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난 길

동요 <새 신> 읽기

귤밭1 2018. 3. 27. 15:05

어떤 분이 시를 해설하면서 이 동요를 인용했길래 좀 시간을 들여 음미해 봤다. 할 말이 있을 듯해서 우선 옮겨 보겠다. 아마 모두가 알고 있을 <새 신>이다.


새 신/ 윤석중


새 신을 신고 뛰어 보자 팔짝
머리가 하늘까지 닿겠네

새 신을 신고 달려 보자 휙휙
단숨에 높은 산도 넘겠네


정확한 가사를 알기 위해 인터넷에서 검색해 봤더니 첫 줄의 '팔짝'을 '폴짝'이라고 해 놓고 있는 데가 꽤 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바꿔서는 시의 맛이 달아나고 만다. 활달하고 개방적인 느낌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특히 1연의 둘째 줄을 제대로 읽으면 내 주장에 더 공감하게 될 것이다.

물자가 풍부해진 시대의 요즘 어린이들이 위의 동요에서 노래하는 저런 기분을 느끼기는 쉽지 않을 듯하다. 경제 사정에 따라서는 몇 켤레의 신발을 갖고 있는 아이들도 많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새것이 자연스럽게 선물해 주는 설렘이 아주 없지는 않겠지만 저처럼 하늘을 날 듯한 기쁨을 온몸으로 누리지는 못할 것이다. 내 어린 시절에는 신발이 다 닳아져서 못 신게 되어야 겨우 새 신을 신어 볼 수 있었다. 신발이 다 헐었다고 애기한 지 한참 지나서야 어머니는 오일장에 가서 검은 고무신을 사 갖고 왔다. 이렇게 귀한 거라 처음에는 신을 생각도 못하고 만지면 닳을세라 방에 고이 모셔 두고는 했다. 

드디어 학교 가는 날 아침이 되어서야 저 새 신을 신고 나선다. 신이 난다. 이렇게 얘기하고 보니까 앞과 뒤의 '신'이 그냥 같은 같은 뜻으로 쓰는 말로도 들린다. 동요에서 새 신을 신은 기쁨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 좀 자세히 살펴보자. 

둘째 줄에 나오는 '머리'와 '하늘'은 '발'과 '땅'에 정확하게 대응된다. '하늘까지 닿'는다고 했으니 '발'과 짝이 되는 말로 '머리' 대신에 '날개'를 상상하는 것도 그럴듯하다. 우리는 지극한 기쁨을 보통, 이미 위에서 말한 것을 되풀이하면, '하늘을 날 것 같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좀 멋을 부려 말하면, 땅에 얽매인 인간, 즉 지상적 존재가 천상의 초월적인 존재로 변신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신'은 신(神)이라고 얘기 못 할 것도 없겠다!(불경스럽게 어디에다 신을 끌어들이냐고 따지는 사람은 감히 말하건대 시를 즐길 자격이 없다.) 아무튼 새 신을 신은 기쁨과 설렘은 '내'가 뛰어가는 구체적인 공간의 한계를 훌쩍 뛰어넘어서 우주를 다 포함하고 있을 만큼 크고 넓다. 그러니 이런 분위기에 걸맞자면 앞에서 말한 대로 반드시 '팔짝'이어야 한다.

그런데 이 동요에서처럼 왜 '하늘'은 좋은 의미를 갖는 걸까? 우리는 저 하늘에 하느님이 계시다고 믿으며 하늘 쪽으로 고개를 들어 소원을 빌고 희망을 말하며 이상을 꿈꾼다. 땅을 내려다보며 이렇게 하는 사람은 아주 드물 것이다. 한마디로, 위로 오르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왜? 중력의 법칙이 작용해서다. 이렇게 하늘에 긍정적인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우리 조상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것을 '원형'적인 행위라고 한다. 조상들이 되풀이하여 한 일이 우리 후손들에게 유전되어서 배우지도 않았는데 저절로 하늘을 보면 저렇게 하게 된다고 설명한다. 굳이 유전을 끌어들이지 않고서도 자연의 원리를 받아들이는 지혜가 시킨 일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 원형들은 시대를 뛰어넘어 보편적인 공감을 얻을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이 시를 해석하고 나면 '신'을 꼭 발에 신는 것으로만 한정할 필요가 없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무엇이든 새로운 것은 사람을 저렇게 만들기 때문이다. 탄생, 새봄도 입학식도 저 '새 신'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우리는 새로 시작하면서 희망과 설렘 그리고 기쁨을 느낀다. 물론 낯선 일을 해야 하는 데서 오는 걱정이나 두려움도 없을 수는 없다. 그렇다고 괜히 부정적인 느낌에만 사로잡혀 가만히 있을 필요는 없다. 좋은 것을 겪는 데 반드시 필요한 준비 과정 정도로 여기면 된다. 희망과 기쁨을 거저 얻을 수는 없잖은가! 

둘째 연은 첫 연과 비교하면 좀 부자연스럽다. '하늘'과 '높은 산'을 같이 놓으면 그 크기와 넓이가 미치는 범위가 작아서 그에 대응하는 행위, 즉 달리기도 덩달아서 그렇게 느껴진다. 첫 연에 맞추기 위해서 억지로 짜내다 보니 저렇게 되지 않았을까? 지금 상태로서는 둘째 연이 차라리 없는 게 나을 것 같다.

자, 이제 출발이다. 새 신을 신고 머리가 하늘까지 닿을 정도로 신나게 뛰어 보자. 밖에 나가 바람의 냄새를 맡아 보니 나무도 새싹을 틔우고 새 꽃을 피울 준비를 열심히 하고 있는 게 느껴진다. 우리도 봄을 맞이하는 자연의 움직임에 발을 맞춰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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