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난 길

집의 몇 가지 이미지들

귤밭1 2005. 11. 25. 08:22

집 하면 대체로 다음과 같은 느낌을 갖게 될 것이다.

세 사람은 감천 가는 도중에 있는 마지막 마을로 들어섰다. 마을 어귀의 얼어붙은 개천 위로 물오리들이 종종걸음을 치거나 주위를 선회하고 있었다. 마을의 골목길은 조용했고, 굴뚝에서 매캐한 청솔 연기 냄새가 돌담을 휩싸고 있었는데 나직한 창호지의 들창 안에서는 사람들의 따뜻한 말소리들이 불투명하게 들려 왔다.(황석영, <<삼포 가는 길>>(<<황석영 중단편 전집>> 2권), 창작과비평사, 2000, 217쪽)

 

불이 생기니까 세 사람 모두가 먼 곳에서 지금 막 집에 도착한 느낌이 들었고, 잠이 왔다. 영달이가 긴 나무를 무릎으로 꺾어 불 위에 얹고, 눈물을 흘려 가며 입김을 불어 대는 모양을 백화는 이윽히 바라보고 있었다.

"댁에...... 괜찮은 사내야. 나는 아주 치사한 건달인 줄 알았어."(218-9쪽)

집은 무엇보다도 어머니의 아늑한 품이 표상하는 인정이 흐르는 곳이다. 구체적으로 거기서는 가족들의 따뜻한 말소리가 들리고 걱정 없이 피곤한 몸을 뉘일 수 있다. 비록 "초라한 지붕"이지만 식구들이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어 도란도란거리는 곳"(정지용, <향수>)이다. 당연히 사람들은 그곳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신뢰할 수 있게 된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얼마든지 생긴다. 식구끼리 마음이 맞지 않아서 가출(家出)하기도 하는 것이다. 여기에다 사회적인 조건 때문에 집이 안온한 곳일 수 없게 되는 경우도 흔해졌다. 그래서 여자가 이혼하여 혼자 살게 되기도 한다.

당신은 마을에서도 한참 벗어난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괭이밥나무 집에 살고 있었습니다. 뭇사내들도 눈비가 오거나 바람이 심하게 부는 밤이면 밖으로 뛰쳐나가기 십상인 그런 을씨년스러운 집이었습니다. 마당가엔 검은 나무가 한 주 서 있었지요. 처음에 나는 그걸 밤나무로 알았더랬습니다. 아무래도 긴가민가 싶어 인옥이 형한테 물었지요.

 

"밤에 고양이가 올라가 혼자 밥 먹는 나무여. 이제 알건남?"(윤대녕, <상춘곡>, <<많은 별들이 한곳으로 흘러갔다>>, 생각의나무, 1999, 41쪽)

괭이밥나무 집은 마을에서 떨어져 있다. 다시 말하면 여러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 갖는 의미를 전적으로 배제하고 있다. 그러므로 '을씨년스러운' 느낌을 주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밤'이 되면 고양이가 이 나무에 올라가 '혼자' 밥을 먹는다. 사람이 하는 일 가운데 혼자 밥 먹는 것만큼 처량한 것도 많지 않을 것이다. 이런 어두운 느낌을 강화해 주는 것은 밤이라는 요소이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마을의 '낮'과 대비된다고 할 수 있다. 밤이어서 나무도 '검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주인공이 잘못 알아본 밤나무도 밤(栗)나무가 아니라 밤(夜)나무로 읽힌다. 그런데 여기서 밤이나 검은 색은 외롭고 단절된 분위기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생명을 거세한 죽음의 이미지이기도 한 것이다.

 

더 심한 경우로 아예 아무도 살지 않은 빈집도 드물지 않다. 특히 사람이 살지 않은 지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볼품 없이 퇴락한 빈집은 보는 사람을 한없이 슬프게 한다. 무엇보다도 집을 버리고 떠날 수밖에 없었던 정황이 궁금하고 아울러 안타까운 마음을 갖게 하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어떻게 사람이 살던 때와 저렇게 달라질 수 있는가 하는, 짧은 시간 동안에 일어난 커다란 변화에 대한 놀라움이 섞인 허무감을 느끼게도 한다.

대청으로 들락거리게 만들어놓은 분합문 옆의 반질거리던 쪽문 발디딤판은 흐치흐치하게 퇴색된 데다 받침대까지 기울어져 더 이상 그리로는 출입이 가능하지 않을 것 같았다. 한때는 처가살이하는 큰매형의 식솔까지 합쳐 열한 명이나 되는 대식구가 밤낮없이 들락거리던 쪽문의 발디딤판이었는데, 과연 그게 가능이나 했었던가 싶게 나무판대기는 얇은 것이었다. 조금만 세게 내려 밟아도 금방 부서져버릴 것 같은 그것이 수년간 뻔질나게 드나들던 열한 식구의 체중을 끄떡없이 견뎠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이미 생명이 없어진 나무라도, 외부의 지속적인 충격과 자극이 있는 한 그 물질의 구성분자들은 밀도를 유지하기 위한 긴장을 늦추지 않았음에 틀림없었다. 유기물이든 무기물이든, 아무도 건드려주지 않을 때 비로소 약해지고, 썩고 해체되는 거였다. 고향집은 그렇게 무너져 가고 있었다. (구효서, <흔적>, 전상국 외, <<2002년 현장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 소설>>, 현대문학, 2002, 162쪽.)
사람들 사이의 소통이 사라졌을 때의 결과를 충격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우리 삶이야말로 이런 빈집 속의 삶인지도 모른다. 이제 우리의 대표적인 주거 형태는 아파트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 추세는 더 강화될 것이다. 따라서 집에 대한 이미지가 달라지는 것은 당연하다. 무엇보다도 자주 옮겨다녀야 한다. 또 재산으로서의 의미가 굉장히 커졌다. 그리고 이웃과 단절되었다. 집이 오래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식구들뿐만 아니라 동네 사람들의 끊임없는 출입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이웃과 소통하지 않은 아파트는 겉으로는 멀쩡하지만 안으로는 '약해지고, 썩고 해체되는 건'지도 모른다. 아파트 한 채를 소유하기 위해 애를 쓰는 것이 우리 삶이라고 하는 것을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라면 우리 인생은 너무 허망한 것인지도 모른다.

 

훈이네 집으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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