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난 길

좋은 시, 나쁜 시

귤밭1 2018. 8. 16. 13:32

좋은 시, 나쁜 시 / 이훈


지하철 역에 가면 승강장 안전문 유리창에 유명한 시인의 작품과 시민 공모작을 붙여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공모를 알리는 기사를 보건대 기성 시인의 작품은 시민이 추천한 것인 듯싶다. 이런 일을 벌이는 것은 참 좋다. 시민들은 시를 써 솜씨를 뽐내고, 승객들은 이들을 읽으며 잠시 동안이나마 시심을 지닐 수 있으니 시의 생활화, 대중화에 이바지하는 셈이다. 이런 생각으로 나는 시가 보이면 옆에까지 가서 다른 작품도 같이 읽어 보곤 한다.


성질이 아주 다른 두 편의 시를 같은 정거장에서 보았다. 시가 무엇인지를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라 여겨서 사진 찍어 두었다가 여기 옮긴다.


사랑한다는것 / 안도현


길가에 민들레 한 송이 피어나면

꽃잎으로 온 하늘을 다 받치고 살듯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오직 한 사람을 사무치게 사랑한다는 것은

이세상을 전체를 

비로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차고 맑은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며

우리가 서로 뜨겁게 사랑한다는 것은

그대는 나의 세상을

나는 그대의 세상을

함께 짊어지고

새벽을 향해 걸어가겠다는 것입니다



별똥 / 정지용

 

별똥 떨어진 곳,

마음에 두었다

다음 날 가 보러,

벼르다 벼르다

이젠 다 자랐소.


두 시의 차이는 뭘까? 안도현 시는 시인이 나서서 주장하는 데 비해 정지용 시는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마음의 움직임이지만 마치 볼 수 있는 풍경화처럼 사실을 제시하고 있다. 그 결과로 전자는 무슨 말을 하는지 바로 알 수 있는데, 후자는 무엇을 말하려고 저 그림을 보여 주는지 멈춰서 생각해야 한다. 이게 두 시의 결정적인 차이다. 


왜 바로 이해가 될까? 길가에 민들레 한 송이 핀 것을 두고 시인은 “꽃잎으로 온 하늘을 다 받치고 살듯이”라고 바로 해석을 내려 버린다. 독자는 그냥 이 말을 받아들이기만 해야 된다. 시인더러 왜 그렇게 보느냐고 묻는다든지, 여기서 더 나아가서 아예 저 해석에 동의할 수 없다고 하면 그 뒤에 나오는 주장이 헛것이 되어 버린다. 더는 시를 읽는 것이 불가능해진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독자가 할 일은 다음과 같다. 시인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여 시인이 주장하는 뜨거운 사랑의 성격에 동의하든지 아니면 다른 판단을 내리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시인의 지나친 단정이 눈에 거슬려서 계속 읽을 수 없다고 눈을 다른 데로 돌리는 것도 독자의 자유다. 


그러므로 이 시의 방법과는 달리, 시인이 민들레가 핀 것을 보여 주면 독자가 알아서 스스로 ‘민들레가 하늘을 받치고 사네!’ ‘사는 건 저런 거네.’ 하고 느끼도록 만들어야 한다. 구체적인 사랑의 장면을 제시하여 독자가 ‘아 사랑은 이런 거구나’ 하고 공감하고 깨닫도록 했어야 한다. 누구나 다 아는 김소월의 시 「산유화」를 예로 들면,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라고 하여 ‘왜 (들이나 집이 아니고) 산에 꽃이 혼자 피어 있을까?’ ‘혹시 외로워서 우는 걸 저런 식으로 말한 것이 아닐까?’ 하는 궁금증을 불러 일으킨다. 당연히 그 대답은 물론이고 질문마저도 독자마다 다를 수 있다. 아주 친근한 말을 써서 그 뜻을 바로 알 수 있을 것 같지만 해석해 보려고 하면 오히려 쉬워서 더 어려워지는 역설도 느낄 수 있다.


좋은 시는 대상(이미지)을 보여 주고 독자가 그걸 여러 방향에서 해석해 보도록 이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하려면 어렵다는 데 있다. 시인은 이런 일을 해야 하는 운명을 타고났으므로 괴롭다고 그 수고를 마다할 수는 없다. 그러자고 불면의 밤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이 게을러서 저런 걸 시라고 내놓은 거라고 얘기할 수밖에 없다. “세상을/ 함께 짊어지고/ 새벽을 향해 걸어가겠다”가 드러내는 상투성에 이르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막막해진다. ‘세상’은 무거운 짐이고, ‘새벽’은 희망이다. 시가 아주 싫어하는 상투적인 표현이고, 그래서 비유로 느껴지지 않는 죽은 비유의 적절한 예로 들만 하다. 이런 지적이 듣기 싫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에, 시인이 앞에 나서지 말고, 시 스스로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세상을 함께 짊어진다는 게 도대체 뭔데요?’ ‘무거운 짐 둘이서 나눠 지자고 하는 것 외에 또 다른 뜻이 있나요?’


감히 말하건대, 안도현의 저 시는 시인의 이름으로 내놔서는 안 된다. 교훈 자체로서는 어떨지 모르지만 관념적인 주장을 날것으로 드러내면 시로서는 살지 못한다. 시인이 이런 걸 아니까 시답게 보이려고 ‘민들레’니 ‘세상’이니 ‘새벽’이니 하는 말을 동원한 것일 텐데 이런 눈가림으로 독자를 속이려고 하는 태도가 사실은 더 꼴사납다. “차고 맑은 밤” 같은, 하나 마나 한 말을 하는 것도 저런 마음이 만들어 낸 참담한 결과다. 그러므로 이런 작품은 과감하게 쓰레기통에 버릴 수 있어야 시인의 자격이 있다.


반면에, 정지용 시는 짧은 동시지만 많은 얘기가 가능하다. 어른이 읽어도 된다. 앞에서 말한 대로, 마음의 움직임을 풍경화가 하듯이 보여 줘서 그렇다. 이런 방식의 시에서는 해석은 자연스럽게 독자의 몫이 된다. 자기 삶에 따라 여러 가지 얘기가 나올 수밖에 없다.


어떤 사람에게 저 시는 상실과 회한의 노래가 될 것이다. 이것저것 하다 나이를 먹고 보니 어린 시절의 꿈을 다 잃어버리고 현실 원리에 그럭저럭 맞춰 살아왔다는 느낌은 사람을 쓸쓸하게 만든다. 내 삶이 이상을 유예한 대가로 겨우 얻은 것일 수도 있다는 깨달음은 깊은 슬픔을 불러온다. 반대로, 자족의 노래로도 불릴 수 있다. 쓸데없는 데 눈 안 돌리고 살아서 이만큼 됐다는 느낌도 소중하고 따라서 존중받아야 하리라. 어린 시절의 놀이가 그렇듯이 쓸데없는 일에 눈을 팔았던 유년 시절의 아름다운 순진무구를 기리는 노래로 해석하는 것도 그럴듯하다.


참고로, 정지용의 절창  「향수」의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옯기고”에서 ‘발을 옮기’는 것이 바로 이 별똥별이다. 그러고 보면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하늘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러/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에 나오는 ‘마음’도 날이 밝으면 별똥을 찾으러 가 보리라고 벼르는 것과 이어진다는 걸 알 수 있다. 안도현도 시인이므로 이런 구절을 읽으면서, 날마다 바뀌곤 하던 어린 시절의 꿈과 아울러 이제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신세가 되어 지나간 시절을 안타깝게 되돌아보는 마음을 이렇게 손에 쥐어 주듯이 표현하는 방식에 감탄해 마지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