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난 길

빛나는 사람

귤밭1 2007. 5. 2. 09:06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말이 있지만 실천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없어도 충분히 살 수 있는 돈을 두고도 아등바등하는 게 보통 사람들의 삶이다. 그래서 재벌들이 아들이나 가족에게 법을 어겨 가면서 재산을 물려주는 것을 좋지 않게 보면서도 선뜻 나서서 비판하기가 어렵다. 웬만해서는 물리치기 어려운 욕심이 우리 마음에도 있다는 자의식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이런 욕심이 우리에게는 아주 강한 것 같다. 서양에서 기부 문화가 일상적인 일이 되었다든지 미국의 부자들이 상속세 폐지 움직임에 반대를 한다든지 하는 것과 비교해 보면 그렇다. 막스 베버가 자본주의와 프로테스탄티즘을 연결시키는 데서 보듯이 돈을 모으는 일을 종교심이라든지 소명 의식의 차원에서 바라보는 그런 분위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리의 사정과 비교해 보면, 서양의 선진국에서는 복지 제도가 잘 마련되어 있어서 우리처럼 악착같이 돈을 벌지 않아도 되는 안정된 삶의 방식이 물질에 대해 여유를 갖게 하는 데 작용했을 터이다. 이와는 아주 달리, 우리는 저 어두운 식민지 시기를 지내고 바로 전쟁과 분단을 겪었고 아주 짧은 기간에 이른바 압축적인 근대화를 이뤘기 때문에 자손까지 책임질 수 있는 돈을 갖지 않으면 안 되는 사정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물질에 대해 천박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욕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단적인 예로 종부세에 대한 보수 신문의 반응을 보면 된다. 세금 폭탄이라는 무시무시한 말을 써가며 그들은 반대했다. 돈을 많이 벌었으면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세금을 많이 내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이런 돈 욕심이 못된 가족주의와 연결되면 가관을 이룬다. 삼성의 부자 상속을 둘러싼 잡음이 그 예다.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사정이 판이하게 다르므로 왜 미국의 부자처럼 막대한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고 자식에게는 최소한의 것만 물려주지 못하느냐고 할 수는 없더라도, 법망을 요리저리 피해 가며 저래야 하느냐는 연민의 심정을 갖게 되는 것은 막을 길이 없다(좀 다른 문제인데 나온 김에 얘기하면, 회사의 경영권을 자식에게 넘겨주는 것은 합리적인 경영의 차원에서도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많은 재벌 2세가 회사를 망해 먹은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 아래로 내려갈수록 이런 경향은 더 늘어날 것이 틀림없다. 한국과 같은 봉건적인 위계 사회에서 자식은 아버지의 후광 때문에 제대로 경영 수업을 받을 수가 없다.).

 

잘 생각해 보면 인생은 짧고 덧없다. 그리고 사람답게 사는 데 많은 물질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생명의 유한성(혹은 일회성)에 대한 겸손한 긍정의 태도가 있다면 우리는 어느 정도는 무욕의 경지에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많은 돈을 갖고도 못하는 일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도 중요하다. 돈이 필요 없다고 하면 말이 안 되지만 돈만으로는 행복을 살 수 없다.


      

아들에게 한 푼 남기지 않은 ‘진짜 부자’ -유일한 선생
 

천문학적인 돈을 기부한 빌 게이츠와 워렌 버핏의 선행이 세상의 주목을 받고 있다. 부자가 된 뒤 부를 사회에 내놓는 것만도 대단한 일이다. 그러나 천문학적인 돈을 만지면서도 애초부터 그 돈이 ‘내 것이 아니다’고 못 박았던 사람이 있었다. 부도 직위도 자신이 잠시 맡고 있다고 여기며 조금도 집착하지 않았던 유한양행의 설립자 유일한 선생(1894~1971)이었다.

 

서울시 동작구 대방동엔 유한킴벌리와 한국얀센 등 작지만 큰 기업들의 모체가 된 붉은 벽돌의 옛 유한양행 사옥이 그대로 남아있다. 유일한이 그 곳을 내려다보며 깊은 묵상에 잠겨 있다가 영면에 든 언덕 위에 집 터에 지금의 신사옥이 들어섰다.

 

빌딩에 들어서니 가장 먼저 유일한의 흉상이 반긴다. 유한양행 사장을 지낸 연만희 고문(77)은 1963년 이 회사에 입사해 총무부장 등으로 유일한을 가까이에서 보좌했다. 그는 69년 유일한이 부사장으로 근무하던 외아들과 조카에게 회사를 그만두게 했을 때 “특별한 잘못이 없는데 그렇게까지 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유일한은 “내가 죽고 나면 그들로 인해 파벌이 조성되고, 그렇게 되면 공정하게 회사가 운영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유일한은 매사에 공과 사가 분명했다. 외국을 오가는 비행기표는 물론 모든 비용을 자신의 주식배당금에서 공제하도록 했고, 공금을 사용하지 않았다.

 

반면 그는 사원들을 ‘주인’으로 우대했다. 1930년대부터 부천 소사 공장 부지에 종업원들을 위한 독신자 기숙사, 집회소, 운동장, 양어장, 수영장들을 만들고, 주식을 공개하고 사원 지주제를 도입했다.

 

인간으로서 애착을 떨구기 어려운 돈과 가족에게도 초탈한 유일한의 삶은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아버지 유기연으로부터 시작됐다. 불과 아홉 살의 유일한을 미국에 보내려하자 몸져누워 항의하던 아내에게 “자식들이 우리 것 같지만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들”이라고 설득한 아버지였다.

 

소년 유일한은 “미국의 문물을 배워 조국 동포를 구하라”는 아버지의 말을 뒤로 하고 21년 뒤에야 만나볼 어머니의 품을 떠나 그렇게 미국행 배에 올랐다. 아버지가 안겨준 돈을 몽땅 도둑맞은 채 미국 땅에 내린 유일한은 천행으로 독실한 기독교인 두 자매와 함께 살면서 신문배달 등 아르바이트를 하며 고학했다. 학비와 점심 값을 마련하기에도 역부족임에도 그는 독립투사들이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해 세운 헤이팅스소년병학교에 1909년부터 3년간 매년 여름방학 동안 훈련에 참여해 수료하기도 했다.

 

나라를 잃은 뒤 평양에서 북간도로 건너가 이국을 떠도는 가족들과 동포들의 아픔으로 밥을 삼고, 자신의 땀으로 국을 삼은 유일한은 대학을 졸업한 뒤 그 고생을 밑천으로 통조림 회사를 만들어 큰 성공을 거둔다. 그러나 그는 식민지 고국행을 결행해 1925년 유한양행을 설립했다.

 

그는 병든 동포들을 구해야한다며 의약품업을 했고, 벌어들인 돈은 교육과 공익 사업에 투자했다. 해방 뒤 유일한은 이승만의 상공부 장관 입각 요청도 거부하고, 정치자금 요청에도 응하지 않았다. 그가 다른 기업에선 엄두를 낼 수 없는 금액을 매번 세금으로 내자 당국에선 의약품을 함량을 속이는 게 틀림 없다고 보고 조사를 했으나 함량이 조금도 어긋나지 않았다고 한다. 또 한국전쟁 뒤 모르핀을 수입해 팔면 큰 이익을 남긴다고 보고하는 간부사원에게 “당장 회사를 나가라”고 호통을 친 일화는 유명하다.

 

연만희는 늘 언덕위의 자신의 집에서 물끄러미 회사를 바라보며 앉아있던 유일한에게 심심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유일한의 중국인 의사 아내 호미리는 미국으로 돌아가 자녀들과 살았기에 그는 반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하지만 유일한은 “이 시간이 내겐 가장 행복한 시간”이라며 “자네도 꼭 자신을 돌아보고 숙고할 시간을 가지라”고 충고했다. 유일한에겐 그 때가 기도 시간이었다.

 

“삶에 있어서 무엇이 더 중요한 것인가를 인식할 수 있고, 오늘날 저희들에게 주어진 좋은 것들을 충분히 즐기며, 명랑하고 참을성 있고, 친절하고 우애할 수 있는 능력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늘 이런 기도문을 외던 멋쟁이 유일한이 눈을 감은 뒤 그의 유언장이 공개됐다. 손녀 유일링에겐 대학 졸업 때까지 학비 1만 달러를 주고, 딸 재라에겐 유한중·고 안의 땅 5천 평을 주면서 학생들이 뛰노는 유한동산을 꾸미라고 했다. 그리고 외아들 일선은 대학까지 보냈으니 스스로 힘으로 살라며 한 푼도 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거대 재산은 모두 교육과 사회사업에 기증했다. 1991년 타계한 딸 유재라도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땅을 비롯하여 전 재산 205억원을 공익재단에 기부하고 빈 몸, 빈 마음으로 떠났다.

 

조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기사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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