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2003. 2. 2)는 지쳤는지 늦게 깼다. 일어나 시계를 보니 8시가 거의 다 되었다. 가다가 아침을 먹기로 하고 출발했다. 광양제철소를 지나는데 참 넓다. 굴뚝에서는 연기가 나온다. 아무리 가도 먹을 만한 데는 안 보이고 편의점이 보이길래 간단하게 만두로 요기하기로 한다. 가다 보면 식당이 나오겠지.
기차를 타고 내려오면서 본 섬진강의 아름다움에 이끌려 2번 국도를 버리고 59번 도로로 들어선다. 59번에 이어지는 19번 길은 바로 섬진강을 따라올라가기 때문이다. 역시 잘 골랐다. 옛길이다. 새로 포장하기는 했지만 길 주위에 마을이 있는 것으로 보면 그렇다. 목 말라서 아무 데나 들어가 물을 청하면 얻어먹을 수 있을 것만 같다. 차도 잘 다니지 않아서 좋다. 마을이 있는 길을 지나는데 어른 주먹만한 감 두개와 귤 한개 그리고 강정이 길가에 놓여 있다. 아마 설을 맞아서 마을 어른들이 나같이 배고픈 사람이나 귀신을 위하여 놓아둔 것 같다. 아침도 제대로 못 먹었는데 잘 됐다. 감 한개를 집어들었다. 맛있어서 두 개를 다 가질까 하다가 하나는 그냥 두기로 한다. 나같이 배를 곯은 이가 있을지 모른다. 아니면 후손이 없어 대접 받지 못한 귀신이 지나갈 수도 있다. 배도 채웠겠다, 차도 드문드문 다니겠다, 마음이 느긋해진다.
이제 19번 도로다. 하동, 구례로 이어지는 길이다. 먼저, 재첩국밥(사진)으로 점심을 먹는다. 맑은 국물이 입맛을 끌어당긴다. 주인은 처음부터 밥을 두 그릇 내놓는다. 배낭을 진 것을 보고 그랬을까? 다른 사람에게도 그러는지 모르는 채로 나그네로서는 참 고마운 일이다. 한 그릇만 먹기는 했지만. 드디어 강이 나온다. 바다나 다름없다. 이제부터 강(섬진강 1, 섬진강 2, 섬진강 3)을 따라 길이 나 있다. 세갈래 길 가운데 세워진 간판에는 유홍준이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에서 이 길을 두고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이라고 했다고 써 있다(정확하게 옮긴 것인지 자신할 수가 없다. 내 기억력은 이 정도다. 나중에 사진을 봤더니 '한국에서'가 아니라 '세상에서'다(사진 참조). 세상에! 나는 이런 지나친 자기 중심주의가 아주 싫다. 그래서 제대로 기억을 못했나 보다.). 이 부분을 직접 읽어 보기로 하자.
기찻길이 아닌 자동차 길로 말한다면 단연코 섬진강을 따라가는 길이 아름답다. 섬진강은 남원 지나 곡성부터 물이 차츰 붇기 시작하여 조계산 쪽에서 흘러나오는 보성강(일명 압록강)과 합수머리를 이루는 압록부터 장히 강다운 면모를 갖춘다. 여기부터 하동까지 백리 길, 지리산 노고단을 저 멀리 두고 왕시루봉, 형제봉에서 뻗어내린 산자락 아랫도리를 끼고 섬진강을 따라가는 길은 이 세상에서 있기 힘든 아름다운 길이다.(유홍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3>>, 창작과비평사, 1997, 44쪽)정확히 말하면 유홍준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이라고 하지 않고 아름다움을 강조하기 위하여 수사적으로 '세상'을 동원한 것이다. 아무튼 매우 아름다운 길인 것은 분명하다. 시원한 강물을 따라 난 길 옆에는 사람이 다닐 수 있는 공간이 널찍하게 되어 있어서 걷기에는 그만이다. 제주도의 일주도로와 더불어 내가 걸어 본 길 가운데서는 최고라고 할 만하다.
오늘(2003. 2. 3) 같은 날씨면 추울 거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따뜻한 집에서 하는 짐작일 뿐이다. 직접 걸어 보면 오늘 같은 날이야말로 최고의 조건을 갖췄다는 것을 알게 된다. 겨울에는 옷을 따뜻하게 입으므로 보통의 날씨에는 걷다 보면 오히려 땀이 난다. 그런데 오늘은 기온이 낮으므로 땀이 안 나와서 쾌적하다. 강가라 바람이 많이 불기는 하지만 열심히 걸으면 그리 문제가 되지 않는다. 바람에 얼굴이 빨갛게 얼기는 해도 귀마개만 잘하면 그 정도야 얼마든지 견딜 수 있다. 이런 조건에서야말로 한없이 단순해질 수 있다. 다른 것 생각할 필요 없이 바람과 손을 곱게 만드는 추위만이 숙제처럼 다가오기 때문이다. 수준이 낮은 나도 이럴 때는 걷는 것이 수행임을 조금은 짐작하겠다.
하동 읍내에 거의 다 오면 강 옆으로 난 조그만 길이 있다. 지금까지의 큰길을 버리고 이 길(사진)로 들어선다. 일차선이다. 아마 옛날 길일 것이다. 차는 거의 없고 바로 길 왼쪽으로는 문패가 보일 정도로 집들이 가까이 있다. 김갑수라는 이름이 보인다. 물론 오른쪽으로는 바로 강물이 철썩이는 소리가 들리는 강이고(사진). 구례까지 계속하여 걷고 싶다. 그래도 다음에 본격적으로 섬진강을 따라 걷자면 이번에는 참는 것이 좋겠다. 마지막 곶감을 아껴두는 마음이 된다.
좀 일찍 하동에 도착했다. 여관을 정하고 한숨 자고 나서 저녁 먹고 이 피시방에 이렇게 앉아 있다.
내일은 진주로 향한다. 오늘도 어제처럼 여러분이 응원해 준 덕분에 아무 이상 없이 즐겁게 잘 걸을 수 있었다. 자연이 아름다운 것도 좋은 사람들이 옆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고마운 일이다. 나는 복도 많다.
(덧붙임) 광양 지나고 섬진대교를 넘으면 경상남도다. 그런가 보다 했는데 하동에 와서 음식점에 들렀더니 경상도가 맞기는 맞다. 손님들이 말하는 사투리가 나를 이방인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큰돈 안 들이고 외국 여행하는 느낌이서 이 기분도 괜찮다. 사투리의 원형을 잘 보존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밥 먹으면서 했다. 제주도의 고향에 가 보면 아이들이 제주도 말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한다. 교육도 교육이지만 무엇보다 텔레비전의 영향이 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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