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난 길

바둑 기사 이창호의 인간적인 깊이

귤밭1 2005. 9. 18. 22:00

인터넷에서 다음과 같은 기사를 봤다. 읽으면서 이창호라는 인간의, 속이 좁은 나로서는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깊이에 머리가 저절로 숙여졌다. 여러 말 말고 그 내용을 소개하는 게 좋겠다.

9월 11일, 중국 후난성(湖南省) 샹시(湘西) 봉황현(鳳凰縣)에 있는 남방장성(南方長城)에서 벌어진 2005 남방장성 특별대국에서 세계1인자 이창호 9단이 중국의 창하오 9단과 369수까지 가는 접전끝에 4패빅으로 무승부를 이루었다. 하지만 이 대국에는 승부보다는 깨끗한 매너를 중시한 이9단의 깊은 의도가 숨어있었다.

 

각자 제한시간 50분 타임아웃제로 벌어진 이날 대국은 초반 이9단의 압도적인 우세가 종반무렵까지 이어 지던 가운데 하변과 우중앙에서 4개의 패가 나와 두 사람은 순환적인 패싸움을 벌였다. 이때 이9단이 옆에 있던 동생 이영호씨에게 무승부 의사를 밝히자 입회를 맡은 왕루난 중국기원 원장이 계속 진행하면 이9단이 승리를 하니 계속 두려면 두어도 괜찮다고 말했다. 이어 2~3차례의 순환패를 때리다가 결국 두 대국자는 4개의 순환패가 생겼으니 무승부로 판정하기를 합의했으며, 왕원장은 무승부를 선언하였다.

 

하지만 수많은 한국과 중국 네티즌들은 이9단이 유리하던 바둑을 일부러 사이좋게(?) 비기도록 만든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을 제기했다. 특히 시나닷컴에서 이 대국을 지켜보던 많은 네티즌들은 백(창9단)이 진작 던졌어야 했다는 반응을 보였으며, 일부 네티즌들은 진 것만 못하다는 의견도 쏟아 냈다. 당시 시나닷컴에서 벌어진 베팅비율은 9.8(창9단):1.1(이9단)로 이9단의 승리를 예상한 네티즌들이 훨씬 많았다. 이때 함께 현장에서 동행했던 중국 기자들은 “창9단이 얻은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은 대국이었다.”라고 평했다.

 

이와 관련해서 이9단은 “중반까지는 반면으로 내가 약 10집 가량 앞서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종반에 접어들어 시간에 쫓겨 계가가 잘 되지않았다.” 라고 말했다. 하지만 세계최강 이9단이 계가가 잘 되지않았다는 말에 설득력이 약하여 재차 왜 계가가 되지않았냐고 묻고 나서야 이9단이 무승부 의사를 밝힌 원인을 알 수 있었다.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종반에 접어들었을 무렵 수순이 이미 361수를 넘어가면서 서로의 바둑 돌이 모자라게 되자 상대가 따낸 자신의 사석을 마음대로 집어와서 대국을 이어갔다. 중국룰은 사석이 승부를 판정하는데 필요없기 때문. 그래서 사석과 집의 수로 형세를 판단하는데 익숙한 이9단은 시간에 쫓기는 상황에서 일일이 사석의 수를 모두 파악해가며 정확하게 계가를 하기가 쉽지않았다는 것. 이9단은 “물론 순환패를 해소할 수도 있으나 당시는 종반에 많이 당해서 정확하게 내가 앞서고 있는지 어떤지 몰랐다. 만약 순환패를 해소한 뒤 내가 져 버린다면 그것도 우스운 것 아닌가?”라며 절대 고의적으로(?) 무승부를 만든 것이 아님을 강조했다.

 

또하나. 물론 이9단은 이 대국을 이기려고 작심을 한다면 이길 수 있었다.당시 상황은 이9단이 제한시간 5분을 남겨두고 있는 상태이며, 창9단은 1~2분가량을 남겨두고 있는 상태. 이 대국은 50분 타임아웃제 제한시간 50분을 모두 소비하게 되면 형세의 좋고 나쁨을 떠나서 시간을 초과하는 사람이 지게 된다. 결국 순환패를 서로 계속해서 따낸다면 결국 창9단은 남은 1~2분을 넘기게 될 것이고 이9단은 2~3분이 남게 되는 것. 이에 기자가 “이런 상황이면 계속 순환패를 진행하면 자동으로 창9단이 시간패가 되는 것 아닌가? 알고 있었는가?”라고 질문을 던지자 이9단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이기면 좀…이상하지않는가?”라고 오히려 반문. 그리고 이9단은 “만약 이 대국이 국가 대항전 등 아주 중요한 대국이라면 그렇게라도 이겼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친선 대국이라…”라고 덧붙였다.(기사 출처: http://www.baduk.or.kr/news/homenews_view.asp?gul_no=507249&gdiv=1&frpg=MN)

흔히 재승박덕(才勝薄德)이라거나 재승덕(才勝德)이라고 한다. 다 알다시피 '재주가 있으나 덕이 거기에 따르지 못한다'는 뜻이다. 나는 이 말이 그리 옳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재주 없는 사람이 시기심에서 하는 말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 사회는 튀는 사람에 대한 관용이 아주 많이 모자라기 때문에, 이런 유의 말을 들을 때는 실력이 있는 사람을 따돌리기 위해서 하는 얘기가 아닌지 차분히 따져 보는 것이 좋다. 사실 박덕이라고 할 수 있는 경지에 있지 않고서는 참으로 창조적인 재능을 마음껏 발휘하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남과 다르자면 상식의 차원을 초월해야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상한 논리가 되어 버렸지만, 재능과 덕은 함께가는 것이 아닌지 모른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그 둘을 다 겸비하고 있다면 거인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내게는 이창호가 그런 사람으로 보인다.

  

바둑을 모르는 사람도 아마 이창호라는 이름은 들어 봤을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바둑에서는 세계 최고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인간의 깊이에서도 보통의 경지를 훌쩍 뛰어넘는 것 같다. 이번 시합에서 이긴 사람에게 3만달러를 주기로 했다는데 이창호 같은 사람에게 그 정도의 액수는 아무것도 아닐지 모른다. 그런 경우에 있어 보지 못해서 자신할 수 있는 일은 아니로되 짐작이 아주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 같다. 이창호 같은 처지가 되면 돈보다도 이기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할지 모른다. 명예심이나 좀더 적나라하게 호승심의 차원에서 봐도 그럴 것 같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이기면 좀…이상하지 않은가?"라고 반문했단다.

 

어떻게 하면 저런 넓은 마음이 몸에 밴 것처럼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는가? 이창호 같은 이의 경지에 이르면 싸움은 궁극적으로 자신과 하는 것인지 모른다. 상대방은 아예 보이지 않는 것이겠다. 감히 이런 사람과 비교하는 것은 도대체 말이 안 되지만, 다른 사람을 의식하고, 사소한 것에 매달려서 일희일비하는 나는 얼마나 작고 불쌍한가! 저 드높아 가는 가을 하늘처럼 넓어지자고 다짐해 본다. 가을 하늘처럼 맑으면 내 안의 탐욕이 조금은 드러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도 그 욕심을 물리치기는 또 얼마나 어려운가. 좁은 나를 생각하면 슬프지만 재주와 덕을 두루 갖춘 사람을 보는 기쁨이 그 슬픔을 누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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