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난 길

손으로 뽑는 자장면에 대한 몹시 가난한 식후감

귤밭1 2005. 12. 4. 10:33

난 자장면(짜장면이라고 해야 그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지만 자장면이라고 써야 맞다고 하니 할 수 없이 따르기로 한다)을 좋아한다. 그래서 맛있는 자장면에 대해 얘기한 적도 있다(여기를 보세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쉽게 찾을 수 없는 곳에 있거나 이제는 없어져 버려서 기억으로만 남게 되었다고 해야 맞다.

 

그런데 그 맛있는 자장면을 마음만 먹는다면 날마다라도 먹을 수 있는 곳이 있단다(마음도 음식도 다 먹는 것이다!). 어제는 평생교육원 수업을 마치고 언제나처럼 연구실에서 책을 보기도 하고 멍하게 있기도 하다가 12시에 숙소에 들어가서 신문을 읽는데 거기에 손으로 만드는 자장면이 소개되어 있는 것이었다. 눈이야 떠 봤자 별로 구별이 안 되지만 아무튼 슬슬 오던 잠이 다 달아나 버렸다. 내가 사는 데서 조금만 걸으면 갈 수 있는 가까운 곳에 그 중국집이 있다는 것이다. 보통 때면 금방 잠이 드는데 어제(사실은 오늘인데)는 도대체 그 자장면이 어떤 맛일지가 궁금하고 그 맛을 볼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마구 설레서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서정주의 말투를 빌리면 간밤엔 무서리가 내린 곳도 있을 법하다.

 

기사 읽어 드리겠다.


손님이 울면 ‘눈물 자장’은 웃는다
 ‘고집있는 중국집’ 이문길·지선이씨 부부


문을 힘차게 밀고 들어온 머리 희끗희끗하신 수녀님이 앉자마자 큰 소리로 외친다.
“아저씨, 자장면 곱배기”
물어 보았다. “단골이세요?”
“아뇨. 처음 와요.”
“그런데 곱배기를 시키시나요?”
“문에 써놓은 글을 봐요. ’한 그릇 먹어보고 눈물을 흘려 줄 음식을 내 혼신의 힘을 다해 만들고 싶다’고….”
30분 차를 타고 이 중국집을 찾아 온 그 수녀님은 자장면 곱배기를 단숨에 드시곤, “그래, 바로 이 맛이야”라며 입가의 자장을 닦아 내신다.


이 중국집은 단골들에게 ‘눈물의 자장면’집으로 불린다.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 담벽을 마주한 채 식탁이 단지 네개 밖에 없는 조그만 중국 음식집. 이 집에는 종업원이 없다. 남편인 이문길(48)씨가 주방장이자, 사장이다. 아내 지선이(46)씨는 종원업이자, 배달원이다. 이씨는 30년 경력의 손자장면을 뽑아낸다. 전체 중국집에서 기계면이 95%이상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씨는 직접 밀가루를 반죽하고, 주문을 받아야 뽑아내는 힘든 일을 묵묵히 해낸다.

 

술 안판다… 50m 넘으면 배달 사절
돈 댈테니 동업하자는 제의에
“주문 늘면 수타 감당못해” 거절
누구라도 맛있어 눈물 흘려줄
자장면위해 30년 원칙 지킨다


서울시내 택시 운전기사들이 ‘가장 맛있는 손자장면집’으로 꼽는다는 이 중국집은 단지 자장면 맛 만으로 손님을 부르는 것이 아니다. 벽에 붙어 있는 메뉴판엔 붉은 글씨로 ‘술 반입 판매 절대 금지’라고 써 있다. ‘고량주’ 가 상징인 중국 집에서 술을 팔지도 않고, 손님이 외부에서 사다가 먹는 것도 ‘절대 금지’하다니.

 

“동네 어린이들이 자장면 먹으러 옵니다. 아이들 앞에서 어른들이 술을 먹는 것은 비교육적입니다. 그래서 술은 팔지 않습니다.” 술을 팔지 않으니 당연히 매상이 올라가는 ‘안주 요리’도 없다. 안판다. 1만원짜리 탕수육과 1만1천원짜리 잡채가 요리의 전부이다.

 

그러고 보니 굵은 사인펜으로 써 비닐로 싸서 벽에 붙여 놓은 빛 바랜 메뉴판이 ‘재미’있다.
‘영업 시작 시간 오전 11시 37분, 영업 종료 시간 오후 8시 30분’
“왜 11시 37분인가요?”
“아침 8시에 출근해서 밀가루 반죽, 양파 다듬어 자장 만들고 하면 11시35분께 준비가 끝납니다.”


‘이용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삿말도 영어와 일본말로 써 놓았다. 음료수는 ‘셀프 서비스’라며 어색한 중국말(水自給式)로도 써 놓았다. 문에 써 놓은 문구에 다시 눈길이 간다. “지구촌에 살고 있는 그 어떤 사람도 한그릇 먹어보고….”비록 10평도 안되는 뒷골목 중국집이지만 혹시 들릴 외국인에 대한 배려인가 보다.

 

한 쪽 벽엔 둥근 벽시계가 두 개 나란히 걸려있다.
“동네 가내 공장에서 매일 오후 1시에 자장면 2개를 배달해 달라고 했어요. 시간을 꼭 지켜야 하는데 혹시 시계 한 개가 멈출까봐서 두 개를….”

 

이쯤되면 이 집 주인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경남 거창의 가난한 농민 집에서 6남1녀의 세째 아들로 태어났다. 중학교 졸업후 고교 진학을 포기한채 거창군의 한 중국집에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갔다. 취직하기 위해서였다. 취직 시험을 치뤘다. 시험은 자장면 그릇에 물을 담고, 그것을 나무 배달통에 넣어, 그 나무 배달통을 자전거 뒤에 싣고, 동네 한 바퀴를 돌아 가장 적게 물을 흘려야 뽑혔다.

 

간신히 취직은 했으나, 주방장은 기술을 가르쳐 주질 않았다. ‘기술자’가 되면 월급을 많이 줘야 하기 때문이었다. 주방장이 자는 동안 몰래 주방에 가서 반죽하는 것을 연습하다가 엄청 두들겨 맞기도 했다. 1년 고생하다가 서울 영등포 ‘홍콩’이라는 중국집에 취직해 요리를 익혔다. 나이가 돼 입대를 했다. 전방 취사병이었으나 부대 쌀 소비가 많아져 장교 식당으로 강제로 옮겨졌다. 이씨가 만들던 부대 사병 식당 음식이 갑자기 맛있어져 쌀 소비가 늘었기 때문이다.

 

제대 후 시골 아버지를 졸랐다. 아들의 간청을 모른채 할 수 없었던 아버지는 소 두 마리를 팔아 아들에게 장사 밑천으로 대줬다. 당시 250만원. 이씨의 월급이 3만원이었으니 큰 돈이다. “아버지는 팔려가는 두마리 소의 고삐를 잡으며 안타까워 하셨어요. 그때 아버지의 눈시울을 생각하면서 이를 악물고 일했어요.”

 

그 밑천으로 식탁 2개짜리 중국집을 차렸다. 25년전이니 그동안 두배로 가게를 키운 셈이다. 그동안 돈을 벌 기회도 많았다. 워낙 손자장면 맛이 좋다보니, 사업 자금을 댈 터이니 같이 식당을 크게 하자는 제의가 줄을 이었다.

 

“용산과 유성에 큰 건물이 있다는 그 사장님은 5년째 조르고 있어요. 얼마 전에 한 친척도 조르더군요.”
왜 안할까?
“양심이 허락하지 않습니다. 손으로 뽑어낼 수 있는 자장면의 양이 한계가 있는데, 주문이 많으면 주방에서 살짝 기계로 뽑은 면을 섞어야 합니다.”

 

대개 이런 원칙주의자, 도덕주의자의 부인은 고생하기 마련이다. 이씨를 중매로 만나 결혼한 아내 지씨는 이젠 초탈한 표정이다.
“말하면 뭐해요. 싸우기도 많이 싸웠죠.”

이씨는 식당에서 50m 이상 떨어진 집에서 주문하면 배달을 ‘거부’한다. 아내 지씨가 철가방을 들고 배달하기 때문에 거리가 멀면 손자장면이 불기 때문이다. 한때 ‘느림 저속 배달’이라고 써 붙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씨는 고집스럽게 원칙을 지키는 남편이 미덥기만 하다.

 

식당 한 켠의 어항엔 물고기 대신 주인장이 아끼는 각종 물건이 담아져 있다. 7년 사용한 핸드폰과 삐삐, 등산용 버너, 자신의 군번줄, 등등. 그 사이에 메모지에 이씨가 젊은 시절 쓴 싯귀도 있다.

 

“눈을 감고 있으면 밤에서 곧바로 아침이다/ 난 늘 그랬듯이 주방에서 자장면을 만들고 또 설겆이를 한다/ 밤하늘 별처럼 수많은 단골 손님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잠깐씩 느끼면서.”

 

글 이길우 선임기자 (기사 원문)

고집스러운 주인도 멋지지 않은가! 맛과 멋이 어우러질 이 중국집에 빨리 가고 싶다. (2005. 1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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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점심 시간에 드디어 그 중국집에 갔습니다. 음식점은 효창 공원을 끼고 도는 길에 있어서 바로 찾을 수 있었습니다. 목포에 가고 집으로 올 때 기차를 타고 내리는 곳이 용산역인데 한여름을 빼고는 꼭 걸어다닙니다. 한 40분쯤 걸리는데 바로 이 효창공원을 지나게 됩니다. 도시라는 삭막한 곳에 나무도 있고 한 격이라 이곳을 지날 때면 절로 기분이 좋아집니니다. 이제는 좋아하는 음식점까지 발견했으니 더 바랄 게 없지요. 공원, 냉면, 자장면이 가까이(정확히 말하면 다 가까이 있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냉면집은 집에서 30분은 걸어야 하니까요) 있으니까요. 우리 딸은 우리 동네가 후미졌다고 불평을 쏟아내지만 난 좋기만 합니다.

 

아니, 자장면 얘기를 해야 하는데 딴 데로 가 버렸네요. 정작 맛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어서 그런 것이라고 어여삐 여겨 주시기 바랍니다. 한마디로 하면, 아주 맛있게 먹었습니다. 주인이 손으로 면을 만드는 것도 보였는데 옛날처럼 땅땅 치는 소리는 크게 그리고 많이 안 들리더라고요. 기사에서 소개된 대로 네 사람이 앉을 수 있는 식탁이 네 개 있는 조그만 덴데 손님이 많아서 서 있기도 할 정도라 자장면 대기가 바빠서 그런 것이 아닐까 짐작해 봤습니다. 바로 이번 주에 신문에 소개되었으니 그럴 만도 하지요. 간자장이 메뉴에는 올라 있는데 어제는 자장면만 주문할 수 있더라고요. 자장면 맛은 면도 면이지만 자장이 좋아야 하는데 이 집의 것은 보통 먹는 것과는 달라서 기분이 좋았습니다. 초등학교 때 처음 먹었던 자장면의 그 장 맛이었어요. 워낙 감각이 둔해서 직접 드셔 봐야 그 맛을 알 수 있다고밖에 못하겠네요. 어떤 책을 읽다가 프랑스에서 와인의 맛과 향기를 표현하는 말이 수백 가지 있다고 해서 놀랐는데 거기까지는 못 가더라도 좋아한다고 하면서 그저 맛이 좋다고밖에 할 수 없는 제 자신의 가난한 감각이 몹시 불쌍해집니다. 시작했으니 이 와인 맛 얘기도 소개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와인의 맛에 대한 프랑스어의 풍부한 표현력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일본에서는 고작해야 단맛과 쓴맛, 보디(입이 느끼는 와인의 밀도, 중량감의 정도를 나타내기 위한 표현-옮긴이 주석)가 있고 없고 하는 정도의 표현밖에 일반화되지 않았는데, 프랑스인은 모든 측면에서 수백 종의 표현법을 펼쳐내며 와인 하나하나가 가진 맛의 차이를 명확하게 규정하려고 한다. 언어로 표현될 때 느낌은 비로소 인식이 된다. 프랑스인은 와인을 맛볼 때, 일본이 와인을 마실 때보다 수십 배나 세세하게 맛을 인식하고 있는 셈이다.

 

(중략) 와인을 마시고 맛이 좋으니 나쁘니 하는 정도밖에 말하지 못하는 사람은, 어떤 음악을 듣고도 좋았다거나 시사하다고밖에 말하지 못하는 사람과 다를 것이 없다. 와인을 마시는 행위가 생리적 행위에 머물 뿐, 문화적 행위로 승화되지 못한 것이다.(다치바나 다카시, 이규원 옮김, <<사색기행>>, 청어람미디어, 2005, 144-5쪽. 참고로, 다카시는 <<청춘 표류>>(이 책에 대해서는 여기를 보세요)의 지은이이기도 합니다.)

지은이의 말을 곧이곧대로 들으면 큰일 납니다. 일본 최고의 와인 전문가와 함께 한 달 이상 프랑스의 포도 농장을 직접 돌아다니면서 최고급의 와인을 맛 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와인 전문가지요. 그렇다면 맛 있다는 말 한 가지밖에 못하는 나는 뭔가요? 말로 표현하지 못하면 아무리 먹어도 안 먹은 것이나 마찬가지지요! 글 쓰기에 대해서 얘기할 때 바로 제가 강조하는 것입니다. 표현하지 못하면 (어떤 일을) 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입니다. 아무튼 이 세상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넓고 깊은 것 같습니다.

 

원래 글을 시작할 때는 맛있는 음식을 먹는 기쁨을 얘기하고자 한 것이었는데 하다 보니 이렇게 되어 버렸습니다. 제가 못난 탓입니다. 글이 혼자 걸어간다는 느낌입니다.

 

 

훈이네 집으로 가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