려는 사람에게 권유되는 보조 연습 수단을 뜻하지도 않는다. 그런 행태에는 오히려 ‘과시적인 운동 욕구’라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자기 강제가 되어버린 최근의 행동 원칙은 실현하기 힘든 목표 달성, 가능한 한 성급한 목표 달성 때문에 이제 걷는 것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오늘날 우리는 일터로 간다. 자동차를 타고. 쇼핑하러 시내에 간다. 지하철을 타고. 산에 오른다. 케이블카를 타고. 뒤에서 밀고 올라오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가능한 한 빨리 산의 정상에 오르게 해주려고. 걷는 사람의 자유로운 지각의 관점은 저절로 올라가는 케이블카에서 위로부터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불안하게 쳐다보는 시선이 아니며, 바그너가 파우스트를 쳐다보듯이 위를 향한 권위적인 그런 시선도 아니다. “박사님, 당신과 함께 산책하는 것은 감사할 만하고 유익하군요.” 오히려 이것은 자신에 대한, 자신을 향한 시선이다. 걷는 사람은 주위 환경의 정복자가 되는 게 아니라 주위 환경의 주체가 된다. 걷는 것은 ‘신랑의 왼쪽 앞에 서고 신부는 비스듬히 뒤에 선다.’라는 명문화되지 않은 예절 규칙이 적용되는 결혼식에서 마지막으로 신랑 신부가 함께 행진하는 그런 흔하디흔한 형태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걸으면서 세상을 보고 느끼고 인지하고 세상을 위해 마음을 연 한트케는 아주 달랐다.
탈 것에 몸을 싣고 가면 나는 절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걸을 때만 공간이 열리고 빈 공간들이 춤을 춘다! 걸으면서만 나는 나무에 달린 사과로 몸을 돌릴 수 있다. 걷는 사람만이 머리가 어깨 위로 자라난다. 걷는 사람만이 자기 발에 발꿈치가 있다는 것을 경험한다. 걷는 사람만이 육체를 통한 이동을 느낀다. 걷는 사람만이 높은 나무의 소리를 정확하게 듣는다.—정적을! 걷는 사람만이 만회할 수 있으며 자기 자신에게로 갈 수 있다. 걷는 사람이 생각하는 것을 유효하다.걸을 때 점차적으로 사고가 확고해지는 것에 대해 토마스 베른하르트(Thomas Bernhard: 1931~, 오스트리아 작가)는 이렇게 기술한다.
‘걷는 것’과 ‘사고하는 것’은 두 가지 형태의 동일한 개념이다. 우리는 주저하지 않고 얘기할 수 있다. 걷기를 선호하는 사람은 생각하기를 선호한다고.아도르노 역시 걷는 것에 대해 진술한 바 있다. 그는 그 유명한 이해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우리를 가르치려 한다.
정상적인 것으로서의 걷는 습관은 행복한 옛 시대부터 존재했다. 그것이 앞으로 나가는 시민적 방법이었다. 즉 가부장적인 발전. 쉼 없는 방랑, 숨 가쁜 도주에서 벗어난 육체적인 탈신비화가. 인간의 품위는 걸을 수 있는 권리, 즉 명령이나 놀라움 때문에 빼앗기지 않는 육체의 리듬감을 강력히 요구한다.낯선 사람, 낯선 것에는 느림을 통해서만 적응할 수 있다. 느리게 행함으로써, 빠름을 통해서가 아니라. —빠름을 통해서는 아무 것도 체험하지 못한다. 알지 못하는 것을 통과해 지나갈 뿐이다. 걷는 것, 그것은 고유의 시간을 요구하는 일이다. 고유의 리듬감을 찾고 그 리듬감을 실용화하는 일이다. 우리 시대에 이것은 시간의 자율성에 대해 존경심을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
태고 시대의 운동 형태인 도보는 사건의 끝, 종말에 특히 적합하다. 걸으면서 사람들은 다양한 충동에 마음을 연다. 연상, 사고의 조합, 이념의 소용돌이에 마음을 연다. 망각, 지나가는 것에도 마음을 연다. 노력을 해야만 목적 없는 시간, 육체적인 산책과 정신적인 산책의 시간이 도래한다. 가볍게 감상적으로 걷는 것과 멈추는 것이 명백한 노동 욕구를 대신한다. 이것은 평안의 상태를 향해가는 움직임으로 이런 평안은 좋은 새로운 시작을 허용함으로써 죽음과는 근본적으로 구분된다.
이마에 이별이라고 쓰여 있는 사람은
스스로를 방랑자로서만 사랑할 수 있다.크리스티안 모르겐슈테른(1971~1914, 독일의 시인)의 글이다.
이제 무엇이 중요한지를 당신은 알게 되었을 것이다. 걸어보라—그러면 당신에게 좋을 거고—이제 나는 떠날 수 있다.(칼하인츠 A. 가이슬러, 박계수 옮김, <<시간>>, 석필, 1999, 278-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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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빨리 하면 더 큰 물질적 이윤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매일 체험한다. 그러나 돈으로는 살 수 없는 우리 존재의 형태들, 즉 애정, 고마움, 사랑, 취향 등에는 가속과는 다른 시간 형태가 필요하다는 것 또한 점점 뚜렷이 감지하게 된다. 급하게, 더욱 급하게 변해가는 목적지를 향해 가는 뜀박질을 중단하고 가끔 숨을 쉬면서 자신의 뒤를 돌아보고 싶다는 희망은 점점 강해진다. 주기적인 일상의 합리성 때문에 생기는―이것은 점점 더 피상적이 되며 다시금 가속이란 결과를 초래한다―만족스럽지 못한 분주함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요구와 희망은 점점 설득력을 얻게 된다. “시간을 번다고 해서 뭐가 남지?” 이제 이런 질문은 더 이상 낮은 목소리로만 그치지 않는다. 그래도 시간을 벌기 위한 시도는 더욱 잦아진다. 그러나 시간을 획득한다는 것이 부분적으로 기만적이며 기대한 만큼, 약속한 만큼 삶의 질을 무조건 향상시켜주지는 않는다는 추측이 점차 설득력을 갖게 된다. (중략)
느림은 무엇보다 사랑과 잘 맞는다.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은 빠름이지만 사랑에서 (그리고 평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느림이다. 사랑은 느림에 의지한다. 바쁘고 일이 많으면 우리는 사랑을 잃게 되고 사랑은 노동이 된다. 시간이 있고 시간과의 전쟁을 잊을 때만 사랑받을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다. 자신을 잊고 돌멩이를 가지고 노는 아이처럼 시간적 무제한성으로 들어갈 때에만.
아이들이 시간을 대하는 태도는 성인들에게는 낯선, 창조적인 반복에 속한다. 어른들은 “우리는 이미 그렇게 해봤어.”라며 반복을 거부한다. 그러나 아이들은 반복되는 도움으로 안전, 지속, 원칙에 충실함 등을 발전시켜나간다. 아이들은 반복을 통해 사물과 진행 과정에 중요성을 부여하며 잘 알려진 것, 이미 한번 체험해본 것이라고 과소평가하는 일이 없다. (중략)
창조적인 반복이란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기억으로 단순 반복의 강박 관념을 깨뜨릴 힘을 가지고 있다. 창조적인 반복은 그 자체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잊혀진 것을 불러오는 것이다. 새로이 시작하는 것이다.(위의 책, 173-80쪽)
부디 내 걸음이 창조적인 반복 행위가 되기를! 아니, 굳이 이렇게 빌 필요 없이 걸음이야말로 창조적인 반복입니다. 늘 그게 그것인 일상에서 벗어나 나와 즐겁게 대면하는 일이니까요. 생각이 헝클어져 정리가 안 되던 것들도 걸으면 참 신기하게 아귀가 딱 맞게 됩니다. 걸음이 뭔가를 저절로 창조한 결과지요. 그러니 많이 걸으면 똑똑해질 수밖에요! 여러분, 이래도 걸을 생각이 안 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