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난 길

깊디깊은 사랑-<<토지>>의 용이와 월선이

귤밭1 2005. 9. 25. 21:58
"임자."
"야."
"가만히."
이불자락을 걷고 여자를 안아 무릎 위에 올린다. 쪽에서 가느다란 은비녀가 방바닥에 떨어진다.
"내 몸이 찹제."
"아니요."
"우리 많이 살았다."
"야."
내려다보고 올려다본다. 눈만 살아 있다. 월선이의 사지는 마치 새털같이 가볍게, 용이의 옷깃조차 잡을 힘이 없다.
"니 여한이 없제?"
"야. 없입니다."
"그라믄 됐다. 나도 여한이 없다."(박경리, <<토지>> 2부 5편 8장)
<<토지>>에서 가장 애처로운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을 들라면 자연스럽게 용이와 월선이를 떠올리게 된다. 월선이가 무당의 딸이라는 신분상의 이유로 그들은 결혼하지 못한 채 서로를 애타게 사랑한다. 키가 크고 훤칠하게 잘생긴 농민 용이는 마음에도 없는 강청댁과 결혼하여 그녀를 조상의 제사를 모시는 역할을 하는 사람으로 대접할 뿐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애정을 느껴 본 적이 없다. 아기를 못 낳는 강청댁은 남편이 월선이에게 마음이 가 있다는 것 때문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질투의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 그런데 무서운 전염병인 호열자로 강청댁이 죽고 나자, 용이는 이 <<토지>> 전체의 주인공인 최서희의 아버지 살해 사건에 연루되어 죽임을 당한 칠성이의 아내 임이네-이 여자는 남편이 살아 있을 때도 용이에게 노골적으로 유혹의 눈길을 보내곤 했다-를 불쌍히 여긴 나머지 관계를 맺게 되고 부부로 같이 살게 된다. 임이네는 생명력이 지나쳐 차츰 탐욕의 화신이 되는 사람이다.

 

한편 월선이는 용이와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그가 장가를 가자 자포자기하는 마음으로 절름발이인 늙은 남자의 아내가 되지만 견디지 못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다. 용이와의 관계를 운명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오직 그만을 바라보면서 살아간다.

 

최서희 집안이 망하는 과정에서 고향에서 살 수 없게 된 용이네는 간도로 이주하게 된다. 떠돌이 비슷하게 된 용이와 임이 그리고 그 사이에 태어난 홍이는, 삼촌의 도움으로 국밥집을 차린 월선에게 얹혀살게 된다. 할 일이 없게 된 임이네는 그녀의 천성적인 왕성한 생명력을 발휘하여 돈을 모으는 일에 전념하게 되고 국밥집에 들어온 돈도 몰래 자기의 것으로 삼는 일을 마다하지 않는다. 거기다가 용이는 용이대로 여자에게 의지하여 살고 있다는 것 때문에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다. 이 자존심은 간도에 와서 새로 생긴 것이 아니었다. 능력이 없는 주제에 두 여자를 거느린다는 자격지심이 늘 마음 한편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그는 임이네의 탐욕과 자존심의 상처를 견딜 수 없어서 홍이를 월선에게 맡기고 임이네와 둘이 통포슬로 농사를 지으러 떠난다. 물론 월선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변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런데 월선이가 죽을 병에 걸렸다. 용이는 농사일을 끝내고 겨울 산판에 일하러 가 있다. 월선이가 아프다는 연락이 자꾸 오고 심지어는 아들 홍이가 직접 와서 월선이가 다 죽어가고 있다는 말을 전하지만 용이는 적어도 겉으로는 끄떡도 하지 않는다. 진정으로 사랑하면서도, 따라서 당장 달려가고 싶은데도 끝까지 견디는 용이의 금욕주의는 나 같은 사람의 글 재주로서는 도저히 제대로 전할 수 없으니 느끼려면 작품을 직접 읽는 수밖에 없다. 이렇게 말해야 하는 내 무능력이 몹시 안타깝고 슬프다.

 

산판 일을 다 마치고 월선이가 죽기 직전에 용이가 찾아와서 마지막으로 사랑을 나누는 장면이 바로 위의 구절이다. 한마디로 그들은 한이 많은 사람들이다. 아마 월선이 쪽이 더했을 것이다. 슬픔, 분노 같은 감정이 압축되어 손에 잡힐 듯한 상태로 뭉친 것이 한이다. 그래서 한이 맺힌다고 한다. 한은 무겁다. 욕망 때문이다. 그래서 한을 품은 사람을 밑으로 가라앉게 만든다. 몸이 무거우니 행복할 수가 없다. 그런데 월선이는 새털같이 가볍다. 왜? 아프니까 살이 빠져서? 그럴 것이다. 한편으로는 무거운 욕망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가볍기도 하다. 그래서 이제 남은 한(여한)이 없는 것이다. 욕망을 초월한 사람은 '새털같이' 가볍게 비상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제 월선이는 육체적으로는 병들어 무력하고 곧 죽게 되겠지만 함부로 넘볼 수 없는 위엄을 지닌 인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아름답고 감동적이다. 비극이나 그 주인공이 유발하는 카타르시스의 비밀이 이 근처에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인간의 이상적인 삶의 모습을 건드리는 것은 감동을 주게 되어 있다.

 

깊디깊은 사랑임이 틀림없다. 그런데 임이네의 처지에서 보면 어떨까? 용이와 월선의 사랑의 정신적인 깊이를 강조하기 위해서 임이네의 물질적인 탐욕이 정도 이상으로 부각된 것은 아닐까? 그리고 지나치게 운명론의 시각으로 인물들을 조명하고 있다는 비판도 나올 수 있다. 용이, 월선이, 임이네 모두 시간이 흐르는 데 따라 늙고 죽어가기는 하지만 성격상의 본질적인 변화는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이다. <<토지>>의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운명이 정해 준 길을 가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둔다면 한을 놓고, 용이와 월선의 경우에서 전형적으로 드러나는 바와 같이 마음 속에서 삭이는 차원만을 강조하면서, 외부적으로 발산하여 그 한을 만들어낸 원인을 제거하는 측면이 상대적으로 모자란 것도 이해가 된다. 근본적으로 운명론에 기반을 두고 인간의 삶을 파악하고 형상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괴로울 때마다 <<토지>>의 아무 데나 펼쳐서 읽곤 하지만, 1, 2부를 읽는 지난 며칠 동안은 눈물을 많이 흘렸고 한숨도 꽤나 쉬었다. 그래서 아마 내 무거운 영혼도 조금은 가벼워졌으리라! 이른바 카타르시스를 경험한 것이다. 꼭 읽어 보기를 권하고 싶다.

 

*  전에 올렸던 글입니다.

 

훈이네 집으로 가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