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난 길

개는 도인이다 / 김소민

귤밭1 2020. 4. 16. 06:10

“개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지 않았다.” 밀란 쿤데라가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쓴 이 문장은 참말인가보다. 이 개는 도인, 아니 도견이다. 몽덕이(이 글의 필자가 키우는 개 이름; 옮긴 이)는 ‘나는 이런 개야’ 따위 자아상에 집착이 없다. 그러니 ‘나 같은 개를 뭐로 보고’ 따위로 성질내지 않는다. 가부좌 한 번 안 틀고 지금 이 순간을 그냥 사는 경지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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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울적할 때, 양지에서 햇볕을 쬐며 눈을 뜨는 일조차 귀찮다는 듯이 조는 개를 보면 내 일이 다 부질없어진다. 저렇게 한껏 게으름을 피워도 되는데 나는 뭐냐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남에게 어떻게 보일까 걱정하는 내가 우스워지기도 한다.

 

내 식대로 남의 눈치 안 보고 지금에 충실하는 것이 행복에 이르는 지름길이 아닐까 싶다. 물론 이런 건 아무나 누릴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도가 터야 한다. 도인은 누굴까? 나(자아)가 없는 사람이 아닐까? 아니, 나와 남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든다고 얘기하는 것이 좋겠다. 그러니 내가 누구라고 굳이 의식하거나 나를 몰라준다고 화를 낼 필요가 없다. 도인 하면 인적이 없는 깊은 산속이나 공중부양 같은 것을 얼른 연상하는데 경계(한계)를 뛰어넘는 자유자재의 경지를 드러내는 상징으로는 그럴듯한 바가 있다. 

 

그런데 개가 모두 저렇게 천국에 사는 건 아니다. 주인의 사랑을 너무 받아 옷을 입고 심지어 신을 신은 개도 많이 보인다. 개의 눈으로 자신을 보면 어떨까? 행복할까? 아닐 것 같다. 추위에 견디라고 털이 나고 맨발로 잘 뛰어다닐 수 있도록 진화했는데 저렇게 차려입으면 거추장스럽지 않을까?

 

식물도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한다. 집에 들여놓은 것이 언제냐 싶게 목말라 하는데도 물을 줄 기색이 없으면 왜 안 그렇겠는가! 반대로, 사랑이 넘쳐서 화분에 날마다 물이 흥건하면 내 엉덩이가 축축하지 않겠는가?

 

남의 처지에서 세상을 보는 지혜도 행복의 아주 중요한 덕목이다. 코로나19 사태에서 벗어나려고 사회적 거리 두기를 실천하면서 조심하는데, 종교의 자유를 내걸며 교회에 모여 예배를 보는 맹신자를 보면 저들에게 사랑하는 마음이 있나 싶어 서글퍼진다. 전염될까 걱정하거나 병에 걸려 고생하는 사람이 주위에 있는데, 자기들만 천국에 가서 무슨 재미로 살까? 내가 신이라면 저들의 기도에 귀를 막을 것이다.‘나만 행복하다’는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 혹시 그런 세상이 있다면(슬프게도 나에겐 없다) 마땅히 ‘우리 천국’이어야 한다.

 

요컨대, 타자의 실재를 무시하고서 사랑은 이뤄지지 않는다. 내 식대로 제멋대로 살아야 하지만 그것을 타자에게까지 강요해서는 안 된다. 그들에게도 나름대로 내 식이 있기 때문이다. 이 타자는 사람은 물론이고 식물이나 동물에게도 적용되어야 한다. 사람 중심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 여기에 바탕을 둬야 사랑이 집착이나 욕심, 심지어 폭력으로 변질되는 걸 막을 수 있다.(이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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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 지각해도 뛰지 않던 내가 세 시간씩 걷고 뛴다. 내가 이리 뛰다니 헥헥, 나는 헥헥, 이 개를 헥헥, 사랑하는구나, 사랑은 행동으로 하는 거구나 헥헥.(위와 같은 글)

 

이 문장은 꼭 소리 내어 읽고 싶다. 개를 따라 숨차게 뛰고 있다. 개를 사랑하는 마음이 손에 잡힐 듯하다. 사랑한다고 백 번, 천 번 외치는 것보다 이렇게 감각적으로 행동을 제시하는 게 훨씬 윗길이다.(이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