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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벚꽃

귤밭1 2009. 3. 31. 10:28

어젯밤에 학교로 들어오는데 길가에 줄지어 선 벚나무들이 저마다 꽃을 한두 송이씩 달고 있었다. 어디에나 성질이 급한 놈(놈이라고 하니까 좀 이상하다. 뜻으로 치면 그 반대말이 어울린 텐데 쓸 엄두가 안 난다. 왜 그럴까?)이 있기 마련이다. 나도 덩달아 설렜다.

 

 밤새 혹시 더 피었을까 봐 아침 일찍 일어나 벚나무 아래를 서성거렸다. 봄바람이 살살 내 피부를 간질인다. 바람이 꽃봉오리를 열어 꽃잎을 일으켜 세우는 것인가 보다. 동료 교수인 김선태 시인이 이번에 낸 세 번째 시집 <<살구꽃이 돌아왔다>>(창비, 2009)도 마침 옆에 있어서 아무렇게나 이곳저곳을 뒤적인다. 순서 없이 꽃을 피운 벚나무 아래서는 이렇게 읽어야 제격이겠다.

 

<산벚꽃>이 눈에 들어온다. 교정의 벚꽃도 피기 시작했으니 승달산의 여기저기서 산벚꽃도 그 다음은 자기 차례라며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때도 때려니와 이 시집 전체에서 내 마음에 가장 드는 작품이어서 소개하겠다.

 

온통 적막한 산인가 했더니

산벚꽃들, 솔숲 헤치고

불쑥불쑥 나타나

 

저요, 저요!

 

흰손을 쳐드니

불현듯, 봄산의 수업시간이

생기발랄하다

까치 똥에서 태어났으니

저 손들 차례로 이어보면

까치의 길이 다 드러나겠다

 

똥 떨어진 자리가

이렇게 환할 수 있다며

또 한번 여기저기서

 

저요, 저요!

 

김선태, <산벚꽃>, <<살구꽃이 돌아왔다>>, 26-7쪽.

 

무엇보다도 상상력이 생기발랄하다. 다 알겠지만 산벚나무는 까치가 버찌를 먹고서 그 씨를 똥으로 싼 곳에서 나온다. 밭에 일 나갔다 새참으로 수박을 먹고 누군가 똥을 싸면 거기서 다음해에 수박이 열리듯이 말이다. 나는 이 시를 읽으면서, 어쩐지 똥 맛이 나는 그 수박을 먹은 내 어린 시절의 기억을 생생하게 떠올렸다. 산벚나무를 이어놓으면 까치가 날아다닌 길이 되듯이 저 수박의 줄기를 따라가면 내 유년이 되돌아올 것만 같다.

 

똥과 꽃의 결합도 그럴듯하다. 가장 낮은 곳-거기다 공중에서 떨어지기까지 했다-을 거쳐야 아름다움의 정수를 지닐 수 있는 것인지 모른다. 이른바 고통의 축제다. 그리고 똥과 꽃이 이어져서 자연의 순환을 이루는 점도 놓칠 수 없다. 그러고 보니 이것도 나와 관계가 아주 없지는 않다. 내 똥을 먹은 똥돼지를 먹으며 자랐으니 말이다. 나도 돼지도 거대한 생명의 흐름을 잇는 사슬이었다. 똥을 썩혀 거름을 만든다. 그 거름으로 키운 곡식과 채소를 사람이 먹는다. 이 자연의 흐름을 무시하면서부터 똥은 냄새 나는 더러운 것으로  천대받게 되었다.  

 

그런데 내 감각으로는 첫 행의 '온통 적막한'은 아무래도 어색하다. 산벚꽃을 강조하려다 보니 작위적인 분위기로 몰아간 것만 같다. 봄이 되었으니 산도 부산스러워야 맞지 않을까? 그런 데서 꼬마들이 활짝 피어나는 꽃처럼 마구 재잘거려야 더 어울리는 그림이 되지 않을까? 여기서만은 대조보다 화합(化合)이 훨씬 좋다. 아, 그러고 보니 화합(花合)이기도 하구나! 벚꽃이든 산벚꽃이든 꽃들의 합창과 어지러운 군무를 빨리 즐기고 싶다.

 

훈이네 집으로 가는 길

 

(덧붙임)

 

오늘 아침(4월 1일) 연구실로 오다가 찍은 벚꽃 사진  두 장 구경하세요.

 

사진 1, 사진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