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난 길

슬픔에 대하여

귤밭1 2004. 10. 20. 00:39
슬픔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한다. 먼저 우리가 잘 아는-정확히 말하면 잘 안다고 여기는 윤동주의 <서시>를 읽는 것으로 시작하자.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와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슬픔이라는 말도 안 보이는데 슬픔에 대해서 얘기한다면서 이 시를 읽는 것이 이상하다고 할지 모르겠다. 얼른 보면 맞다. 하지만 부끄럼이라는 말을 슬픔과 겹쳐 놓았다고 이 시를 크게 잘못 읽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실 이 시의 맥락에서 부끄럼은 슬픔의 다른 말이라고 해도 좋다. 이 시를 꼼꼼하게 들여다 보자.

'하늘'은 바람직한 것을 뜻하는 원형적 상징이다. 높은 데는 오르기가 쉽지 않다. 중력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위에 있는 것은 인간이 추구해야 할 이상적인 것을 상징하게 된다.

육체상으로는 모든 사람은 중력의 법칙에 종속되어 있으며 그 때문에 상향 작용은 하향 작용보다 늘 더 어렵기 마련이다. 그래서 상향 운동은 성취의 개념으로 연상되며, 드높음이나 상승의 의미를 지니는 여러 이미지들이 탁월함과 왕권·지배 등의 개념을 흔히 연상시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때문에 누구에게나 <애써 올라가려고 노력한다>고 하면 자연스러우나 <애써 내려가려고 노력한다>고 하면 부자연스럽게 들린다. 왕은 신하들을 그 <위>에서 다스리지(rules 'over') 그 <아래>에서 다스리지는 않는다. 어려움을 <극복하고>('surmounting') 유혹을 그 <위에서>에서 이기지(triumph 'over') 그 <아래에서> 이기지 못한다. 나는 새, 공중에 쏘아 올린 화살, 별·산·돌기둥, 자라는 나무, 드높은 탑 등 위로 향하는 개념과 경험적으로 결부되어 있는 여러 이미지들은(기타 어떤 다른 의미가 이들 가운데 어느 것에 부가됐다 해도) 도달해야 될 대상, 획득하고자 하는 소망,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 선한 것을 의미하게 된다. (필립 윌라이트, 김태옥 역, <<은유와 실재>>, 문학과지성사, 1982, 114-5쪽.)
그런데 상징은 현실의 대상을 뜻하기도 한다. 상징이나 은유, 직유가 다 주지(tenor)와 매개념(vehicle)의 (차이 속의) 유사성에 근거하지만, 상징이 은유나 직유와 다른 점은 주지가 겉으로 나타나 있지 않다는 것 외에도 매개념이 현실적이라는 것도 참고로 알아 두자. 그러니까 서정적 자아가 실제로 '하늘'을 우러러보고 있다는 말이다.

서정적 자아는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할 정도로 드높은 이상을 철저하게 추구하고자 한다. 잎새에 이는 바람이니 얼마나 약한 것인가! 그러니까 조금의 흔들림도 용서할 수 없다는 태도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상을 추구하는 마음을 흔드는 것이 바람이다. 현실적으로 안전하게 삶을 영위하고 싶은 일상적인 욕망일 것이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이야말로 서정적 자아가 꿈꾸는 이상적인 삶이다. 그냥 시인이 되고 싶은 게 꿈이라고 받아들여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주어진 길'이라고 했으니 꿈을 이루는 일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읽을 수 있겠다. 아주 미세한 흔들림에 괴로워하며 현실에 안주하고자 하는 생각만 해도 참을 수 없는 것은 이 운명애에서 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런 삶을 어떻게 봐야 할까? 충분히 고결하고 칭찬할 만한 것이라고 해도 어딘가 유연성이 모자라고 포용력이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다. 얼른 생각하기에, 기계적일 뿐더러 참으로 우러러볼 만한 것이 아니라는 느낌은 아마도 일상적인 소박한 삶을 근본적으로 배척하고 있다는 데서 오는 것일 게다. 세상의 일을 어떤 영역으로 나누어 놓고 어떤 것만을 배타적으로 강조하는 사람을 가까이하기는 어렵다. 당연하게 그런 사람은 쉽게 부러지기도 한다. 세상의 일 자체가 그렇게 나누어지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현실적인 조건을 감안하고서 이상을 얘기할 때라야만 그 이상을 이루는 방법에 대해서 주위의 사람들과 같이 고민해 볼 수 있다. 대체로 큰 이상일수록 내 혼자만의 것은 아니고 다른 사람과 더불어 이루어 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위의 얘기는 둘째 연을 해석하기 위하여 해 본 것이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오늘 밤에도 여전히 나를 흔드는 바람이 불고 있다. 그것도 내 주위에서 부는 것이 아니라 저 높은 데서 별을 스치고 있는 것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저 드높은 이상(별)이 흔들림(바람)을 조용하게 수용하고 있고 서정적 자아는 이것을 알아보는 것이다! 한마디로 성숙한 태도에 이른 것이다. 이상도 현실의 조건을 제대로 고려할 때라야만 모든 사람이 끌어안을 수 있는 것이 된다. 이렇게 된다면 내 흔들림이나 사소한 욕망은 일방적으로 배척해야 할 것이 아니라 이상을 이루는 데 감안해야 할 필수적인 조건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가 읽을 만한 것이라면 무엇보다도 바람을 받아들이는 자아의 태도의 변화에 있다고 생각한다. 누가 나보고 순수하지 못한 자신을 변명하는 것이 아닌가고 한다면 자신있게 아니라고는 하지 못하겠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타락한 세상에서 진실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그 세상에 발을 들여놓고 따라서 같이 더러워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점도 감안해 달라고 주문하고 싶다. 어떤 이론가가 소설에 대해, 타락한 세상에서 타락한 방법으로 진정한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이 시를 읽는 데 적용해도 크게 그르지는 않을 것이다. 여담이지만, 요즘 노무현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굴리고 있다.

슬픔을 이야기하기 위하여 시에 나오는 부끄럼을 끌어들인다는 것이 좀 길어지고 말았다. 슬픔을 말하기 위해서 가장 알맞은 것이 이 시에 나오는 부끄럼이어서 그렇게 되었다.

그러면 도대체 슬픔이란 무엇인가? 슬픔은 이상적인 상태가 결여되었을 때 드러내는 감정이다. 이를테면 슬픔을 유발하는 비극은 이상적인 것이 현실에 패배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다른 예를 들어 보자.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면 슬프다. 왜? 둘이 행복하게 결합하고 있는 이상적인 상태가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위 시에서 서정적 자아가 이상을 그려 보며 부끄럽지 않게 살겠다고 마음먹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다.

이렇게 본다면 슬픔이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감정이기만 한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상을 느끼거나 생각하는 사람이 지니게 되는 게 슬픔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히려 슬픔을 겪지 않은 사람은 진정으로 용감할 수 없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슬픔은 그것을 겪게 하는 이상이 존재하기 때문에 다른 슬픔을 알아본다. 따라서 비극이 불러일으키는 감정 가운데 하나가 동정(연민)이라는 것은 아주 그럴듯하다. 이 동정이 슬픔의 연대를 이루게 하는 것이다. 슬픔이 힘이 된다는 것은 결코 헛말이 아니다.

따라서 슬플 때 흘리는 눈물이 우리 몸에 좋은 것은 당연하다. 전에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쓴 적이 있다.

그런데 눈물도 웃음과 마찬가지로 우리 몸에 좋답니다. 웃음이 그렇다는 말에 대해서는 얼른 동의할 수 있지만 눈물에 대해서는 좀 뜻밖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조금만 더 생각하면 그럴듯한 바가 있다고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실컷 울고 나면 가슴이 시원해지는 경험을 한 일이 있을 테니 말입니다. 비극의 기능으로 드는 카타르시스를 생각해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카타르시스는 원래 속에 들어 있는 거북한 것을 깨끗하게 하는 설사제를 뜻한답니다. 비극을 보고 나면 이런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인데 한마디로 마음이 정화된다는 말입니다. 왜 그러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복잡한 설명이 있습니다만 여기서는 비극적인 일과 정면으로 마주서는 데서 오는 결과라고 간단히 설명해 두겠습니다. 이런 경우에 흘리는 눈물은 마음의 때(진실을 가렸던 편견, 헛된 욕망)를 씻어내는 정화제인 셈입니다.

사실 눈물을 흘리는 경우를 가만히 생각하여 보면 눈물이 우리 마음을 깨끗이 해주는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불쌍한 사람들에 대한 동정의 마음, 자신의 부끄러움에 대한 솔직한 인정,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깊은 공감은 대개 눈물을 불러오게 됩니다. 물론 속이 상해서 흘리는 눈물은 처음에는 앞의 것과는 다르게 시작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탐욕을 비우는 쪽으로 흘러간다는 점에서 눈물의 일반적인 성질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요컨대 잘 웃거나 울자면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무엇에 집착해 있어서 다른 데를 보지 못하면 마음과 몸이 늘 무겁기만 합니다. (<웃음과 눈물에 대하여>)
이 글을 읽으니까 슬픔이 자기를 벗어나 다른 사람에게 손을 뻗는 일이라는 점을 알겠다. 내 테두리에서 벗어나니까 가벼워지는 것이고 그만큼 하늘 높이 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눈물을 흘리는 것은 내 마음 속의 더러운 것을 내 몸 밖으로 버리는(배설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위의 글에서 얘기한 바 있는 카타르시스의 원래 의미가 단순히 비유가 아니라는 점을 이제야 알겠다!

여기서 마치려니까 어딘가 미진하다. 그러고 보니, 원래 글을 쓰자고 했을 때 저 <<토지>>의 인물의 슬픔에 대해서도 얘기하고자 했었던 것이 생각난다. 또 전에 쓴 글의 일부를 옮겨야겠다.

마지막으로 이들의 맑은 심성에 대해서도 얘기해야 할 것입니다. 조병수는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어린이같이 천진무구하며, 할아버지인 길상도 소년 같은 면모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들이 이럴 수 있는 것은 슬픔과 외로움이야말로 삶의 본질이라는 점을 꿰뚫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인간은 절대로 막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조준구가 온갖 악행을 저질러도 병수는 생명에 대한 연민으로 묵묵히 감수합니다. 구제받지 못하여 하늘 아래 홀로 서 있는 자, 육체를 안고 버둥거리는 생명에 대한 슬픔을 느끼는 것입니다. 길상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미술을 제대로 배우고 화가의 길을 걷고 있는, 길상의 큰아들 환국이 길상이 그린 관음상을 보고 지감과 나누는 대화를 들어 볼까요.

"아버지는 참 외로운 분 같습니다."
환국이 말문을 열었다.
"관음상을 본 감상인가?"
"네."
"자네 말이 맞네. 원력(願力)을 걸지 않고는 그같이 그릴 수는 없지. 삶의 본질에 대한 원력이라면 슬픔과 외로움 아니겠나?"(<<토지>> 13, 솔, 311쪽)
슬픔의 눈물은 우리 영혼을 맑게 씻어 줍니다. 외로움은 자신의 내면과 마주하도록 하지요.(<<<토지>>의 길상과 병수>)
여기서 '삶의 본질에 대한 원력'은 문맥으로 보아 삶의 본질에 이르기 위한 힘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슬픔과 외로움이 그 힘이 된다면 아마도 삶의 본질이 바로 그 슬픔과 외로움이기 때문일 것이다. 슬픔의 근원적인 힘을 알아본 작가의 혜안에 대해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냥 얻어진 것이라기보다는 누구 못지않게 깊은 슬픔을 겪은 데서 오는 깨달음일 것이다.

지금 여러분은 어떤가? 슬픈가?

훈이네 집으로 가는 길

'책 속으로 난 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무  (0) 2004.10.22
웃음과 눈물에 대하여(2003. 2. 19)  (0) 2004.10.21
손에 대하여  (0) 2004.10.19
내가 뭐관데……  (0) 2004.10.18
나(2003. 5)  (0) 2004.10.17