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평소에 우리 교육을 어떻게 하면 아이들을 효과적으로 괴롭힐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연구하는 일이라고 냉소적으로 정의하고 있다. 고등학생은 물론이고 초등학생마저도 학교 수업 마치면 학원 다니느라 놀 틈이 없다. 아이든 어른이든 놀면서 크는 건데 말이다(<놀이>를 보세요).
그런데 서울대학교를 비롯한 이른바 일류 대학들이 아이들을 괴롭히는 데 앞장서고 있다면 무슨 얘긴가 하고 깜짝 놀라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들 대학들은 '3불 정책'(대학 본고사, 고교 등급제, 기여입학제 금지) 폐지를 주장하고 있다. 어떤 서울대 교수의 자조적인 어투를 빌리면 "상아탑의 선비들이 점잖은 말로 “똑똑한 애, 돈 많은 애들 못 뽑아 대학이 발전 못하니, 금지를 풀어 달라”는 것이다. 결국 전국의 애들 모아 놓고 “너희들 중 누가 공부 젤 잘해?” “부모님 돈 많은 사람 손들어봐!”라고 하고 싶다는 것 아닌가?"(류재명, <잘난 대학이 못난 애들 탓>, 원문) 전국에서 성적이 좋은 아이들을 모아놓고서도 좋은 대학이 안 된 것을 아이들 탓으로 돌린다면 교육자로서의 자격을 부정하는 꼴이다. 다 좋은 대학교 출신들일 교수들 스스로를 모독하는 일일 뿐이다. 대학 4년 동안 학생들을 어떻게 가르쳤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들 대학이 주장하는 대로 하면 지금도 충분히 고생하는 아이들을 더 나쁜 지옥으로 몰아넣을 것이 걱정스럽다. 그리고 지방이 더 처참하게 몰락할 것도 빤히 보여서 마음을 진정시키기가 어렵다. 등급제가 도입된다면 지방에서 학교를 다녀서는 이른바 명문대학에 들어갈 가능성이 아주 줄어든다. 그러니 서울로 모여든다. 물론 현실적으로 학교의 등급이 존재하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등급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에 동의할 수가 없다.
고교등급제는 특정 학교의 과거 성적 수준을 고려하여 그 학교 출신자들의 성적을 일률적으로 유리 혹은 불리하게 조정하는 방식이다. 이는 학생에 대한 평가가 그 개인이 지닌 가능성과 성취 결과 등을 따져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기본원칙에 위배된다. 손쉽게 특정 고교 출신을 선점하려는 대학의 편의주의와 이기심에서 비롯된 고교등급제는 교육 분야의 카스트 제도에 지나지 않으며, 선배들의 실적으로 후배 학생들을 평가하는 교육연좌제의 위험을 안고 있다.(강영혜, <3불 폐지론과 대학경쟁력>, 원문. 참고로, 이 부분만 뺀다면 나는 이 글의 주장에 공감한다.)
엄연히 존재하는 학교들 사이의 격차를 못 본 것처럼 구는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더라도 서울 중심주의를 무너뜨리고 지방의 균형 발전을 생각한다면 고교 등급제는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약자를 보호한다는 차원에서 보자는 뜻이다. 고교 등급제가 실시된다면 돈이 좀 있는 집안의 조금 머리가 좋은 아이들은 높은 등급의 학교-얘기할 필요도 없이 서울 주위에 있다-로 몰려갈 것은 우리의 교육열을 생각하면 안 봐도 다 안다. 이러면 지방은 다 죽는다. 뭐, 지금도 그런 사정에 있지만....
저 수많은 '기러기 아빠'와 지겨운 공부에 지친 우리 아이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지 않은가. 어른들은 자식을 위해 행복을 유예해야 하고-정확히 말하면, 불행에 빠지고,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지옥을 살아야 한다. 그야말로 공멸이다.
공멸-김규항(<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민주화 20년. 민주주의를 절차적 차원으로 보는가, 분배나 계급 문제를 살펴보는가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적어도 개인의 자유가 몰라보게 진전된 건 사실이다. 이젠 어디를 가든 무슨 말을 하든 함부로 제한당하거나 구속받지 않는다. 그런데 개인의 자유가 오히려 더 퇴보한, 옛 군사독재 시절보다 더 퇴보한 사람들이 있다. 누구일까? 바로 아이들이다.
온 나라가 병영이던 군사독재 시절에도 아이들에게만은 자유가 있었다. 모든 아이들은 마음껏 뛰어놀며 자기들만의 시간을 보냈다. 우리는 그 느린 시간, 어른이 보기엔 별 실용적 의미가 없어 보이는 시간이야말로 우리의 정서와 인간적 면모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는 걸 안다. 그런데 지금 아이들은 어떤가? 그들의 삶은 감옥에서 지내는 수인과 다를 바 없다. 과거 방식으로 아이들을 구속하는 일, 즉 폭력이나 권위주의적 방법을 통해 아이들을 구속하는 일은 이제 적어졌고 누구나 비판적이다. 이를테면 아이들을 심한 매로 다스리는 교사는 더 이상 발붙이기가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 ‘아이의 미래’라는 명분 아래 이루어지고 있는 구속은 전사회적 합의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심지어 우리는 그 가공할 인권 탄압을 ‘교육 문제’라 부른다.
한국은 외환위기 이후 본격적인 신자유주의 개혁이 진행되면서 무한경쟁 체제로 변화했다. 돈과 물질적인 가치가 삶을 지배하게 되었고, 군사독재 시절에도 이어지던 공동체 정신이나 다른 사람들과의 우애와 연대의 심성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그 직격탄을 맞은 건 아이들이다. 아이들은 젖을 떼자마자 경쟁의 바다에 던져지고 오늘 한국의 부모들은 아이들을 사람이 아니라 ‘경쟁력 있는 상품’으로 기른다. 옛날엔 보수적인 부모도 “동무들과 서로 돕고 양보할 줄 알아야 사람이다”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이젠 진보적이라는 부모도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다. 동무는 경쟁자이며, 경쟁자를 돕고 양보하라는 건 패배하고 도태되라는 말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중학생쯤 되는 아이들이 있는 집에 가보면 오늘 아이들이 얼마나 심각한 상태에 있는지 단박에 알 수 있다. 사춘기의 반항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들은 타자에 대한 예의나 배려가 없고 소통하는 방법을 모른다. 그들은 부모에게 짜증을 내고 종종 공격적이다. 부모들은 별 도리가 없다. 오늘 한국의 부모와 자식은 엘리트 체육에서 선수와 코치의 관계와 같기 때문이다. 선수의 성적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코치들은 선수의 인간적 면모에까지 신경쓸 겨를이 없다. 설사 문제가 보인다 하더라도 이미 과도한 훈련에 심신이 포화상태에 이른 선수에게 그런 부분까지 요구한다는 건 엄두가 안 나는 일이다.
나는 지금 한국의 부모들을 비난하려는 게 아니다. 이 무한경쟁의 바다에서 내 아이가 어찌 살아갈지 근심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비난하겠는가? 나는 다만 아이들을 이렇게 키울 때 우리의 미래가 어떨지 함께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과연 이 아이들은 행복할 수 있을까? 사람은 다른 사람과의 우애나 연대 없이 행복할 수 없다. 우리는 행복이 소비나 물질적 축적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는 순간, 바로 그 순간들이라는 걸 안다. 우리가 그걸 아는 건 우리가 아이일 때 누린 자유롭고 느린 시간들, 그리고 우리가 보고 자란 부모의 삶 덕이다. 그런데 날 때부터 경쟁의 감옥에서 자란 아이들이, 성적 외엔 눈을 감는 부모들을 보고 자란 아이들이 어떻게 행복을 알 수 있겠는가? 아이들은 무려 20여 년의 인생을 수인처럼 살고 난 다음 무엇이 행복인지, 어떻게 하면 행복할 수 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경쟁에서 이기든 지든 마찬가지다.
사회가 갈수록 보수화하고 진보운동이 쇠락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의 미래는 암울하다. 그보다 더 암울한 미래가 우리 아이들을 통해 준비되고 있다. 아이들을 이렇게 키운다면, 보수와 진보가 한 몸이 된 이 미친 행진을 멈추지 않는다면 우리의 미래는 ‘공멸’뿐이다.(여기)
아이들을 불행으로 이끄는 요인들 가운데 3불 정책 폐지론에 지나친 비중을 둔 것 같다. 이런 것이 아니더라도 지금 우리 아이들은 충분히 불쌍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3불 정책 폐지론은 말이 나온 김에 내 의견을 드러내고자 거론한 것으로 읽어 주었으면 좋겠다.
아이들을 볼 때마다 이러지 않고서는 행복할 수 없는 거냐는 질문이 나온다. 동네 아이들과 밥 먹는 것도 잊은 채 흙장난을 하고 함께 모여서 눈이 시뻘개지도록 물에서 놀던 그 모습도 어느 시간 못지않게 소중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냐고 저 일류대학에 항변하고 싶어진다. 아무튼 우리는 아이나 어른이나 똑같이 불확실한 미래를 위하여 손에 확실하게 잡히는 현재를 희생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행복이 달아나는 것이 보이지 않는가!
'책 속으로 난 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이들을 놀리자 (0) | 2007.05.07 |
---|---|
빛나는 사람 (0) | 2007.05.02 |
에베레스트 (0) | 2007.04.10 |
네루다와 김선우가 젊음에게 건네는 말 (0) | 2007.04.06 |
작년에 찍은 매화 사진 보세요 (0) | 2007.03.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