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에 학교로 들어오는데 길가에 줄지어 선 벚나무들이 저마다 꽃을 한두 송이씩 달고 있었다. 어디에나 성질이 급한 놈(놈이라고 하니까 좀 이상하다. 뜻으로 치면 그 반대말이 어울린 텐데 쓸 엄두가 안 난다. 왜 그럴까?)이 있기 마련이다. 나도 덩달아 설렜다.
밤새 혹시 더 피었을까 봐 아침 일찍 일어나 벚나무 아래를 서성거렸다. 봄바람이 살살 내 피부를 간질인다. 바람이 꽃봉오리를 열어 꽃잎을 일으켜 세우는 것인가 보다. 동료 교수인 김선태 시인이 이번에 낸 세 번째 시집 <<살구꽃이 돌아왔다>>(창비, 2009)도 마침 옆에 있어서 아무렇게나 이곳저곳을 뒤적인다. 순서 없이 꽃을 피운 벚나무 아래서는 이렇게 읽어야 제격이겠다.
<산벚꽃>이 눈에 들어온다. 교정의 벚꽃도 피기 시작했으니 승달산의 여기저기서 산벚꽃도 그 다음은 자기 차례라며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때도 때려니와 이 시집 전체에서 내 마음에 가장 드는 작품이어서 소개하겠다.
온통 적막한 산인가 했더니
산벚꽃들, 솔숲 헤치고
불쑥불쑥 나타나
저요, 저요!
흰손을 쳐드니
불현듯, 봄산의 수업시간이
생기발랄하다
까치 똥에서 태어났으니
저 손들 차례로 이어보면
까치의 길이 다 드러나겠다
똥 떨어진 자리가
이렇게 환할 수 있다며
또 한번 여기저기서
저요, 저요!
김선태, <산벚꽃>, <<살구꽃이 돌아왔다>>, 26-7쪽.
무엇보다도 상상력이 생기발랄하다. 다 알겠지만 산벚나무는 까치가 버찌를 먹고서 그 씨를 똥으로 싼 곳에서 나온다. 밭에 일 나갔다 새참으로 수박을 먹고 누군가 똥을 싸면 거기서 다음해에 수박이 열리듯이 말이다. 나는 이 시를 읽으면서, 어쩐지 똥 맛이 나는 그 수박을 먹은 내 어린 시절의 기억을 생생하게 떠올렸다. 산벚나무를 이어놓으면 까치가 날아다닌 길이 되듯이 저 수박의 줄기를 따라가면 내 유년이 되돌아올 것만 같다.
똥과 꽃의 결합도 그럴듯하다. 가장 낮은 곳-거기다 공중에서 떨어지기까지 했다-을 거쳐야 아름다움의 정수를 지닐 수 있는 것인지 모른다. 이른바 고통의 축제다. 그리고 똥과 꽃이 이어져서 자연의 순환을 이루는 점도 놓칠 수 없다. 그러고 보니 이것도 나와 관계가 아주 없지는 않다. 내 똥을 먹은 똥돼지를 먹으며 자랐으니 말이다. 나도 돼지도 거대한 생명의 흐름을 잇는 사슬이었다. 똥을 썩혀 거름을 만든다. 그 거름으로 키운 곡식과 채소를 사람이 먹는다. 이 자연의 흐름을 무시하면서부터 똥은 냄새 나는 더러운 것으로 천대받게 되었다.
그런데 내 감각으로는 첫 행의 '온통 적막한'은 아무래도 어색하다. 산벚꽃을 강조하려다 보니 작위적인 분위기로 몰아간 것만 같다. 봄이 되었으니 산도 부산스러워야 맞지 않을까? 그런 데서 꼬마들이 활짝 피어나는 꽃처럼 마구 재잘거려야 더 어울리는 그림이 되지 않을까? 여기서만은 대조보다 화합(化合)이 훨씬 좋다. 아, 그러고 보니 화합(花合)이기도 하구나! 벚꽃이든 산벚꽃이든 꽃들의 합창과 어지러운 군무를 빨리 즐기고 싶다.
(덧붙임)
오늘 아침(4월 1일) 연구실로 오다가 찍은 벚꽃 사진 두 장 구경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