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오른쪽 무릎이 조금 아플 뿐 다른 데는 다 이상 무입니다. 다 여러분 덕분입니다.
8시쯤에 여관을 나왔습니다. 아침 식사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시외버스 정류장에 갔으나 문을 연 곳이 안 보여 큰길가에 있는 김밥집에 들어갔습니다. 아침에는 이런 김밥집이 제일 좋습니다. 일찍 문을 열기도 하고 값도 아주 싸기 때문입니다. 된장찌개를 먹으면서 마음속으로 '김밥집이여, 영원하라!'는 찬가를 부릅니다. 여행하면서 아침에 밥을 제대로 먹으려면 이런 곳이 있어야 하므로 나로서는 아주 절실한 노래지요.
오늘은 이제까지의 도보 여행 가운데서 가장 긴 거리를 걸어야 합니다. 48킬로미터 정도가 되니까요. 늦게 출발했으므로 다 걸을 수는 없을 테고 가는 데까지 가 보다가 진주 가까이 가서 버스를 타자고 계획을 잡았습니다.
구례로 가는 길에 대한 미련이 아침까지도 남았으나 나중에 그 기쁨을 온전하게 누리기로 하고 진주로 가는 2번 국도로 접어듭니다. 곧 이 길의 매력에 빠져들어 버렸습니다. 산길인 것입니다. 지리산 자락이라 산을 에돌아가도록 길이 나 있어서 구불구불합니다. 처음에는 대체로 오르막이다가 12시쯤 돼서는 내리막입니다. 가까이에 남해고속도로가 지나가선지 차도 많지 않습니다. 어떤 때는 한참 동안 차가 지나가지 않아 적막감에 외로움을 느낄 지경이 되기도 했습니다. 광양에서 하동으로 오는 길 못지않게 좋습니다. 도보 여행하실 분들은 이 길을 꼭 걸어 보기 바랍니다.
마을이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만 가게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구 수가 많지 못했습니다. 12시 좀 지나 주유소에 붙은 가게가 있어 문을 열려는데 잠겨 있습니다. 문을 두드렸는데 아이가 안에 있었습니다. 엄마를 부르는 것으로 보아 방안에 어른이 있는 것이 틀림없는데 감감무소식입니다. 아이들이 없어서 문을 닫아 버린 학교도 보였습니다. 이러니 가게나 식당이 있을 리가 없지요. 아이들이 없는 곳에 희망은 없지요.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화의 물결은 점점 더 시골의 삶을 어렵게 할 것입니다.
12시가 조금 지났을 뿐인데 갑자기 배가 고파집니다. 출츨해서 과자라도 좀 사먹고 싶었는데 주유소의 가게가 닫힌 탓으로 내 꿈(?)이 좌절된 결과지요. 내 하는 꼴이 아이와 다를 바가 없다고 혀를 차도 어쩔 수 없습니다. 제 스스로도 늘 느끼는 거니까요. 그런데 조바심이 날수록 식당도 가게도 안 나타나는 거 있지요. 한 끼 안 먹으면 무슨 큰일이나 날 것처럼 내 마음은 앙앙불락입니다. 마을을 지나고 나서 기대가 무너지고 말면 점심 못 먹는다고 죽는 거냐고 제법 의젓하게 체념하다가도 또 마을이 저만치서 보이면 새로운 기대로 부풀어오릅니다. 사먹을 데가 안 보이면 아무 집이나 들어가서 라면이라도 끓여 달라고 부탁할 생각까지 합니다. 다시 마을이 나타나면, 당연히, 죽을 정도는 아니므로 몸이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마을이 나타나고 지나가고 하는 데 따라서 긴장과 이완의 주기적인 되풀이를 거칩니다. 물론, 나는 왜 이 정도밖에 안 되느냐는 자책도 늘어납니다. 이런 내가 가여워집니다. 끝까지 죽으라는 법은 없는 모양입니다. 한시 반 정도 되었을까요, 드디어 식당도 가게도 다 있는 북천이라는 곳에 이르렀습니다. 오늘의 내게는 어디보다도 호사스러운 마을입니다. 기차역에다 다방까지 있습니다. 하동과 진주를 잇는 2번 국도에서 제일 큰 곳인 것 같았습니다. 순대라고 써 붙인 곳에 들어가서 순대국밥을 시켰습니다. 먹을 복은 타고났는지 순대국의 맛이 그만입니다. 큼직하게 썰어놓은 돼지고기도 제주도의 '잔치집'이나 '큰일집'(제주도에서는 결혼식과 장례를 치르는 집을 각각 '잔치집', '큰일집'이라고 합니다)에서 먹던 옛날의 그 맛이어서 기분이 좋습니다. 말을 하는 김에 어렸을 적의 잔치집 풍경에 대해서 쓴 글을 조금 고쳐서 읽어 드릴게요.
어렸을 적의 잔치집 풍경을 생각해 봅니다. 마을에서 누가 결혼하게 되면 며칠 전부터 동네 사람들이 그 집에 모여듭니다. 잔치상이나 손님 접대할 음식을 준비해야 하니까 말입니다. 어린 우리들도 잔치집이 제 집인 양 학교 수업이 끝나면 바로 그 집으로 갑니다. 어머니를 찾아 그곳에서 배고픔을 해결한 다음에 돼지 잡는 데로 몰려갑니다.혹시 이 길을 지나게 되면 들러서 그 맛을 음미해 보세요.
그때는 고무공이 있기는 했지만 촌 아이들로서는 그걸 살 돈이 없으므로 짚으로 축구공을 만들어 놀던 때였습니다. 엉성하게 만든 거라 얼마 안 가 풀어지고 맙니다. 그런데 축구공으로 딱 쓰기 좋은 게 하나 있습니다. 바로 돼지 오줌통입니다. 그걸 얻으려고 돼지 잡는 데로 갔던 것입니다. 물론 큰 나무에 돼지를 매달고 죽이는 거며, 짚에 불을 붙이고 털을 그슬리는 흥미진진한 장면도 놓칠 수는 없지요. 김을 내며 돼지가 조각조각 나눠지는 것을 보면서 오줌통이 우리에게 던져질 순간을 조마조마하게 기다립니다.
저녁 늦게까지도 잔치집 분위기가 이어지는데 무엇보다도 돼지를 잡고서 고기를 삶는 장면이 그렇습니다. 전기불도 없는 밖에서 동네 남자 어른들이 모여 앉아 맛좋은 부위는 바로 구워 먹고 나머지는 다 큰 가마솥에 집어놓고 장작불을 때기 시작합니다. 특히 겨울철이면 밭에서 직접 키운 배추를 거기에 넣는데 그 국물 맛이 일품이었습니다. 지금도 이 국물이 있기는 한데 옛날의 맛이 안 납니다. 무엇보다 집에서 먹다 남은 음식물과 사람의 똥을 먹여 키운 시커먼 토종 돼지가 아니어서 그럴 것입니다.
삶은 돼지고기는 어디에 쓰느냐고요? 물론 손님에게 '반'으로 나눠줍니다. 결혼을 축하해 주러 손님이 오면 손님마다 밥과 국, 김치 등에다 아이들 손바닥만큼이나 큼직하고 두껍게 썬 그 고기 몇 점을 넣은 접시(이것을 '반'이라고 합니다)로 이루어진 상을 차리고 대접합니다. 그래서 잔치집에는 이 고기를 써는 도감이라는 남자 어른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참, 언젠가 돼지를 키우는 제주도의 변소(돝통)에 대해서는 얘기할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쓰레기를 만들지 않는, 가장 자연 친화적인 삶의 방법의 정수라고 할 수 있거든요.
이제 이런 풍성한 잔치집의 분위기는 잘 맛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그 흔적이 꽤 남아 있기는 하지만 돼지는 잔치집에서 직접 잡지 않고 주문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집에서 큰 가마솥에 놓고 삶기는 합니다. 그 대신에 공공연하게 노름이 벌어집니다. 엄청난 돈이 오고가고 막판에는 싸움이 벌어지기 일쑤입니다. 그러다 보면 잔치의 흥겨움은 어디로 가 버렸는지 모르게 사라지고 맙니다. 세상이 바뀐 탓이지요.
밑바닥까지 깨끗하게 그릇을 다 비운 다음에 식당을 나섭니다. 이번에는 겪은 바가 있어서 가게에 들러 과자도 샀습니다.
이제부터는 아무 걱정 없이 거리를 줄일 일만 남았습니다. 나라는 사람은 이렇게, 배가 부르자 극도의 단순함을 드러내고 마는 것입니다. 오늘은 5시 반까지 거의 40킬로미터 정도를 걸은 것 같습니다. 나머지는 시내 버스를 탔습니다. 진주에 도착하고 나서는 조금 늦어지더라도 다 걸어 버릴 걸 하는 후회도 잠깐 했지만 내일도 있으니까 무리하지 않길 잘했다고 곧 자위하고 맙니다.
낮에 식당이 안 보일 때, 억지로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었으면 울어 버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웃었습니다. 즐겁게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므로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거니와 곧 불만이 풀려 버리기도 합니다. 오늘도 행복한 날이었습니다. 다 여러분의 응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맙습니다. 내일도 계속하여 걷겠습니다.
사진 몇 장: 사진 1(진주까지 47Km), 사진 2(하동 읍내), 사진 3(2번 국도), 사진 4(느티나무), 사진 5, 사진 6, 사진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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