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난 길

걷기 유행 비판에 부치는 변명

귤밭1 2011. 2. 4. 09:15
요 며칠 숙제를 내지 못한 학생처럼 부담을 느껴 왔다. 걷기가 생활과 관계 없는 특별한 취미로 국가적으로 유행하고 상품화되고 있어서 황당하다는 아래 글의 주장에 뭐라고 대꾸하고 싶은데 구차한 변명인 것만 같아 마음속으로만 생각을 굴려 왔던 것이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서 이렇게 글을 쓴다. 먼저 글을 읽어 드리고 내 얘기를 덧붙이고자 한다.


그냥 내 동네 흙길을 걷게만 하라/박홍규


걷기가 국가적으로 유행한다. 아무리 세상에서 유행이 가장 급속하고 획일적인 나라라고 해도 그렇지, 입는 것만이 아니라 먹고 마시는 것, 타는 것, 사는 집까지 유행해 정말 놀라운데, 이제는 걷기까지 유행하고 상품화되고 있다.

그러나 이 걷기 유행은 입고 먹고 타고 사는 것과 다르게 자신의 일상과 무관한 특별한 취미로, 자기가 사는 곳과 전혀 다른 먼 곳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더욱 특별하게 황당하다.

옷이야 자신을 가리고, 먹거리나 음료도 자신이 먹고 마시며, 차도 자신이 굴리고, 집도 자신이 사는 것인데, 걷기만은 자신이 사는 제 동네에서는 차가 인도까지 잡아먹어 도저히 걸을 수 없어서 차나 배나 비행기를 타고 멀리멀리 나가, 호텔까지 잡아놓고 올레길이니 둘레길이니 산티아고 가는 길이니 히말라야 트레킹이니 일본 온천길이니 하는 곳을 찾아 걸어 다닌다고 야단법석이다.

게다가 각종 나라 사람들이 쓴 걷기에 대한 온갖 부류의 책들까지 유행하고 있으니 그 점에서만은 대단한 독서의 나라, 철학의 나라, 교양의 나라다. 도시는 물론 시골에 사는 사람들까지, 아니 시골에 사는 사람일수록 더욱 더 자신이 걸어다닐 수 있는 제 동네의 길을 잃었는데, 모든 것을 상품으로 만들어 팔아먹어야 직성이 풀리는 탓인지 자본은 이제 제 기능을 잃은 우리의 다리조차 그냥 놔두지 않는다.

걷기도 유행상품 만들어 허탈

그런데 그런 걷기 유행 상품을 생태니 환경이니 자연이니 건강이니 하며 미화하고 합리화하는 언론이나 지식층의 행태가 너무 노골적이어서 더욱 놀랍다. 이는 그들이 과거에 일반 식품보다 몇 배나 비싸게 팔린 유기농 무공해 식품이니 하는 것을 독점 애호한 먹거리 유행의 주역이고, 침술이니 자연약품이니 기(氣)치료니 하는 각종 의료에 탐닉한 건강 유행 등의 중심이어서 그런지, 아니면 그래도 골프니 헬스니 하는 것을 경멸하는 정도의 수준을 갖춘 자들에게 유일하게 가능한 스포츠 아닌 스포츠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어설픈 생태주의자이거나 사이비 자연주의자인 탓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사기는 어차피 진실도, 중요한 것도 아니다. 문제는 누구에게나 자신이 걷는 길은, 자신이 사는 동네에 있어야 하고, 자신이 살아가기 위해 움직이는 데 필요한 길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자전거를 타는 길도 마찬가지다. 이 길은 대단하지도, 값비쌀 필요도, 거대할 필요도 없이 한 사람이 걸을 수 있고, 자전거 한 대가 지나갈 수 있는 폭이면 족하다. 포장이 필요하기는커녕 도리어 흙길 그대로, 잡초가 피는 대로이면 더욱 더 좋다. 세상에서 가장 어설프면서도 남발되는 벽돌 놓기도 필요 없다. 내가 사는 동네에 내가 걸을 수 있는 길이 없어, 바다 건너 섬에, 산맥 너머 타향에, 대륙 건너 외국에 내가 걸을 길을 찾아 헤맨다니 이 무슨 딱한 노릇인가? 식구를 모두 외국에 보낸 기러기라서 그런가?

누구는 바다 건너 섬이나 산 풍경이 너무 아름답기 때문에 그곳을 걷는다고 한다. 그러나 365일 대부분을 내가 사는 마을이나 동네가 아름답지 않은데, 1년에 겨우 3~4일 걷는 섬이나 산이 아름다운들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내가 평생 사는 마을이, 시골이, 도시가, 거리가 아름답지 않다면 아름다움이란 말 자체가 무의미한 것이 아닌가? 내가, 내 가족이, 내 이웃이, 내 동포가 아름답지 않고 TV 상자 속의 외국인이 아름답다고 해서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내가 매일 보는 동네가 추악한 원색 광고판으로 가득한데 평생에 한 번 갈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산티아고 가는 길이 기적같이 영성을 준다고 해도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우리 주변 멋진 풍경 왜 못 볼까

차가 전혀 다니지 않는 수만개 골목 사이 흙집에서 수십만명이 살고 있는 천년 고도 페스나 베니스, 같은 무렵에 세워진 신라의 경주는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그곳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아름다운 것은 천년 이상 걷는 사람들뿐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여러 시골은 물론 도시에도 아직 그렇게 인간을 위한 길이 있다. 그런 인간의 길이 없고, 인간의 걸음까지 유행 상품으로 타락시키는 비인간의 나라는 대한민국뿐이다. 인간답게 내 동네를 걷게 하라. 단 한 사람이 걸을 수 있을 정도로 좁아도 좋다. 포장이 아니라 흙길이어야 하니 돈 들 일도 없다. 그냥 인간으로서 내 동네 흙길을 걷게만 하라. 그 밖에 필요한 건 아무것도 없다.

박홍규: 영남대 교수·법학 hkpark@ynu.ac.kr

입력 : 2011-01-26 20:58:19ㅣ수정 : 2011-01-26 22:15:03 (원문)
읽으면서 뜨끔했다. 글쓴이의 말 그대로 나야말로 유행 따라 제주도 올레길이니 지리산 둘레길이니 하며 걸으러 돌아다녔을 뿐만 아니라 언젠가는 '산티아고 가는 길'에도 도전하려는 꿈을 꾸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글의 핵심은 걷기 유행에 대한 비판보다는 "누구에게나 자신이 걷는 길은, 자신이 사는 동네에 있어야 하고, 자신이 살아가기 위해 움직이는 데 필요한 길"이라는 주장에 있다. 그러므로 동네에서 걸을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야 한다는 요구가 나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맞다. 내 경험에 따르면, 멀리로 돈을 들이며 떠나는 데는 가까이에 걸을 만한 곳이 마땅치 않기 때문이라는 점도 작용한다. 집에서 삼십분쯤 가면 한강에 이르는데, 걸을 수 있게끔 시설을 잘 해 놓았는데도 자동차 소리가 시끄러워서 도무지 걸을 마음이 안 생긴다. 다른 데로 못 가니까 어쩔 수 없이 거기에 가는 꼴이어서 시간이 나면 차가 없는 조용한 곳을 찾아 떠나게 된다.

걷기의 생활화 정도로 정리할 수 있는 글의 주장에 전폭적으로 동의하고 또 걷기 열풍에 대한 진단에 어느 정도는 수긍하면서도 그 비판이 아무래도 지나친 것 같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어서 마음이 편하지가 않았다. 변명 삼아서 몇 마디 하고자 한다.

자기가 사는 곳을 떠나 걷는 것을 여행으로 보면 안 될까? 글쓴이는 이 여행을 두고도 황당하다느니 야단법석이라느니 하는 말을 하는지 궁금하다. 사람은 편한 일상을 누리면서 동시에 낯선 일을 겪어 보고 싶어한다. 이런 마음의 실천이 여행이 아닐까? 걷기도 이런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동네에 걷기 좋은 곳이 있어도 낯선 곳으로 떠돌고 싶은 마음을 아주 꺾지는 못한다. 집을 떠나 밖에서 며칠 보내는 것만으로도 특별한 경험일 수가 있는 것이다. 어차피 인생은 나그네 길 아닌가!

이 여행과 관련해서 얘기할 게 또 하나 있다. 글쓴이는 내가 사는 마을이 아름답지 않은데 일년에 겨우 3, 4일 마을을 떠나 아름다운 곳을 걷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묻는다.

누구는 바다 건너 섬이나 산 풍경이 너무 아름답기 때문에 그곳을 걷는다고 한다. 그러나 365일 대부분을 내가 사는 마을이나 동네가 아름답지 않은데, 1년에 겨우 3~4일 걷는 섬이나 산이 아름다운들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내가 평생 사는 마을이, 시골이, 도시가, 거리가 아름답지 않다면 아름다움이란 말 자체가 무의미한 것이 아닌가? 내가, 내 가족이, 내 이웃이, 내 동포가 아름답지 않고 TV 상자 속의 외국인이 아름답다고 해서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내가 매일 보는 동네가 추악한 원색 광고판으로 가득한데 평생에 한 번 갈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산티아고 가는 길이 기적같이 영성을 준다고 해도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글쎄, 글쓴이와 정반대로 생각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일상이 무의미하고 무미건조하니까 여행을 떠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저 짧은 3, 4일이야말로 내 삶을 돌아보고 미래를 생각하게 하는 자극제이다. 그리고 아름답고 낯선 곳을 돌아다닌 경험이 우리 마을을 아름답게 꾸미는 원동력으로도 작용할 수 있지 않을까. 섬진강 주변을 돌아다니면 4대강 사업이 절대로 시행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몸으로 깨닫게 된다. 이런 것도 여행이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유행이라는 주장에도 딴지를 걸고 싶다. 유행이라고 하지만 과거에 비해서 그렇다는 뜻이지 실제로 걸어 보면 아직은 유행이라고 하기에는 한참 모자라다. 둘레길이나 올레길을 가 보라. 이따끔 차를 대절하고 떼로 몰려오는 사람들을 빼면 평일에 한둘이 걷는 일행을 만나기가 쉽지 않아서 외로운 산길은 호젓함을 넘어서 무섭기조차 하다. 따라서 유행이라고 비꼬기 전에 일에 매달려 여유를 즐기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우리 현실을 지적하는 것이 합당한 순서가 아닐까 한다.

유행이라는 주장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좋은 유행도 있는 거 아닐까? 앞에서 걷기를 여행의 일종으로 보면 된다고 했는데 이 걷기 때문에 여행이 이제는 많이 바뀌어서 그 참다운 의미를 채워 간다는 느낌을 받는다. 차를 타고 휙휙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내가 지나온 곳과 교감하는 것이야말로 걷기의 묘미고 이것이야말로 여행의 정수가 아닌가 한다. 걷기는 이런 여행을 부추긴다. 그렇다면 이런 유행은 글쓴이와는 정반대로, 칭찬하고 격려해야 하지 않을까. 의미는 이렇게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모든 일에는 어중이떠중이가 끼어들게 마련이다. 걷기에도 왜 이런 사람이 없겠는가? 그런데 이들을 무조건 흰 눈으로만 볼 일은 아니다. 여기저기 걷다 보면 걷기를 즐기는 사람으로 바뀌기도 한다. 겉멋도 되풀이하다 보면 깊이를 동반하게 된다고 따뜻하게 생각할 일이다. 어떻게 보면 겉멋을 부리는 것은 더 나은 것을 추구하고자 하는 의욕의 표현일 수 있다. 내 예를 들기가 쑥스럽지만, 나도 처음에는 정해진 길을 따라가다가 지난번에는 호남선 기찻길을 따라 창의적으로(?) 걷기도 했다. 이런 걸 보면 사람이 늘 어중이떠중이 상태로 남아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방과 창의(혹은 창조) 사이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 글도 베껴야 는다. 그러므로 이 어중이떠중이들이 걷기 문화랄까 이런 것을 성숙하게 만드는 토양이 되기도 한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지적인 허영심으로 문학을 읽는 독자가 없다면 위대한 문학은 나올 수 없다.

동네 흙길이든 올레길이든 걸으면 나와 만나게 된다. 겉멋으로 유행 따라 걸어도 궁극에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연이 소중하다는 것을 몸으로 알게 된다. 그렇다면 오히려 여기저기 더 많이 걸어야 하는 거 아닐까.


훈이네 집으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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